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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4)화 (4/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4화

“이상하군. 평생 플로티나를 위해 살겠다던 게 그대 아니었던가? 대가 끊겨서 멸문하게 되면 곤란할 텐데?”

“아직 페르시스 님의 생식 능력이 온전하시니까요.”

솨아아아― 그 말을 끝으로 바람이 불더니 수 초간 침묵이 흘렀다.

플로아는 뱉은 말에 별 뜻 없다는 듯이 차를 들이켰다.

“그 애가 아니더라도 후계는 낳으면 된다, 이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네. 어차피 현행법으론 여자는 가문을 물려받을 수도 없죠.”

플로티나 공작가가 있는 스타시아 제국에선 오로지 남자만이 작위를 승계받을 수 있었다.

여자도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게끔 법을 개정하자는 의견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황제가 법을 개정해 줄지는 미지수였다.

“그게 아니면 달리 아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 이를테면 그 꼬맹이가 플로티나의 핏줄이 아니라든가.”

페르시스는 자신을 닮지 않은 메이가 친딸이 아님을 명백히 의심하고 있었다.

뭐, 의심의 여지는 충분했다. 남자 많던 비체가 낳았으니까.

“그것까진 제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제껏 플로티나의 혈육들은 전부 다섯 살 내외로 가문의 힘이 발현됐는데 그 아이는 열 살이 된 지금까지도 발현되지 않았죠.

“……내 아이가 아니라는 거군.”

“성인이 되기 전까진 모르는 거지요.”

가문의 힘은 성인이 되기 전 불시에 발현되니까요.

플로아는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됐다. 내 아이든 아니든 고아원에 보낼 거다. 아들이면 모를까, 딸이라서 가문에 아무런 쓸모도 없으니.”

플로아는 고개를 돌려 화원에 나온 메이를 보았다.

메이는 매정한 사내 두 명이 저를 두고 어떤 얘기를 떠들어 대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꽃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참으로 닮았습니다. 분명 나중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미인이 되시겠지요.”

비체 님처럼.

페르시스도 메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메이는 천진하게 분홍색 튤립에 코를 박고 향기를 맡고 있었다. ‘음~ 향기 좋네.’ 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페르시스는 메이와 주고받았던 대화를 떠올렸다.

‘넌 누구지?’

‘아, 아버지의 딸이요…….’

언젠가 그 여자와 나눴던 대화도 불쑥 떠올랐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에게 속박되고 싶지 않아요. 알잖아요? 제아무리 좋은 주인을 만난다 한들 새장 속의 새는 행복할 수 없다는 거.’

‘그래서 날 떠나겠다고?’

‘그게 제가 바라는 행복이니까요.’

그랬으면서. 그렇게 날 버렸으면서.

또 날 찾아와 내 마음을 헤집어 놓았지.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요.’

페르시스는 여전히 메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글쎄. 그다지 알고 싶진 않군.”

플로아는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가 보겠습니다. 혹여 고아원에 보내게 된다면 알려 주십시오. 더는 플로티나의 사람이 아니니 가문의 힘이 발현되지 않게 해야 해서요.”

“그래.”

대답을 들은 플로아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

“아- 날씨 좋다.”

나는 화원에 발을 딛자마자 눈을 감고 양팔을 벌려 따사로운 햇볕을 느꼈다. 햇빛을 받으니 엔도르핀이 마구 솟는 것 같았다.

같이 나온 엘렌은 그늘가에 서 있고,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화원을 구경했다.

블록마다 봄에 피는 꽃들이 가득했다. 여긴 튤립이고, 저긴 수선화고.

그러다 발견한 민들레 두 송이. 불어 날리기 좋은 민들레였다.

민들레 불어 날려야지~

나는 누가 가까이 오는지도 모르고 쭈그려 앉아 민들레 하나를 집어 들었다.

“후-”

불어 날리자 민들레씨는 바람 따라 자유롭게 날아갔다. 오랜만에 부니까 재밌었다.

재미 들린 나는 민들레 하나를 또 잡았다. 또 바람을 부는 순간.

“후-”

내가 날린 민들레씨가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옷에 잔뜩 묻어 버렸다.

헉. 미안해라. 털어 줘야지.

“죄송해요. 털어 줄게요.”

나는 민들레씨가 묻은 바짓자락을 손으로 탈탈 털어 주며 누군지 올려다보았다.

맙소사.

“아, 아버지, 아니지…… 각하?”

하필 또 페르시스였다!

페르시스의 적안이 나를 향했다.

저 눈빛은 장담하건대, 무언가 많이, 몹시, 심히.

불쾌하다는 거였다.

나는 민들레씨를 털어 주다 말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는 불쾌감이 가시지 않는 듯 보였다.

더러워진 옷을 보지 않는 걸 보니 불쾌감의 원인은 호칭인 건가.

각하라고 바로 정정하긴 했지만, 또 아버지라고 불렀으니까.

……어쩌면 그냥 내 존재 자체가 불쾌한 걸 수도.

나는 일단 그에게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하기로 했다. 나는 두 손으로 살포시 치맛자락을 잡고선 고개를 숙였다.

“각하를 뵙습니다. 저는 메이라고 합니다.”

