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정엽은 고통에 찬 연주의 비명이 들릴 때마다 침전을 박차고 들어가고픈 충동을 느꼈다. 불덩이 같은 감정을 억누를 때마다 앞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정말이지…….”
살면서 내가 이렇게 작고 초라하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숨 막히는 갑갑함에 가슴이 체한 것처럼 묵직하고 불편했다. 왜 출산의 고통은 아내 혼자만의 몫이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전 조회 중 소식을 듣고 정엽과 달려온 채신이 다섯 시진 넘도록 앉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주군을 진정시켰다.
“폐하, 좀 앉아서 쉬십시오.”
“그게 지금 오라비란 작자가 할 소리냐?!”
하지만 돌아오는 정엽의 반응은 험악하기만 했다.
‘지금 방 안에서 제 누이가 생사를 오가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서 쉬라니?’
기가 차 몇 마디 더 덧붙이려던 정엽이 함께 있던 태후와 시양공주를 뒤늦게 의식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위협적인 목소리에 놀란 공주는 태후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일 따름이었다.
“후우…….”
정엽이 갑갑한 한숨을 삼키곤 태후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어마마마. 시양, 너도 많이 놀랐겠구나.”
그러나 태후는 연주를 향한 정엽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잘 알았다. 그녀는 정엽을 나무라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황상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해요.”
“맞아요. 오라버니.”
채신은 태후와 시양의 위로에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정엽을 지켜보다가 곁으로 다가섰다.
“어머니께서 황후마마 곁에 계십니다. 하니 너무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자의 말이 맞습니다. 아까 편전을 다녀간 조산부(助産婦)도 황후의 해산이 머지않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만하면 순조로운 편입니다. 이 어미만 해도 시양을 낳을 때는 꼬박 하루가 걸렸고, 정영을 낳을 때는 하루 반이 걸렸으니까요.”
하지만 태후의 위로는 정엽에게 조금의 위안도 되지 못했다. 태후의 말대로라면 연주가 앞으로 여섯 시진도 모자라 열두 시진이나 더 진통을 겪을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가설에 정엽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그 순간, 다시 침전 쪽에서 연주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아아악-!”
천지가 뒤집히는 것처럼 눈앞이 아찔해진 정엽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제가 이 정도면 직접 아이를 낳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점점 잦아지는 아내의 비명을 듣다 못한 정엽이 머리를 감싸 쥔 채 이를 악물었다.
불안이 극에 달한 듯한 오라비를 지켜보던 시양이 의자에서 내려와 단풍잎을 닮은 손으로 정엽의 어깨를 토닥였다.
“오라버니, 황후마마께서는 괜찮으실 거예요.”
영롱한 목소리에 반응한 정엽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티 없이 맑은 눈을 응시했다.
“산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황후마마께선 저와 웃으시며 악공의 연주를 들었어요.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작게 속삭인 공주가 정엽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이립을 바라보는 나이에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누이의 위로를 받고 있다니.
민망해진 정엽이 묵묵히 누이의 작은 등을 두드리며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 말해 주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정말요?”
“그래.”
정엽의 대답에 그제야 안도한 시양이 조잘조잘 떠들었다.
“황후마마께선 착한 분이시니까 분명 하늘이 복을 내려 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구나.”
“아기도 아주 예쁠 거고요!”
“그래.”
기대에 찬 시양의 목소리에 비로소 웃음을 되찾은 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궁녀들이 부산스레 산실을 오가기 시작했다.
점점 날카로워지는 연주의 비명 소리와 정신을 차리고 힘을 내라는 산파들의 아우성에 모두의 긴장이 높아졌다.
고대하던 순간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한 사람들이 일제히 침전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침묵과 소란이 교차하는 긴박감 끝에, 마침내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상흠궁을 뒤흔들었다.
“으애앵!”
드디어!
정엽이 번뜩 눈을 빛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편전에 그림자처럼 늘어서 있던 궁인들이 경하 인사를 올리려 일제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연주의 배 속에 자리 잡은 생명은 하나가 아닌 둘. 다시 숨 가쁜 신음이 이어지자 석상처럼 그 자리에 멈춰선 정엽이 힘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야말로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본능적으로 멈춘 정엽의 호흡이 바닥을 보일 즈음,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응애! 응애-!”
이윽고 편전의 문이 활짝 열렸다. 침전에서 부리나케 달려 나온 소렴자가 모두의 앞에 넙죽 엎드리며 외쳤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쌍생이옵니다! 황후마마께서 건강한 황자마마와 공주마마를 낳으셨습니다!”
그제야 참았던 숨을 들이마신 정엽이 충혈된 눈으로 편전을 박차고 나갔다.
쏜살같이 침전으로 달려간 그는 태감들이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제 손으로 합문을 열어젖히고 산실 안으로 들어갔다.
우아한 가구도, 휘황찬란한 장식품도 모두 그대로인데, 전과 달리 방 안에선 진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폐하.”
“황제 폐하를 뵙습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정엽은 그를 향해 예를 바치는 태의와 산파들, 궁인들을 모두 무시한 채 다급히 연주에게로 향했다.
