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황궁 후원 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에 도착했다. 그들은 곧 호수 서편에 병풍처럼 조성된 야트막한 석가산에 올랐다.
석가산 정상에는 사방이 트여 주변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아담한 정자가 있었다.
“와아……!”
연주는 자우정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감탄을 터뜨렸다. 하늘과 물 위에 나란히 뜬 두 개의 보름달 덕에 온 세상이 대낮처럼 환했다.
연주는 이 절경을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겁 없이 난간 쪽으로 다가섰다. 일순 가슴이 철렁한 정엽이 그녀를 곧장 평상에 이끌어 앉히고 타박을 늘어놓았다.
“매달 보는 보름달인데. 그렇게 좋아?”
혹여 연주가 한기를 느끼지는 않을까.
정엽은 비단 외투를 벗어 연주에게 둘러 주곤, 흘러내리지 않도록 그녀의 목에 끈을 동여맸다.
나날이 발전하는 정엽의 배려에 한층 볼우물이 깊어진 연주가 배시시 눈웃음치며 애교스럽게 대꾸했다.
“다달이 만나는 보름달이어도 의미는 제각각이죠. 중추절에 연랑과 자우정에서 보름달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잖아요?”
함께 부부로 늙어 가다 보면 꼭 오늘이 아니라도 자주 보게 될 풍경일 텐데.
정엽은 사소한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히 간직하려는 아내의 마음 씀씀이가 따뜻해 엷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별거 아닌 것 같던 이 순간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마음이 푸근해진 정엽은 아내 곁에 나란히 앉아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을 똑같이 눈에 담았다.
잔잔한 수면에 머무는 달도 운치 있지만, 달빛 아래 빛나는 구중궁궐의 유리 기와가 파도치는 밤바다를 연상시켰다.
‘예전엔 분명 밤하늘을 홀로 비추는 달이 고독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고요하기만 할 뿐 적막하지는 않고, 빈틈없이 차오른 달덩이가 흐뭇하기까지 했다.
‘아마 네 덕분이겠지?’
정엽은 어느새 제 어깨에 기대어 달빛을 감상하는 연주의 얼굴을 슬쩍 곁눈질했다.
별처럼 빛나는 아내의 눈동자가 아름답고, 맞닿은 몸 사이로 오가는 묵직한 온기가 반가웠다. 특별히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고 충만한 이 기분이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달 한번 밝다.”
정엽이 행복에 겨워 한숨처럼 읊조렸다.
짧은 감상에 묻어난 마음을 읽은 연주가 정엽의 생각에 동의하듯 잔잔한 미소와 함께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엽은 따스한 눈길에 화답하듯 아내의 오뚝한 코끝에 입을 맞추었다.
받았으니 돌려주고, 돌려받았으니 다시 내어주고.
그렇게 한참 애정을 주고받고 있으려니 명을 받고 떠났던 양해가 돌아와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분부하신 것을 가져왔사옵니다.”
정엽의 품속에 파묻혀 있던 연주가 간신히 몸을 빼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연주가 평소 즐겨 먹던 향주의 과일뿐 아니라, 각양각색의 이국 과일이 담긴 은쟁반을 받쳐 든 궁인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이리 내려놓아라.”
정엽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궁인들이 평상 위에 다과상을 펼치고 은쟁반을 내려놓았다.
“저녁도 부실하게 먹었을 테니 당기는 대로 마음껏 먹어.”
정엽이 과일 더미를 연주 쪽으로 밀었다. 낯선 생김새와 진한 단내에 호기심이 동한 연주가 물었다.
“이게 다 웬 거예요?”
“오늘 하례 때 외국 사절이 바친 공물 중 일부야.”
과일은 쉽게 부패하고 관리가 어려워 공물에 적합하지 않은 품목이었다. 되묻는 연주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서렸다.
“과일을, 공물로요……?”
“평해왕부 세자가 하나뿐인 누이를 위해 매번 향주에서 과일을 공수하니 사절마다 과일을 빼놓지 않고 진상하더군.”
정엽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과일과 정엽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연주가 이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엽은 비와 구름을 부리는 용손이자 북방의 골칫거리였던 백융을 쓸어버린 불사왕.
하지만 불사왕의 명성은 둘째 치더라도, 그가 황위에 오른 후 대화국 위상이 전보다 드높아진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었다.
‘말인즉 우리 대화국에 잘 보이기 위해 각국의 사절들이 애를 많이 썼다는 거네.’
남편의 유능함에 새삼 뿌듯해진 연주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과일을 먹으라 했더니 제 얼굴만 쳐다보는 아내 때문에 어리둥절하던 정엽이 놀리듯 말했다.
“왜 그러고 있어? 과일보다 내가 더 좋아?”
“그럴 리가요.”
하여튼 틈을 주면 안 된다니까.
금세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정엽에게 새침하게 대꾸한 연주가 푸짐히 쌓인 과일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접시 위엔 평소에도 즐겨 먹던 여지, 사과, 복숭아, 청포도, 대추야자부터, 황궁에서도 보기 드문 하미과, 산죽(山竹, 망고스틴)에 홍모단(紅毛丹, 람부탄), 백향과까지 고루 담겨 있었다.
