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아침 일찍 상흠궁으로 건너간 정엽은 종일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정엽은 연주가 아기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옷과 신발, 베개, 담요 같은 물건을 구경한 다음 아내가 요즘 무얼 먹고 마시는지, 낮잠은 얼마나 자는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등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그간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을 채우듯 서로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부부는 다음날 한 이불 속에서 중추절 아침을 맞았다.
“깼어?”
정엽은 몽롱하게 깜빡이는 연주의 눈꺼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녀는 잠투정하는 아이처럼 눈을 비비고는 느릿느릿 정엽을 끌어안았다. 다행히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았지만, 밤새 태아의 무게에 짓눌려 고생한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피곤해 보였다.
“좀 더 자고 저녁에 단봉문으로 나와.”
정엽은 흐트러진 연주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나직이 속삭였다.
“……당신은요?”
“나는 백관과 사신들의 하례를 받아야지.”
“아…….”
연주는 깜빡 잊고 있던 사실을 되새기며 이마를 짚었다.
본래 황후는 황제와 마찬가지로 중추절 아침마다 내명부 하례를 받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그 관례는 연주에게만은 예외였다. 정엽이 한사코 후궁 들이기를 거부한 탓에 내궁에는 연주와 태후, 몇 명의 선황 후궁과 아직 출가하지 않은 대공주들만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후께선 중추절 인사를 올 필요 없다고 하셨지?”
“네. 그래도 태후마마께 올릴 선물은 마련해 두었어요.”
“잘했네.”
정엽이 느른하게 웃으며 연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정신이 맑아진 연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왜 일어나?”
품에서 온기가 사라지자 정엽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연주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당신, 면복으로 갈아입어야 하잖아요.”
“됐어. 그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히…….”
“당신이 떠나 있는 동안 꼭 하고 싶던 일 중 하나였어요. 그러니 사양하지 말아요.”
말을 마친 연주는 먼저 이불을 걷고 침상 아래로 내려섰다. 아내의 고집에 별수 없이 따라 나온 정엽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침실 안쪽을 가리는 유리 병풍을 돌아 나오자, 황제 부부의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 중이던 궁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리 다오.”
물이 담긴 대야를 든 궁녀를 우아한 손짓으로 부른 연주가 능숙하게 물수건을 짜 정엽에게 건넸다. 물수건을 건네받은 정엽은 얼굴을 닦은 뒤 양해에게 넘겼다.
이어서 미지근한 찻물을 건네준 연주는 정엽이 양치를 하는 동안 타구를 받아 그가 양칫물을 뱉을 수 있도록 도왔다.
아이를 가진 사람에게 시중을 받다니. 어쩐지 양심이라곤 없는 파렴치한이 된 것 같아 민망해진 정엽이 서둘러 양칫물을 뱉었다.
연주는 마른 비단 수건으로 그의 입가를 닦아 주며 웃었다.
“저는 괜찮아요. 아기가 태어나면 유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돌볼 거거든요. 연습이라고 생각할게요.”
대놓고 갓난쟁이 취급이로군.
정엽은 연주의 농담에 실없이 웃었다. 그사이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태감이 휘황찬란한 십이장복과 면류관을 받쳐 든 채 무릎을 꿇었다.
연주는 정엽의 어깨에 십이장복을 걸쳐 주기 위해 그의 등 뒤로 향하려 했다.
이를 본 정엽이 연주가 움직일 필요 없도록 먼저 돌아섰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남편의 소소한 배려에 절로 옅은 미소가 맺혔다.
정엽은 넓은 소매에 휘적휘적 팔을 꿴 뒤 다시 연주와 마주 섰다. 그는 부지런히 제 옷깃을 여며 주는 연주의 손놀림을 감상했다.
그러곤 이내 연주가 면류관을 들어 올리자, 그녀가 편히 면류관 씌울 수 있도록 냉큼 허리를 숙였다.
제왕께서 허리를 숙이시다니!
정엽의 행동에 깜짝 놀란 궁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연주를 향해 엎드렸다.
‘이건 나를 위한 배려일까, 아니면 다시는 시중을 들지 못하게 하려는 술수일까?’
연주는 뭐가 그리 좋은지 빙글빙글 웃는 정엽이 얄미워 곱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당장 정엽의 도움 없이 그녀가 자신보다 큰 그에게 면류관을 씌우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이긴 했다.
예전 같으면 까치발로 해결될 일이지만, 지금은 몸이 너무 무거워 발끝을 세우기는커녕 오래 서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쳤기 때문이다.
연주는 결국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정엽에게 면류관을 씌운 뒤, 그의 턱 밑에 정갈히 매듭을 지었다.
정엽은 뾰로통한 아내가 귀여워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고맙소. 황후.”
눈 깜짝할 새 위풍당당한 제왕으로 변신한 정엽이 아내의 손등을 당겨 입을 맞췄다.
그는 아직도 바닥과 한 몸이 되어 있는 궁인들을 확인한 뒤, 연주에게 바짝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저녁에 봐. 내 사랑.”
뜻밖의 다정한 인사에 연주의 볼우물이 깊게 파였다. 첫사랑에게 막 고백을 받은 소녀처럼 가슴이 마구 콩닥거렸다.
주변의 눈치를 살핀 연주는 화답을 기다리는 정엽의 뺨에 재빨리 입 맞추곤 가볍게 무릎을 굽혀 예를 갖췄다.
“황제 폐하를 전송하옵니다.”
냉큼 연주를 일으켜 세워 준 정엽이 기분 좋게 상흠궁을 나섰다.
