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61화 (외전 완) (161/161)

외전 6화.

연주는 황실 모두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서서히 몸을 회복했다. 좁디좁은 배 안에서 나온 아이들은 염려와 달리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타고난 성정이 순한 아이들은 배부르게 젖을 먹고 나면 칭얼거리지 않고 깊은 단잠을 잤다.

이처럼 아이들이 무탈하게 성장하는 동안, 상흠궁에는 매일 세도가의 선물이 밀려들었다. 진귀한 향료, 비단, 금은보화는 물론, 보양에 좋은 약재와 식재료로 곳간이 넘쳤다.

백성들은 태평성세를 불러온다는 용봉태(龍鳳胎), 즉 황실에 태어난 남녀 쌍둥이의 존재에 기뻐하며 밤낮으로 황실을 칭송했다.

그러나 이렇듯 남부러운 것 없어 보이는 연주에게도 근심은 있었다. 좀처럼 아이들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는 정엽 때문이었다.

연주는 이날도 황금 요람에서 평화롭게 잠든 아이들을 토닥여 주다 작게 한숨지었다.

보기만 해도 흐뭇한 손주들 모습에 내내 미소를 짓던 평해왕비가 딸의 얼굴에 진 그늘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마의 존안이 어둡습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며칠 뒤면 벌써 삼칠일인데 폐하께서 아이들을 어려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

딸의 고민을 들은 평해왕비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정엽은 연주의 출산 이후 정무를 볼 때를 제외하곤 줄곧 아내의 곁을 지키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매일같이 아이들을 만나면서도 강보에 싸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아이를 안아 주거나 손을 뻗어 온기를 나누지 않았다.

틈만 나면 아내를 보듬어 안고 입 맞추는 게 습관인 정엽이 정작 제 혈육에게는 무심하니 근심스러운 게 당연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은 천륜. 부모가 슬하의 자식을 어여삐 여기고 자식이 그 사랑에 공경으로 보답하는 것은 사람이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저에 대한 정엽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의심해 본 적 없지만, 별수 없이 속상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간 꼭꼭 숨겨 두었던 마음을 내비친 연주가 속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황자녀가 태어나던 날 느낀 바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평해왕비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폐하께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건지도 모릅니다.”

“시간……이요?”

연주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망설이던 평해왕비가 뒷말을 이었다.

“마마께서는 아기씨들과 열 달간 한 몸으로 이어져 계셨으니 아기씨들이 그저 사랑스럽고 애틋하신 게 당연합니다. 매일 안고 어루만져 봐도 부족하시겠지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다르시지 않습니까.”

“다르다고요? 어째서…….”

“첫 자식은 아니지만, 폐하께서도 아버지가 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십니다. 돌아가신 선황 폐하께는 망극한 말씀이지만, 지금의 폐하께선 어려서부터 외롭게 자라 오신 분이기도 하고요.”

“아…….”

재혼 후 황후로서, 아내로서 정엽과 한 몸 한뜻으로 움직이는 데 익숙했던 연주는 한동안 잊고 지낸 사실들을 상기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선황은 정엽에게 다정한 아버지이기보다 냉엄한 제왕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기원하며 매번 전장으로 등을 떠미는 아비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으랴.

보통의 아버지들에게 자식이 어떤 존재인지, 또 자식에게는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지 정엽이 제대로 알 리 만무했다.

“…….”

연주는 생각 많은 얼굴로 한숨을 삼켰다. 아이들이 무사하게 태어난 것을 기뻐하느라 미처 정엽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자책이 밀려들었다.

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평해왕비가 침울한 눈을 한 연주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폐하께서는 황후마마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사실 아기씨들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실 거예요. 마마께서 천천히 폐하를 도와드리세요.”

어머니의 조언에 한층 용기를 얻은 연주가 마음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볼게요. 감사해요.”

* * *

시간이 흘러 황자녀의 삼칠일이 지났다.

온 황궁이 난생처음 바깥세상에 나와 보는 황자녀를 맞이하기 위한 행사 준비로 떠들썩했다.

오랜만에 황후의 예복을 갖춰 입고 단장을 마친 연주는 침전으로 돌아가 아이들이 나란히 잠들어 있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깊이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조심조심 쓰다듬은 뒤, 습관처럼 살포시 엎드려 뽀얀 살결에 코를 묻었다. 언제 봐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선 과자처럼 고소하고 사탕처럼 달콤한 내음이 풍겼다.