성큼성큼 유리 병풍을 돌아서자, 갓 태어난 아이들을 약물로 씻기느라 여념이 없던 궁인들과 평해왕비가 정엽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 예를 갖췄다.
하지만 정엽의 눈엔 붉게 물든 침상에 죽은 듯 늘어져 있는 연주의 모습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연주, 연주야……?”
아이들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은 정엽이 침상 머리맡에 앉았다. 그는 연주의 힘없는 작은 손을 끌어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연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정신을 잃은 건지, 아니면 뭐가 잘못된 건지. 속이 탄 정엽은 땀범벅인 아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연주야, 연주야……!”
정엽의 애절한 음성이 점차 높아졌다. 그의 목소리에 묻어난 두려움이 잠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떠돌던 연주를 깨웠다.
“……정엽.”
가늘게 눈을 뜬 연주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일순 긴장이 풀린 정엽이 왈칵 솟구치는 눈물을 삼키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는 아내의 뺨이며 이마에 얼굴을 맞댄 채 정신없이 속삭였다.
“아무것도 못 해 줘서 미안해. 고생했어. 정말 고생했어.”
연주는 차고 넘치는 정엽의 애정을 만끽하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느릿느릿 손을 들어 촉촉하게 빛나는 남편의 눈가를 매만졌다.
정엽은 그런 아내의 손을 그러쥐고 보드라운 손바닥에 입 맞췄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궁녀들은 저마다 고개를 돌려 눈꼬리를 훔쳤다.
그렇게 감격스러운 해후의 순간이 지나, 한층 정신이 맑아진 연주가 정엽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만나 봤어요?”
“아, 그건…….”
당황한 정엽이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는 아내를 이렇게 고생시킨 아이들이 궁금하기보다 원망스럽기만 했다.
“나는 아이들보다 네가 더 중요해.”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아이들도 당신을 보고 싶어 할 테니 어서 인사 나누세요.”
연주의 제안에 아까부터 정엽의 등 뒤에서 유모와 아이들을 나눠 안고 있던 평해왕비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아기씨들은 여기 계십니다.”
정엽과 연주 앞으로 유모와 함께 품 안의 아기를 보인 평해왕비가 말을 이었다.
“제가 안고 있는 아기씨가 바로 황자마마시고, 유모가 안고 있는 아기씨가 공주마마십니다.”
잠시 망설이던 정엽이 강보에 싸인 아기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오종종한 사지를 힘차게 바르작대던 아이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느라 고단했는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조막만 한 얼굴에선 연주가 겹쳐 보이기도 하고, 그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이 애들이 내 아이…….’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정엽이 아이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둬들였다. 막상 아이들을 마주하니 기쁘고 행복하기보단 신기하고 놀랍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분명 내 아이인데 내 아이 같지 않은 느낌도 들었다.
이게 맞는 걸까?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확신을 갖지 못한 정엽이 계속 머뭇거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세 사람의 상봉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연주가 웃었다.
“아빠가 엄마인 저보다 편하고 좋은가 봐요. 만나자마자 하품부터 하네요.”
“그럼요. 아기들도 저를 좋아하는 사람은 귀신같이 안답니다. 참, 황자마마께서 조금 더 일찍 태어나셔서 간발의 차로 공주마마의 오라버니가 되셨어요.”
“그렇습니까.”
“예, 폐하. 하니 황자마마부터 안아 보십시오.”
“아, 황자부터…….”
평해왕비가 황자를 넘기려 몸을 숙이자, 무심코 팔을 내밀려던 정엽이 멈칫했다.
지금껏 아기를 제대로 안아 본 적도 없을뿐더러, 살아 있는 아기라면 더더욱 안아 본 적이 없는 그였다.
한데 아직 목조차 가누지 못하는 연약한 생명을 안아 보라니. 더럭 겁이 난 정엽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종일 긴장한 탓에 실수할 것 같으니 다음에 안아 보겠습니다.”
“그래도…….”
실수라니. 말도 안 되는 핑계에 당황한 연주가 반쯤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눈치 빠른 평해왕비는 정엽이 무안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기야. 그러실 만도 하지요. 마침 두 분 마마께서도 배가 고파 보이시니 젖부터 물려야겠습니다.”
평해왕비가 유모의 품에 황자를 넘겼다. 유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려 하자, 내내 기운 없어 보이던 연주가 단호히 명령했다.
“아이들을 이리 주게.”
“예? 하지만 마마…….”
“아이들은 내가 직접 젖을 물려 키울 걸세.”
상황을 지켜보던 정엽이 아내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아이들을 유모에게 맡기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하지만 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아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서. 아이들을 이리 데려오게.”
“아니, 데려가라.”
한 사람은 아이를 달라고 하고, 또 한 사람은 데려가라고 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유모가 평해왕비의 눈짓을 받고 물러났다.
정엽이 타이르듯 말했다.
“아이는 유모가 잘 돌봐 줄 거야. 일단 네 몸부터 추스르자.”
“하지만…….”
“며칠만이라도.”
서운한 표정을 짓던 연주는 어쩐지 화가 난 듯 보이는 정엽의 반응에 마지못해 몸을 누였다.
정엽은 연주의 이마를 묵묵히 쓸어 주며 그녀에게서 오랫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