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화
“딸이 내게 무슨 필요가 있지?”
한없이 작고 여린 딸을 쳐다보는 페르시스는 냉담하고 비정했다.
“자식을 두는 이유는 전부 가문을 위해서다. 한데 넌 여자라 가문을 물려받지 못해.”
가문을 승계받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남자뿐. 딸인 메이는 가문을 물려받을 수 없었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너를, 내가 왜 거둬야 하냐는 말이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린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이제 겨우 열 살이 된 메이는 아버지의 살기에 몸을 덜덜 떨었다.
“저, 저는 각하의 핏줄이니까요…….”
“핏줄?”
저의 혈육이라는 소리가 그렇게나 거슬렸는지 페르시스는 눈썹을 삐딱하게 추켜들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읊었다.
“핏줄이라.”
그는 메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다시 입을 뗐다.
“넌 내 핏줄이 아니야.”
싸늘한 음성이 귀에 박히자 메이의 눈에서 유리구슬 같은 눈물이 후두두 떨어져 나왔다.
“아, 아니에요……. 저, 저는 각하의 자식이에요…….”
“단 한순간도 널 내 자식이라 생각한 적 없다.”
“각하…….”
“그러니까 내 집에서 나가.”
절망에 짓눌려 메이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페르시스는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을 혀를 찼다.
“한심한 것.”
그의 감상이 그랬다.
한심하다. 무능력한 게 아무짝도 쓸모가 없다.
그렇다고 하여 정이라도 있는가? 없다. 그 여자가 낳은 아이인데 있을 리가.
애석하게도 그것이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감상이었다.
페르시스는 끝까지 메이를 차갑고도 건조한 눈으로 내려다보곤 자리를 떠났다.
“두 번 다신 내 눈에 띄지 마라.”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을 무정한 뒷모습을 하며.
메이는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며,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
“이게 말이 돼? 죄 없는 메이만 배드엔딩이잖아…….”
소설 《페르시스의 입양딸》을 완독한 내가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페르시스의 입양딸》은 자신의 딸을 버릴 정도로 비정한 페르시스가 주인공에게 푹 빠져 입양딸로 들여 키우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육아물이었다.
메이는 페르시스가 주인공을 입양하기 전 그에게 쫓겨난 한낱 조연, 사생아.
그녀의 어머니는 출산 중 사망했고, 메이는 페르시스의 방치하에 외롭게 자란다.
그러던 메이가 열 살이 되는 해에 공작저 앞마당 화원에서 페르시스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데, 그때 그가 메이를 보며 던진 말은.
‘이상하군. 분명 낳다가 같이 죽은 줄 알았는데.’
였다.
딸의 존재도 몰랐다는 말이었다.
그 후 페르시스는 친딸이 아닐지도 모를 메이를 몹시 거슬려했고, 공작저에서 내쫓기로 결심한다.
메이는 내쫓지 말라며 애원하지만 페르시스가 끝까지 자식으로 여기지 않아 그의 뜻대로 순순히 고아원에 간다.
“그 후 사기꾼에게 입양돼서 노예로 이리저리 팔려 다니다가 백작가 영애에게 스트레스 풀이용으로 맞다가 죽는 결말이라니…….”
이런 배드엔딩이 어딨어?
더욱 화가 나는 건, 페르시스가 메이를 고아원에 보낸 후 1년 뒤에 피 한 방울 안 섞인 여자애를 입양딸로 들인다는 것이다.
제목이 《페르시스의 입양딸》인 것답게 주인공은 그 입양딸, 스텔라다.
딸이 필요 없다며 메이를 고아원으로 쫓아낼 땐 언제고 입양딸을 들인다니. 심지어는 입양딸을 무척 아끼고 사랑해 준다.
메이에겐 냉혈하기 그지없었던 그 페르시스가 말이다!
스텔라가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법한 아이이긴 했다. 예쁘고 귀엽고 착하고 예의 바르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애교도 잘 부리고.
그 덕분인지, 단순히 주인공이어서인지 스텔라는 페르시스에게 사랑받고 자라며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비참하게 죽은 메이와는 다르게.
메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쿡쿡 찔리는 듯 아팠다.
혼자 얼마나 괴로웠을까. 백작가 영애에게 맞아 죽는 그 순간에도 메이는 아버지의 온기를 바랐었다.
자신이 이대로 죽게 된다면, 그건 아버지 때문임을 알면서도.
나는 침대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
메이, 네가 행복할 수는 없었던 걸까?
주책맞게 가슴 한편이 벅차오르더니 눈 틈새를 비집고 맑은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나왔다.
뺨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어떤 가여운 영혼이 내 눈물을 닦아 주는 듯했다.
***
“아가씨.”
플로티나 공작저. 메이의 방 안.
나는 거울을 앞에 두고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메이 아가씨.”
엘렌이 몇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 어? 불렀어?”
“그럼요. 다섯 번이나 불렀는걸요?”
“미안, 딴생각 좀 하느라.”
“머리 완성됐어요.”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이국적으로 생긴 귀여운 소녀가 비쳤다.
흰 피부에 사슴같이 예쁜 눈과 맑고 반짝거리는 벽안. 오밀조밀 귀여운 코와 입. 귀엽게 양 갈래로 땋인 백금색 머리카락. 분홍색 토끼 잠옷을 입고 잘 준비를 마친 열 살 소녀.
그게 메이. 지금의 내 모습이었다.