그렇게 아이들의 체취에 중독돼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려니,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정엽이 뒤에서 연주를 불렀다.

“잠이 든 거야?”

아이들과 침상에 엎드려 있으니 잠이 든 줄 오해한 걸까. 조심스러운 정엽의 부름에 눈을 뜬 연주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정엽의 행동이 연주보다 빨랐다.

난데없이 허공으로 떠오른 연주가 놀란 얼굴로 정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당신을 깨운 것 같군. 피곤하면 오늘 행사는 다음으로 미루지.”

“아니에요.”

연주는 언제나 저를 먼저 배려해 주는 정엽이 고마워 그의 목을 끌어안고 뺨을 기댔다.

“그냥. 아이들 냄새가 너무 좋아서 잠깐 정신이 팔렸던 것뿐이에요.”

“그렇게 아이들이 좋아?”

물론 정엽 역시 아이들이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들 체취가 정신이 팔릴 만큼 좋은 냄새이던가?

정엽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짙은 눈썹 한쪽을 설핏 밀어 올렸다. 그 순간 좋은 생각이 스친 연주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당신도 맡아 볼래요?”

“……내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긴 하지만, 냄새 한번 맡아 보는 게 무에 그리 어려운 일이랴.

기대로 가득 찬 아내의 얼굴을 확인한 정엽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연주를 원래대로 침상에 내려놓고는, 그녀가 그랬듯 침상 한쪽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보드라운 배냇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은 뒤, 가까이 있는 아들의 목덜미에 어색하게 얼굴을 묻고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폐부를 가득 채우는 공기에 처음 맡아 보는 냄새가 실려 왔다.

언젠가 연주에게서 맡아 보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주 먼 옛날 어머니의 품에서 맡아 보았던 것 같기도 하고.

막연하지만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봄눈 녹듯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때요?”

연주가 나긋이 물었다.

잠시 아득한 감각에 사로잡혔던 정엽이 느리게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무슨 냄새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좋네.”

사실 좋다는 말로는 조금 부족했지만, 처음부터 정엽에게 많은 걸 바랄 수는 없었다. 말갛게 미소 지은 연주가 이번엔 다른 제안을 건넸다.

“그럼, 이번에는 아이들 손도 한번 잡아 볼래요?”

“손……?”

정엽은 당황한 표정으로 연주와 아이들을 번갈아 보았다. 깊이 고민하던 그는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이들이 다치지 않을까? 그건 안 좋을 것 같아.”

“다칠 일이 뭐가 있어요.”

“그야 이렇게나 작고 연약한걸. 잘못 잡았다가 부서지면 어떡해.”

연주는 정엽의 대답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그의 진심이 바다보다 깊고 넓게 느껴졌다.

‘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네.’

정엽이 아이들을 미워하는 것은 아닐까. 선황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날들이 떠오르자 갑자기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별안간 연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놀란 정엽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래? 속상해서 그래?”

정엽은 연주가 대체 무엇 때문에 눈물을 보이는지 모르면서도 열심히 그녀를 다독였다.

간신히 눈물을 삼킨 연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오늘따라 내가 당신에게 미안한 게 많아서요.”

“네가 왜 미안해. 그런 생각하지 마.”

정엽은 연주의 젖은 눈꼬리를 묵묵히 쓸었다. 얼마간 감정을 추스른 연주가 입을 열었다.

“아이들 손을 잡아 보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요.”

“……도와준다고?”

“손 이리 줘 봐요.”

갑자기 손을 내밀라니. 조금 긴장한 정엽이 연주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정엽의 검지를 나비잠을 자느라 펼쳐진 아들의 손바닥 위에 가볍게 걸쳐 놓았다. 황자는 정엽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고사리 같은 손끝을 오므려 꽉 움켜쥐었다.

“……!”

마치 잠결에도 제가 아비임을 알고 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아들에게 손가락을 잡힌 정엽이 얼떨떨한 얼굴로 연주를 돌아보았다.

연주는 빙그레 웃으며 공주를 향해 눈짓했다. 이번에는 혼자서 해 보라는 뜻이었다.

‘딸은 아들보다 더 연약할 테니 조심해야겠지.’

