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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3)화 (3/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3화

메이와 마주친 후, 페르시스가 발을 딛는 복도 곳곳에 정적이 머물렀다. 뒤따르는 그의 호위, 요한이 아주 숨죽일 만큼.

페르시스가 침묵을 깼다.

“날 아버지라고 부르더군.”

“……주인님의 어여쁜 따님이시니까요.”

“그렇다기엔 날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말이야.”

요한은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답을 해도 되는 건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감히 주인을 닮았다, 안 닮았다, 제 주제에 떠들어도 되는 건지.

“가문의 힘도 느껴지지 않아.”

앞장선 주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볼 필요도 없다. 어차피 아무런 표정도 아닐 테니까.

“아직 어리시니까요. 가문의 힘은 성인이 되기 전, 불시에 발현되잖아요.”

하나, 그 무표정에서라도 제 주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고 싶었다.

“글쎄. 나도 아버지도, 망할 파스칼도 다섯 살이 채 되기 전에 발현됐는데 말이지.”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혹시나 딸을 인정하지 않는 걸까?

인정하지 않는다면…….

“플로아의 짓인가?”

“……네?”

잠깐 생각이 딴 길로 샜던 요한이 흠칫 놀랐다.

“내 집에 누가 사는지 내가 모를 리가 없지. 그것도 애가 저만큼 클 동안이나.”

요한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게…….”

“플로아가 내가 그 꼬맹이의 존재를 모르게 하는 마법이라도 걸었는지 묻는 거다.”

“…….”

“맞으면 맞다고 해. 그 꼬맹이더러 내 딸이라고 하는 걸 보니 넌 알고 있었잖아.”

“……맞습니다.”

요한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페르시스가 우뚝 멈춰 섰다.

“티보르 남작에게 서신을 넣어.”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요한은 궁금했던 그의 표정을 보게 되었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았을 법했다.

아아, 가여운 우리 아가씨.

“그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여자애 한 명 보낼 거라고.”

그 말을 하는 그 순간에도 페르시스는 더할 나위 없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고아원……이요?”

정말로, 진심으로 아가씨를 고아원에 보내실 생각입니까?

“왜, 문제라도 있나?”

무정한 어조에 요한의 마음이 다 아팠다.

“아가씨께선 주인님이 자신의 아버지라 굳게 믿고 계세요. 아버지가 자길 고아원에 보내려 한다는 걸 알게 되면 크게 상처받으실 거예요.”

본디 요한은 제 주인의 말에 토를 다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해야 했다.

열 살이 되도록 부모의 손길 없이 컸더니만 이젠 고아원에 가야 할 처지에 놓인 아가씨가 너무 불쌍해서.

그런데 페르시스에겐 아닌가 보다.

“그래서, 지금 나더러 내 친딸일지 아닐지 모를 아이를 키우라고?”

“…….”

그의 물음에 요한은 기가 한풀 더 꺾였다.

확실히, 아가씨가 주인의 친딸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아가씨가 가여워서…….”

요한은 도저히 페르시스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고개를 떨궜다. 페르시스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요한, 가엾다는 건 누가 정의하는 거지?”

“그건…….”

“가엾다는 것만큼 기준이 불명확한 것도 없다. 어떤 기준으로 보면 모두가 가엾고, 또 어떤 기준으로 보면 모두가 가엾지 않지.”

“…….”

“가엾다는 이유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도움을 주면 끝도 없어.”

그 옛날에 미련한 바보 천치나 다름없던 자신의 아버지가 망할 파스칼을 거둬들였던 것처럼.

요한은 숙연해져서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거둬야 할 땐, 거둬야만 하는 구체적인 이유와 보장되는 이익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일단 그의 딸이고, 힘없는 어린아이다.

‘애한테 이유와 이익을 따져야 할까? 과연 그게 옳은 걸까?’

옳지 않더라도 페르시스는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페르시스가 앞을 보며 다시 걷기 시작하자 요한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난 플로아를 만나고 오겠다.”

“혼자서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 넌 티보르 남작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페르시스는 늘 그랬듯 반듯하면서도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멀어져 갔다. 요한은 한층 어두워진 낯으로 그의 명을 따랐다.

“……존명.”

***

엘렌과 대화를 나누던 나는 생각에 잠겼다.

플로아. 플로티나가의 수호신.

초대 플로티나 가주가 스타시아 제국 건국의 공을 세워 공작 작위를 얻고, 페르시스가 제4대 가주에 이르기까지 가문의 위엄과 명맥을 유지해 준 장본인.

플로아는 초대 플로티나 가주에게 평생 플로티나 가문에 복종할 것을 맹세하는 계약을 맺었다.

‘말만 수호신이지 사실상 노예…….’