* * *
아침부터 정신없이 정엽을 떠나보내고 단장을 마친 연주는 오후 나절 상흠궁을 찾아온 태후와 담소를 나누다 해가 저물자 궁전을 나섰다.
“가마는 흔들려서 싫다. 마차를 준비하거라.”
가마에 오르기를 꺼리는 연주를 배려해 일부러 마차를 준비한 태후는 며느리와 나란히 단봉문으로 향했다.
미리 나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정엽이 태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마마마께서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 써 주시니 소자가 걱정을 덜었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태후는 정엽의 어깨를 정답게 토닥였다. 그러곤 허 상궁과 함께 먼저 문루(門樓)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금란에게서 연주의 손을 건네받은 정엽이 아내에게 당부했다.
“아직 시간은 넉넉해. 그러니 힘들면 언제든지 얘기해.”
정엽은 연주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그는 연주가 숨 가빠하진 않는지, 행여 휘청이지는 않는지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안 되겠다. 조금 천천히 올라가야겠어.”
정엽은 연주가 조금이라도 버거워하는 기색을 비치면 걸음을 멈추고 쉬어 가라며 고집을 부렸다.
난처해진 연주가 숨죽여 속삭였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단봉문 아래서 백성들이 기다리잖아요.”
“난 네가 제일 중요해.”
“정말 괜찮다니까요.”
정엽과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던 연주가 결국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연주 곁에서 애면글면하는 정엽을 단봉문 정상에서 지켜보던 태후가 흐뭇하게 웃었다.
“저토록 살가운 황상은 난생처음 보는구나. 허 상궁, 너는 어떠하냐?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지 않으냐?”
“예, 태후마마. 소인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태후가 한 쌍의 원앙 같은 부부를 허 상궁과 지켜보며 담소를 나누는 동안, 연주와 정엽이 정상에 도착했다.
연주의 손을 고쳐 잡은 정엽이 물었다.
“준비됐어?”
“네.”
마침내 십여 장(丈) 까마득한 높이의 문루에 태후와 황제 부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궁 앞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소리 높여 환호했다.
“황제 만세!”
“태후 천세!”
“황후 천세!”
백성들의 인사가 드넓은 광장을 가득 채우며 돌림 노래처럼 이어졌다. 정엽은 들뜬 백성들을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좌중이 일제히 고요해졌다. 그림자처럼 정엽의 뒤를 따르던 양해가 기다렸다는 듯 세필과 대나무를 쪼개 만든 죽편(竹片)을 건넸다.
세필 끝을 먹으로 적신 정엽이 대나무 조각 위에 거침없이 소원을 적어 내려갔다. 그러곤 마음에 드느냐 묻듯 연주의 눈앞에 슬쩍 죽편을 내밀어 보였다.
[내자평안(內子平安), 해로동혈(偕老同穴), 국태민안(國泰民安).]
연주는 정엽이 적은 글자들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나라와 백성을 향한 기원에 앞서 아내의 평안을 비는 기도와 사랑의 맹세가 선명했다.
게다가 아내를 뜻하는 단어 ‘내자’는 글자를 따로 떼어 놓으면 태중의 아이들을 뜻하기도 하니 그야말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내용이라 할만 했다.
연주는 화사하게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의 확인을 받은 정엽은 양해가 내민 거대한 홍색 풍등 아래에 죽편을 동여매고 풍등의 심지에 불을 댕겼다.
불꽃의 열기로 풍등이 충분히 부풀어 오르자, 정엽이 연주와 풍등을 한쪽씩 나눠 잡고 어둑한 하늘 위로 띄워 보냈다.
황제 부부의 소원을 실은 풍등이 두둥실 날아오르자, 백성들 역시 미리 준비해 온 풍등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수만 개의 풍등이 앞다투어 날아올랐다. 수도 조양성 곳곳에서 색색의 풍등이 불티처럼 반짝였다.
“곱네요.”
오늘 이 순간을 함께한 모두의 소원이 이뤄지기를 속으로 간절히 빈 연주가 촉촉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정엽은 연주의 눈가를 손끝으로 가볍게 훑어 주고는 그녀의 어깨를 한쪽 팔로 감싸 안고 가볍게 토닥였다.
“내년에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하자.”
“네. 좋아요.”
근심이라곤 없이 활짝 웃어 보인 연주는 어둠을 밝히는 따뜻한 불빛을 정엽과 오랫동안 감상했다.
* * *
단봉문에서 내려온 정엽은 연주를 곧장 상흠궁으로 데리고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최근 오가는 곳이라곤 상흠궁 내실과 후원이 전부인 연주는 이대로 처소로 돌아가기엔 아쉽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달도 밝고, 가을바람도 청량하니 자우정(慈雨亭)으로 달구경 가요.”
“피곤하지 않아?”
“당신과 같이 있는데 피곤하긴요.”
정엽의 얼굴에는 이미 근심이 한가득하였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연주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활기차 보이는 연주의 모습에 안도한 정엽이 주변을 살폈다. 눈치 빠른 양해가 두 사람 앞으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
“찾아계시옵니까.”
“그것들을 자우정으로 가져오너라.”
“예, 폐하.”
대체 ‘그것들’이 뭐지?
연주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자 양해가 소매 사이로 웃는 얼굴을 감춘 채 궁인들을 이끌고 총총히 사라졌다.
‘가 보면 알겠지. 뭐.’
누구 하나 속 시원히 알려 주지 않는 걸 보면 질문해 봐야 소용없을 게 뻔했다. ‘그것들’에 대한 의문을 덮어 둔 연주는 가까워지는 경쾌한 바퀴 소리와 말 울음소리에 정엽과 다정히 팔짱을 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