“…….”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쳇, 사람 무안하게시리.

나는 그가 안 보이게 표정을 썩히다가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표정을 지우곤 그를 올려다보았다.

반 정도 뒤로 넘긴 단정한 머리칼. 짙은 눈썹. 오뚝 솟은 콧날. 단호한 입술.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는 놀라서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더, 훨씬 더 미남이다.

그리고 훨씬 더 차갑다.

제 딸에게 닿는 시선이.

아니, 딸이라고 여기고 있는 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이 사람이 소설 속에서만 접했던 냉혈한 페르시스다.

저 뜻 모르겠는 무표정을 하고 있는 이 사람이, 내 아빠다.

나를 버릴 사람.

그러나 내게 필요한 존재.

내가 그를 너무 빤히 봤던 탓일까. 그의 안광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더러 아버지라고 했었지.”

“네, 각하.”

왜? 누가 네 아빠냐, 질책하려고?

속으로만 퉁명스럽게 물었다.

“호칭을 바로잡은 이유는?”

바로잡다는 말이 조금 거슬렸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틀린 건 아니잖아?

굳이 그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어서 각하라고 부르고 있는 것뿐…….

“아직 친해지지도 않았는데 아버지라고 부르면 당황스러우실 것 같아서요.”

“네가 과연 내 친딸일지 확신을 못 해서가 아니고?”

페르시스의 말을 끝으로 분위기가 일순간에 싸해졌다. 멀찍이서 나와 페르시스를 지켜보던 엘렌, 정원사, 그 외 시종들까지 전부 입을 꽉 다문 채 서로 눈치만 보는 게 보였다.

나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간신히 참았다.

저게 애한테 할 소리야?

물론 애를 고아원에 보내려 한다는 것부터가 올곧은 품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안다.

그래도 그렇지. 저런 말을 하다니…….

설령 진짜로 친딸이 아니더라도 애는 죄가 없잖아. 왜 애한테 그러냐고!

나는 괜히 감정이 고양돼서 당돌하게 굴었다.

“전 각하의 딸이 맞아요.”

“어떻게 확신하지? 너와 내가 닮은 구석이 뭐가 있다고.”

확실히 닮은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생머리? 그렇지만 같은 생머리인 걸로 닮았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자식이라고 해서 부모를 골고루 닮을 수는 없는 거니까요.”

“하, 그래?”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그의 눈썹이 삐딱하게 추켜 올라갔다. 아마도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듯했다.

“난 내 친자식인지 아닌지도 모를 꼬맹이 따위 키울 생각 없다. 아니, 친자식이라고 해도 키울 마음 없지. 그러니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무얼 얘기할지 예상이 갔다.

원작 내용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다. 지금 페르시스의 모습은 누가 봐도.

“내 집에서 나가.”

불청객을 내쫓는 모습이었으니까.

이를 엿듣고 있던 시종들은 까무러칠 만큼 놀랐다. 그가 비체의 아이를 달가워하지 않을 거란 건 짐작했겠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을 터.

다들 하나같이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하는 얼빠진 얼굴들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심장은 페르시스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쿵쿵 세차게 뛰었다.

왔다. 결국엔 올 게 왔어. 그래, 어쩌면 이건 내가 메이인 이상 꼭 거쳐야 할 난관이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애써 주눅 들지 않은 척 물었다.

“절 키울 마음이 없는 이유가, 제가 각하께 필요 없는 존재라고 판단돼서인 거죠?”

“그렇다면?”

나는 자신 있는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제가 각하께 필요한 사람이 될게요.”

“…….”

페르시스는 또 무응답이었다. 입가에 비웃음이 미세하게 감도는 게, ‘겨우 너 따위가?’라고 생각하나 보다.

비웃는다 이거지? 나한테 다 계획이 있거든?

“증명해 보일게요. 성인이 될 때까지만 키워주신다면 제가 꼭-”

“겨우 한다는 소리가.”

그가 무서운 목소리로 내 말을 잘랐다.

“성인이 될 때까지 내 돈을 좀먹겠다는 소린가?”

……뭐?

나는 당황해서 눈만 껌뻑였다.

좀, 좀먹는다니. 물론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확실히, 내게 들어가는 의식주 비용은 한 푼도 빠짐없이 페르시스의 돈이었다.

하지만 그걸 좀먹는다고 표현할 줄은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내가 기생충도 아니고…….

페르시스는 당해 내기 힘든 강적이다. 이렇게 기를 꺾고 몰아붙이니 그 어린아이가 순순히 고아원에 간 거겠지.

원작 메이를 생각하니 괜히 울컥했다.

멀리서 나를 지켜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엘렌은 내가 울 것 같아 보였는지 내 쪽으로 달려왔다.

엘렌이 식은땀을 흘리며 페르시스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는 엘렌에게 눈길을 주고선 어이없다는 듯이 일소했다.

“넌 일전에 비체에게 붙여 줬던 시녀가 아닌가? 네가 이 꼬맹이를 키웠나?”

“……죄송합니다.”

페르시스는 쯧, 혀를 차더니 미간을 한 번 구겼다 폈다.

“고아원을 운영하는 티보르 남작에게 서신을 보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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