노예 계약이라고 하면 플로아에게 굉장히 부당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초대 플로티나 가주가 플로아의 목숨을 구해 준 걸 계기로, 플로아 본인이 자처해서 플로티나에 모든 것을 바치기로 한 거였으니까.

그렇게 가문의 수호신이 된 플로아.

사실 메이는 그 플로아의 마법 덕에 열 살 때까지 공작저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이고, 현재는 마법이 풀렸다.

마법이 왜 풀렸을까. 마법이 계속 유지됐으면 ‘이 집에서 지내다가 혼자서 먹고 살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출가하기!’ 목표를 손쉽게 달성했을 거 아냐.

나는 번호 하나 차이로 로또 당첨에 실패한 것처럼 안타까워하며 엘렌에게 물었다.

“마법은 왜 풀린 거야? 이왕이면 성인 됐을 때 풀어 주지.”

“아까도 설명해 드렸지만 플로아 님께선 주인님이 아가씨를 키울 거라 확신이 들 때 마법을 풀겠다고 하셨어요.”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 그때라고? 아까 페르시스 얼굴 보니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원작 내용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더더욱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엘렌 또한 본인이 알려 주면서도 지금이 그때가 맞나 하는,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음…… 플로아 님이 아무래도 판단을 잘못 내린 것 같지?”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엘렌이 겸연쩍게 미소를 보였다.

이제 어쩌지.

“플로아 님을 만날 수 없을까? 아무래도 아빠는 날 반기지 않는 것 같아서 말야. 다시 마법을 걸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

“제가 플로아 님의 위치를 알면 바로 알려 드렸을 텐데 사실 저도 잘 몰라서……. 주인님이라면 아실 수도 있겠지만…….”

페르시스에게 물어볼 상황은 아니지. 나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렌이 걱정스럽게 나를 보았다.

표정이 좋지 않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제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았나 보다.

엘렌은 눈썹을 추욱 내리곤 내 두 손을 가져와 꼭 쥐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플로아 님께서도 다 생각이 있어서 마법을 푸신 걸 거예요. 저희 모르게 주인님이 은근히 자식을 원하셨을 수도 있고요.”

나는 엘렌이 감싼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 또한 그녀 말대로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니란 것을 안다. 원작처럼 페르시스는 날 키울 생각 없을 거다.

그래, 자식은 원했을 수도 있겠지. 그 원하는 자식은 내가 아니라 스텔라가 되겠지만.

나는 쓰게 웃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덧없이 맑은 하늘. 그 밑엔 가고 싶어도 못 갔던 화원이 있다.

원작에서 앞마당 화원이 메이와 페르시스의 첫 만남 장소여서 가고 싶어도 못 갔었지. 그와 만나게 될까 봐 두려워서.

하지만 이미 만나 버렸으니 나가도 상관없다.

‘기분 전환 겸 갔다 오자.’

“나 화원에 갈래.”

***

플로티나 공작저 앞마당 화원은 그 어떤 화원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흰 울타리가 쳐진 각각의 블록마다 심겨 있는 색색의 꽃들. 중앙에 자리한 커다란 대리석 분수.

그리고 화원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가제보 하나. 그 가제보엔 누군가가 느긋하게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살랑살랑 휘날리는 백발. 음미하던 찻물에 도드라지게 비친 짙은 회색 눈동자.

나른미를 풍기는 그 사내는 플로아였다.

플로아는 나이가 많지만 외관은 2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한 번 더 그의 고운 얼굴을 스치고 지날 때쯤 페르시스가 다가왔다.

“그 꼬맹이의 존재를 아는 이가 얼마나 되지?”

플로아가 찻잔을 내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공작저에 지내는 고용인들뿐입니다.”

“나를 농락하는 게 꽤나 재밌었겠어, 플로아.”

그의 적안에 옅은 분노가 서렸다. 화가 났으나, 화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비체 님의 부탁이었습니다.”

“왜, 숨길 거면 평생 숨기지 그랬어. 그럼 그 여자 뜻대로 그 꼬맹이가 나 몰래 내 집에서 잘 먹고 잘 살았을 텐데.”

플로아의 대답은 한 박자 늦었다.

“……마법을 10년이나 유지하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거든요.”

다 뜻이 있을 거라는 엘렌의 추측은 틀렸다. 그냥 별 뜻 없이, 마법을 유지하기 귀찮아서 풀었던 것뿐.

페르시스가 플로아의 맞은편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팔은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안타깝게 됐어. 난 그 애를 고아원에 보낼 거니 지금까지 모두 헛수고한 거야.”

플로아가 시선을 내리깔곤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찻물이 잔잔한 파도처럼 흔들렸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저 비체 님의 부탁을 들어 드렸던 것뿐.”

그녀가 만삭의 몸으로 무릎까지 꿇고 간청하길래. 그저 조금 불쌍해서.

“그 애가 어떻게 되든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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