개중엔 압도적으로 눈에 띄는 이상한 생김새의 과일도 있었다.
“한데 이건 뭐죠……? 먹을 수 있긴 한 거예요?”
거대한 솔방울을 닮은 몸통,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거친 껍질과 장미 같은 가시, 그리고 뾰족하고 억센 이파리까지.
단숨에 연주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것은 과일이라기보다 마치 흉포한 무기처럼 보였다.
“아, 그거?”
연주가 가리키는 것을 확인한 정엽이 곧장 문제의 과일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뒤로 물러나 있던 태감이 품에서 작은 칼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정엽이 능숙한 솜씨로 과일의 몸통을 가르자, 숨겨져 있던 황금빛 속살이 드러나며 새콤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과즙이 후드득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킨 연주가 눈을 빛내며 과일을 손질하는 정엽을 지켜보았다.
그는 눈 깜짝할 새 과일의 심지를 제거한 뒤, 과육과 껍질 사이로 칼날을 집어넣어 말끔하게 속을 오려 내고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자, 먹어 봐.”
정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주는 과일 조각을 집어 맛봤다.
씹는 맛이 좋은 적당히 단단한 과육에, 씹을수록 퍼지는 새콤달콤한 맛까지. 지금껏 여러 나라의 과일을 먹어 봤지만, 이는 경험해 본 적 없는 맛이었다.
“너무 맛있어요! 이게 뭐예요?”
연주의 열렬한 반응에 흡족해하던 정엽이 답했다.
“봉리(鳳梨, 파인애플)라고 하더군.”
“봉리? ‘봉황의 배’라고요……?”
“그래. 생김새는 좀 독특해도 이름만 보면 황후인 네게 무척 잘 어울리는 과일이지.”
낯설고도 심오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던 연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생김새가 어떻든 맛있기만 하면 그만이죠.”
“그건 그렇지.”
“당신도 어서 먹어 봐요. 이거 정말 맛있어요!”
연주는 봉리 한 조각을 손수 정엽의 입에 넣어 주고는, 냉큼 다른 조각을 집어 자신의 입에 넣었다.
그렇게 정엽을 챙겨 주며 한 조각, 두 조각 정신없이 먹다 보니 접시에 가득 쌓여 있던 썰어 놓은 과일이 금세 반이나 사라졌다.
“그렇게 좋아?”
근래 들어 가장 잘 먹는 연주를 기쁘게 지켜보던 정엽이 물었다.
연주는 과일을 먹느라 대답할 정신조차 없는지, 어린애처럼 해사한 얼굴로 끄덕였다.
생기로운 연주의 모습에 안도하면서도, 곧 다가올 해산만 생각하면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 같던 정엽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과일 말곤 제대로 먹는 것도 없고, 매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런데도 정말 좋아?”
정엽의 얼굴엔 어느새 옅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물음에 연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잠시 침묵하던 정엽이 말을 이었다.
“이제 두 달 뒤면 해산이잖아. 두려운 건 아닌가 해서.”
그제야 연주는 정엽이 내색하지 않아도 심중에 저만큼 많은 생각과 걱정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무엇이든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겁나긴 뭐가 겁나요? 나는 우리 아이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연주가 말갛게 웃으며 대답했다.
깊어지는 가을도, 다가올 겨울도 모조리 밀어내는 듯한 봄꽃 같은 미소에 정엽의 입매가 절로 깊어졌다.
그는 다과상을 밀어내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품에 안았다. 한참 연주의 체취를 들이마시던 정엽이 나직이 되물었다.
“진심이야?”
“그럼요.”
망설임 없이 응답한 연주가 슬며시 주변을 살피고는 정엽의 귓가에 속삭였다.
“실은 먼저 간 첫 아이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것 같아서 나는 매일매일 더 행복한걸요?”
연주가 그동안 금기나 다름없던 첫 아이의 존재를 언급하자, 사뭇 놀란 정엽이 먹먹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연주는 정엽을 달래듯 그의 너른 어깨를 다정히 토닥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다 잘될 거니까.”
“…….”
“그리고 이번엔 당신이 내 곁에 있을 거잖아요? 내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죠.”
정엽은 늘 자신을 믿고 의지해 주는 아내가 고마우면서도 든든해 그녀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연주가 예쁜 눈매를 곱게 접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지켜 줄 거죠?”
정엽이 확언했다.
“물론. 그러니까 내 곁에서 너무 멀어지는 건 안 돼. 약속해.”
“약속할게요.”
그래, 소중한 사랑의 결실을 품에 안는 일이 어떻게 쉽고 간단할 수 있으랴.
먼 길을 돌아 연주와 다시 부부로 맺어지며 정엽이 배운 사실은, 때로는 고통이 더 큰 행복을 맞이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내자평안, 해로동혈.
정엽은 오늘 신에게 닿도록 하늘 높이 띄워 보낸 소망을 곱씹으며 연주를 보듬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한낱 사람이 헤아리기엔 심오하기만 했다.
* * *
“아악-!”
두 달 뒤.
정엽은 초조한 모습으로 상흠궁 편전을 서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