난 도대체 왜 이 몸에 빙의한 거지…….
소설 《페르시스의 입양딸》 속 플로티나 공작가의 사생아, 메이.
나는 소설 속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조연의 몸에 빙의해 버리고 말았다.
빙의했을 당시의 메이는 아홉 살이었다. 1년 동안의 적응기를 거쳐 지금은 이 몸에 완전히 적응했지만…….
보통 빙의를 하면 빙의한 세계의 언어가 모국어마냥 잘 읽힌다던데 나는 그런 능력도 없고 메이의 기억도 없어서 언어를 익히는 데에 애 좀 먹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메이가 머리가 좋다는 것.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서 겨우 1년 공부했는데 성인 못지않게 제국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나는 엘렌이 땋아 준 양 갈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싱긋 웃었다.
“머리 예쁘다. 자고 일어나면 더 예쁜 웨이브가 되어 있겠지?”
“물론이죠.”
내 옆에 있는 이 청초한 외모의 여인은 시녀, 엘렌. 나를 챙겨 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나와 제일 가까운 사이다.
엘렌은 메이가 그녀의 친모, 비체 유리에트의 배 속에 있었을 때부터 곁에 있던 시녀로, 메이가 갓난아기일 때 죽은 비체를 대신해 키웠으니 사실상 유모라 불러야 맞다.
뭐, 시녀나 유모보단 이름으로 부르는 게 더 친근감 있어서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내가 또 생각에 잠겨 있으니 엘렌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요즘 들어 자주 멍하니 계시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무슨 일이라……. 내 목숨이 걸린 아주 심각한 일을 앞두고 있긴 하지.
숨길 여력도 없이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지금 내 나이는 열 살. 계절은 봄이고, 원작 속 메이가 공작저에서 쫓겨나는 것도 열 살 봄이었으니까.
이 집에서 쫓겨나는 것에 대한 걱정은 빙의 직후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 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백작가 영애에게 맞아 죽는 결말을 피하려면 고아원엔 한 발짝도 들여선 안 되기 때문이다.
내가 고아원에 버려지는 순간 나는 예정대로 사기꾼 손에 넘어갈 테고, 노예로 팔려 다니다가 끝내 나를 죽일 여자가 있는 백작저에 들어가게 될 테니까.
공작저에서 쫓겨나더라도 고아원에만 가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페르시스가 고아원으로 내쫓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 쳐서 출가하자는 생각으로 돈을 모아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제 활동 능력이 없는 내가 돈을 모으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많이 모은다 한들 열 살의 나이로 출가하기엔 위험 요소들이 너무나 많았다.
혼자 사는 열 살짜리 소녀라니. 온갖 나쁜 놈들의 표적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출가 생각은 잠시 접어 두고, 어떻게든 하루라도 더 오래 이 집에서 사는 걸 목표로 하게 되었다.
내 몸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때 출가하려고.
문제는, 고아원에 가게 되면 이 목표는 산산이 부서져 꼼짝없이 원작 내용대로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메이가 죽는 내용대로.
물론 순순히 원작 내용대로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래서 메이가 페르시스와 첫 만남을 가지게 되는 공작저 앞마당 화원엔 여태껏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화원에 안 간다고 해서 페르시스와 만나지 않게 된다고 보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불안하다. 결국 원작처럼 될까 봐.
끝없는 불안함 속에 잠식되어 갈 때쯤.
“봐요. 또 제 말 못 들으시고.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엘렌이 쭈그려 앉아 내 의자 팔걸이에 손을 얹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옅게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졸려서 그런가 봐.”
“그럼 이제 주무실까요?”
“웅.”
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내가 쓰는 침대는 안락하고 푹신푹신해서 금방 잠들 수 있게 해 주는 퀸사이즈 침대였다.
내가 눕자 엘렌이 이불을 덮어 주었다.
“좋은 꿈 꾸세요, 아가씨.”
“엘렌도 잘 자.”
엘렌은 내게 엄마 미소를 보여 주곤 불을 껐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거울을 보며 땋은 머리를 풀었다. 어제의 예상대로 머리카락에 예쁜 웨이브가 생겼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웨이브가 잘됐는데?
생머리보다 웨이브 머리를 좋아했던 나는 자주 머리를 땋고 잤었다.
컬이 잘 나온 머리를 보고선 기분이 좋아 콧노래를 부르는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엘렌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가씨, 식사하세요.”
아침 메뉴는 햄에그 샌드위치와 우유. 트레이와 함께 들어온 엘렌이 테이블 위에 아침을 내려놓았다. 나는 쪼르르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맛있게 드시라는 말을 남기고 엘렌은 밖으로 나갔고, 나는 두 손으로 샌드위치를 잡았다. 아직 열 살짜리의 작은 손이라 샌드위치를 먹을 때도 손이 두 개나 필요했다. 안에 들어 있는 달걀 스크램블은 푸짐해서, 밖으로 넘칠 것 같았다.
한 입 앙! 베어 물려던 순간 우유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 우유 말고 커피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빙의 전, 나는 커피를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좋아했었다. 빙의 후엔 나이가 어려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말을 쉽사리 꺼낼 수 없었는데…….
엘렌한테 커피 마시고 싶다고 얘기해 볼까?
커피가 무척이나 당겼던 나는 망설이지 않고 샌드위치를 도로 내려놓은 후 방 밖으로 나갔다.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