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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2)화 (2/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2화

복도로 나와서 두리번거리니 저 멀리 코너를 돌아가는 엘렌의 뒷모습이 보였다.

“엘렌!”

나는 복도를 뛰며 뒤쫓아 갔다.

“엘렌!”

코너를 돌아 다시 한번 부르니 그제야 엘렌이 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보았다.

“아가씨?”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초롱초롱한 눈빛을 장착하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엘렌, 나 커피 마시고 싶어!”

“커피요?”

“웅웅, 커피!”

반짝반짝. 이런 눈빛을 보내면 커피를 주겠지?

그러나 엘렌은 초롱초롱, 반짝반짝 따위에 휘둘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안 돼요. 성장기에 커피는 금물이에요.”

“딱 한 모금만, 응?”

나는 엘렌의 옷자락을 잡고 자리에서 콩콩 뛰며 앙탈을 부렸다.

“마시게 해 줘어어어.”

무려 1년 동안이나 커피를 못 마셨단 말야! 흑흑.

엘렌은 갑자기 커피를 찾는 내가 당혹스러운 듯했다.

“갑자기 커피는 왜 드시고 싶으신 거예요? 아가씨 한 번도 안 드셔 보셨잖아요.”

왜 커피 중독자가 커피를 찾는 것처럼 구냐는 듯 나를 의아하게 내려다보자, 나는 살짝 찔려서 잡고 있던 엘렌의 옷자락을 살포시 놓았다.

“그, 그냥 한 번도 안 마셔 봐서 맛이 궁금해.”

거짓말이 어색하게 나왔으나 다행히도 엘렌은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열 살은 한창 호기심 많을 나이니까.

“흠, 그럼 커피맛 쿠키는 어떠세요? 커피맛이 나지만 카페인 함량이 아주 적은 쿠키가 있거든요.”

커피맛 쿠키라. 커피가 아니라서 아쉬웠지만 그것 나름대로 맛을 느낄 수는 있으니 만족하기로 했다.

더 앙탈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도 하고, 엘렌 말마따나 커피는 성장기에 안 좋으니까.

“알겠어. 커피맛 쿠키 가져다줘.”

“방에 들어가 있으세요. 가져다 드릴게요.”

“응.”

엘렌을 보내고, 나는 왔던 길을 돌아갔다.

앞으로도 샌드위치 먹은 후에 디저트로 커피맛 쿠키를 먹으면 딱이겠네.

“맛있으면 내일도 달라고 해야지, 히히.”

내가 커피맛 쿠키를 상상하며 코너를 도는 그때였다.

“어……?”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누군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일순간에 주위를 감싼 공기가 서늘해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지. 이 느낌은.

이 불안한 느낌은.

나는 대략 3초간 내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망할 예감이 내가 꼭 피해야 할 그 사람임을 가리키고 있어서였다.

누군지 확인해야 하나? 그냥 눈 깔고 달아날까?

하지만 겁먹은 다리는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삐걱삐걱 로봇처럼 고개를 들어 올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직시했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닿으면 까맣게 물들일 듯한 흑발.

핏빛 같은 적안.

여차하면 죽여 버릴 듯한 냉혈한 분위기.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던가.

이 남자는 누가 봐도 페르시스였다.

***

페르시스는 어떤 꼬맹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키가 자신의 허리까지 올까 말까 한 꼬맹이.

이상하다. 내 집에 이런 꼬맹이가 있을 리 없을 터인데.

꼬맹이는 무언가 내적 갈등을 하다가 결심한 듯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불쾌하리만큼 와그작 굳어졌다. 못 볼 거라도 본 것마냥.

사실 놀란 건 꼬맹이뿐만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도 꼬맹이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그 여자와 많이 닮아서.

“넌 누구지?”

누구길래 내 집에 있고, 그 여자와 이만큼이나 닮은 거지?

꼬맹이의 입술이 옅게 떨리며 벌어졌다.

그렇게 돌아온 대답은.

“아, 아버지의 딸이요…….”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다.

***

미쳤지, 내가 미쳤지!

페르시스를 만난 나는 필사적으로 그 자리에서 도망쳐 나와 내 방으로 도피했다.

미친 게 틀림없다. 뭐 자랑이라고 처음 만난 페르시스에게 자신을 딸이라고 자기소개해 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복도에서 마주친 처음 보는 여자애가 딸이라니.

내 말을 듣고 그의 미간이 구겨졌었다.

‘어처구니없었겠지.’

그냥 아무 대답 없이 도망쳤어야 했다. 차라리 그랬어야 했다.

아니지.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이미 마주쳐 버린 마당에?

나는 방문을 쾅 닫고 문가에 기대 주르륵 미끄러지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에 손을 얹으니 심장이 벌렁벌렁 뛴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원작에서 메이와 페르시스의 첫 만남은 화원이었는데. 그래서 화원에 가고 싶어도 꾹 참고 화원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그랬는데 왜 복도에서 마주친 거냐고!