고심하던 정엽이 새끼손가락을 내어 공주의 손바닥 위에 올려 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잠에서 깬 공주가 정엽의 새끼손가락을 꽉 쥐고 배시시 눈웃음을 쳤다.

“지금, 나 보고 웃는 거 맞지?”

놀란 정엽이 공주에게 내어 주었던 손가락을 숨죽여 거둬들였다. 아비를 놓친 게 서러운지, 어린 공주가 앵두 같은 입술을 삐죽이며 울먹거렸다.

“어떡하지? 울 것 같은데…….”

“뭐 해요? 울기 전에 얼른 당신이 안아 줘요.”

“안으라고?”

정엽이 난처한 듯 인상을 썼다. 연주는 여태 아들에게 잡혀 있는 손가락을 빼낸 뒤, 공주를 안아 넘겼다.

그러고는 정엽이 안정적으로 아이를 안아 볼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주기까지 했다.

엉겁결에 딸을 안은 정엽은 불편하지도 않은지 금세 방긋방긋 미소 짓는 공주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는 딸아이에게서 홀린 듯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정엽이 고백하듯 말했다.

“……아무래도 아이들 이름자를 다시 골라야 할까 봐.”

“……이름을, 지어 뒀어요?”

“어제까지 밤새 고민하다가 마음에 드는 글자를 하나씩 골라 놨거든. 네 이름자인 ‘연(連)’을 따서 지어 주려고.”

“무슨 글자를 골랐는데요?”

“황자는 강(康), 공주는 온(穩). 합쳐서 연강, 연온. 그런데, 이렇게 예쁜 아이에게 어울리는 글자가 세상에 존재할지 모르겠네.”

정엽은 인생 최대의 난제라도 만난 사람처럼 심각하게 미간을 좁혔다. 연주가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연강, 연온. 나는 좋은데요? 우리 아이들에게도 잘 어울리고.”

“……정말?”

“네, 분명 아이들도 무척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그렇담 다행이고.”

연주의 대답을 듣고야 겨우 안심한 정엽이 입시울을 늘렸다. 그는 제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딸아이를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연온, 너도 네 이름이 마음에 드느냐?”

“꺄아!”

아직 말귀조차 트이지 않았을 텐데도 공주는 다 알아들은 것처럼 열렬히 화답했다.

제게 반응해 주는 아이가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하염없이 딸아이의 얼굴을 응시하던 정엽이 공주를 더 안고 있다간 실수를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얼른 내려놓았다.

든든한 온기가 사라진 게 싫은지 공주가 다시 칭얼대기 시작했다.

“우리 공주는 울보네. 울보.”

연주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공주를 토닥였다. 다정한 모녀를 지켜보던 정엽이 생각 많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혼자서는 아이도 잘 안아 주지 못하잖아.”

금세 공주를 달랜 연주가 정엽의 무릎 위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아직도 긴장으로 굳어 있는 정엽의 팔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당신은 뭐든 빨리 배우는 사람이잖아요. 아이 안는 자세쯤은 금세 익숙해질 거예요. 그렇게 하루에 한 번씩 아이를 안고 사랑한다고 말하다 보면, 누가 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미 좋은 아버지가 되어 있을걸요?”

“정말…… 그럴까?”

“물론이죠.”

확신에 찬 어조에 정엽이 아주 조금 용기를 얻었다.

일평생 선황에게 받은 상처와 응어리를 단번에 잊을 순 없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털고 일어날 수 있으리란 희망이 솟았다.

그때가 되면 진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연주가 아니었더라면 과연 이런 삶이 가능했을까? 정엽은 스스럼없이 진심을 전했다.

“고마워.”

때로는 사랑한다는 말보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가 더 어렵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간 숱하게 들어온 사랑한다는 말보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의 울림이 더 컸다. 감동한 연주가 정엽의 목을 끌어안으며 일부러 어깃장을 놓았다.

“그걸로는 부족해요.”

연주가 새초롬하게 눈을 흘겼다. 너털웃음 터뜨린 정엽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소리 나게 입 맞추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수줍게 돌아온 대답에 심장이 뜨거워졌다. 매 순간 어여쁜 아내를 열렬히 바라보던 정엽이 고개를 기울여 더 큰 애정을 갈망하듯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이내 황홀한 감각에 취한 연인은 아주 깊은 늪처럼 마르지 않는 사랑 속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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