“여태껏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으면서…….”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방 안에만 있으니 심심해서 도서실에 자주 들락거렸었다.

내 방과 도서실은 정반대 방향에 있었으나 오고 가다가 그를 마주친 적은 없었다.

한 번은 공작저가 넓어서 길을 잃었었다. 무려 1시간 동안이나 내 방을 못 찾고 저택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었다. 그때도 그를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자연스레 나는 화원에서 만나는 게 아니면 만날 일 없을 거라 생각하게 되었고, 거리낌 없이 자주 방 밖으로 나왔다.

페르시스와 마주치지 않길 그토록 바랐으면서 너무나 방심한 것이다.

나는 가슴에 얹었던 손을 바닥에 힘없이 떨어트렸다.

“망했어……. 커피는 왜 마시고 싶어서…….”

하지만 지금은 자책할 때가 아니다.

숨을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이제 아빠라는 작자가 나를 내쫓을 거다.

순순히 고아원에 가게 되면 답이 없다.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서든 이 집에 남아 있어야 한다.

다행인 건 이미 원작 내용과 전개가 달라졌다는 것.

‘현실은 원작 내용과 달라질 수 있다는 거야.’

그럼에도 막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페르시스의 성격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는 내가 가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기 혈육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나를 고아원으로 쫓아내려는 건 변함이 없겠지.

이런 상황을 대비해 마련해 둔 방안이 없는 건 아니다.

내가 혼자서 먹고살 나이가 되기 전에 페르시스에게 발각되었을 경우 마련해 둔 방안이 하나 있다.

“그렇지만 그건 최후의 수단이야.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살아남을 방법이 그뿐이라면 사용해야겠지만.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달칵 열리더니 엘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손엔 커피맛 쿠키가 들려 있었다.

“아가씨, 커피맛 쿠키 가져왔…… 어라? 왜 여기에 앉아 계세요?”

엘렌이 문가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의아하게 내려다보자, 나는 당장이라도 울듯 울상을 지었다.

“엘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렌을 와락 껴안았다.

“어머? 저 없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나, 아빠를 만났어…….”

그 대답에 엘렌은 순간 들고 있던 쿠키를 놓칠 뻔했다. 눈은 이미 화등잔 만하게 커진 상태였다.

“주, 주인님을 만나셨다고요……?”

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엘렌이 체념하듯 말했다.

“마법이…… 풀렸나 보네요…….”

“마법?”

마법이 풀리다니?

“무슨 마법?”

“플로아 님께서 비체 님의 부탁을 받고 주인님께 걸어 두었던 마법이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마법인데?

내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니 엘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잊으셨어요? 플로아 님께서 주인님이 아가씨의 존재를 알지 못하도록 하는 마법을 걸어 두셨잖아요.”

메이의 기억이 없는 나로선 처음 듣는 얘기였다. 게다가 원작 내용에도 없는 이야기.

하긴, 일개 조연의 속사정 따윈 소설 본문에 적혀 있지 않았겠지. 소설은 주인공을 위해서 존재하니까.

내가 정황에 대해 자세히 물으니 엘렌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원작 소설에 밝혀지지 않았던 뒷이야기는 이러했다.

페르시스에겐 자신의 구원자라 여기며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게 바로 메이의 친모, 비체 유리에트.

남자가 많을지라도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비체 또한 그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그가 괴로울 때 줄곧 곁에 있어 주었다.

그래서 청혼까지 하였으나 그녀는 끝내 거절.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누군가에게 속박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며 그를 버렸다.

그리고 석 달 뒤에 그에게 돌아온다.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요. 이곳에서 머물게 해 줘요.’

페르시스는 자신을 버린 그녀를 내보내려 했지만 그런 다짐과는 달리 벌써 그녀에게 머물 방을 내어 주고 시녀도 붙여 주고 있었다.

석 달간 그녀를 그토록 원망했던 게 무색하게도.

그녀를 집 안에 들인 것을 바로 후회했으나 아이를 가진 몸이니 내쫓진 않았다. 하지만 냉담한 의사를 일러두긴 했다.

‘난 네 배 속에 있는 아이 키울 생각 없어. 아이를 낳으면 데리고 이 집에서 나가.’

‘하지만 당신 자식인데…….’

‘네가 낳은 아이는 필요 없어. 그게 설령 내 핏줄일지라도.’

페르시스가 아이를 키우지 않을 것 같아 보이자 비체는 플로티나가의 수호신인 플로아에게 간청했다.

아이를 낳은 후엔 자기는 떠날 테니 아이만큼은 이곳에서 자라게 해 달라고.

그래서 플로아는 아이가 페르시스 몰래 공작저에서 자랄 수 있도록 마법을 건다.

아이의 존재를 절대로 알 수 없도록. 같은 집에 살지만 아이와 절대로 마주치는 일 없도록.

이때쯤이면 페르시스가 제 아이를 키우겠구나, 하는 판단이 설 때까지.

그 후 비체는 메이를 낳다가 죽었다.

그 얘기를 다 들은 나는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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