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정엽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산처럼 부른 연주의 배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손바닥 아래서 묵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
생소한 감각에 흠칫 놀란 정엽이 연주의 아랫배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나 생생하기 그지없던 새 생명의 파동은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정말 둘이 맞아?”
배가 이만큼 부른 걸 보면 분명 아이가 있는 건 맞는데. 되묻는 정엽의 얼굴이 여전히 얼떨떨해 보였다.
“네, 정말 둘이 맞다니까요.”
“정말?”
“그래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심각하게 인상까지 쓰는 정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연주가 나직이 속삭였다.
“아이들도 당신이 보고 싶었나 봐요.”
“……나를?”
“석 달 만에 만나는 아버지잖아요.”
연주는 주름진 정엽의 미간을 엄지로 부드럽게 눌러 펴 주고는 곱게 웃었다. 정엽은 그런 아내를 따라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버지’라는 단어에 묘하게 가슴이 뭉클했다. 하지만 뒤이어 밀려드는 건 자책과 서운함이었다.
“이런 소식은 빨리 알려 줬어야지. 내가 매일 전서구를 보냈잖아. 아이가 쌍생이란 사실을 왜 이제야 말해 주는 거야?”
정엽은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연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어쩐지 앉아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아내가 편히 기댈 수 있도록 그녀의 등을 받쳐 주었다.
남편의 너른 가슴에 쏙 안긴 연주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열흘 거리를 하루 만에 달려올까 봐 그랬죠. 또 아랫사람들을 혹사하면 어떡해요.”
“뭐……?”
“나도 당신이 떠난 후에야 알았어요. 호 태의도 한동안 반신반의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쌍생이 흔하지는 않으니까요.”
연주는 단단히 토라진 듯 보이는 남편을 온화하게 달랬다. 정엽의 질문이 계속됐다.
“그럼 아까는 왜 호 태의가 곧장 사실을 고하지 못했지?”
“내가 그렇게 부탁했어요. 해산하기 전까진 다른 사람들이 내가 쌍생을 잉태했다는 걸 모르게 해 달라고요.”
“어째서?”
“으음……. 너무 기쁜 일이니까. 그만큼 더 조심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축하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태어난 뒤에 받아도 늦지 않고요.”
신중하게 말을 고른 연주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정엽은 아내가 아이 문제에 있어서 이토록 신중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또 아이가 잘못될까 봐 혼자 걱정한 거로군.’
아이 하나를 낳는 것만 해도 여인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러니 아이 둘을 열 달 동안 무사히 품고 낳는 건 얼마나 어렵겠는가?
흔치 않은 일이니만큼 첫 회임 때와는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어쩌면 예전과 같은 상황을 또다시 맞이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과거의 비극은 수도와 멀리 떨어진 한수에서 벌어졌던 일이라 정엽이 직접 통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황제 부부의 행복과 슬픔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명운과 연관 지어져 불필요하게 확대되기 마련이었다.
‘혼자서 아이를 품는 일만 해도 힘겨웠을 텐데, 근심까지 짊어지고 있었다니…….’
정엽은 홀로 상흠궁을 지킨 연주가 안쓰러워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카락 위에 턱을 괴었다.
“그래. 네 말이 옳아.”
“이제 서운한 건 다 풀린 거죠?”
“응.”
끝내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어 낸 연주가 꼼지락꼼지락 몸을 돌려 정엽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의 옷깃에선 황궁으로 달려오는 동안 묻은 바람 냄새가 풍겼다.
연주는 그 비릿한 내음에서 이번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제게 돌아온 정엽의 마음을 읽었다.
“약속을 지켜 줘서 고마워요.”
정엽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반드시 돌아오겠노라 약속하고 떠났었다.
그리웠던 체취를 한껏 들이마신 연주가 반짝 고개를 젖혀 환히 웃어 보였다.
정엽은 어여쁘게 달아오른 아내의 뺨에 가볍게 입 맞추고 나직이 속삭였다.
“나도. 잘 참고 기다려 줘서 고마워.”
* * *
황제가 수도로 돌아오자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하던 황궁에 한층 활기가 돌았다.
정엽은 아내와 오붓한 중추절을 보내기 위해 밀린 일을 밤낮없이 처리하는 한편, 하루에도 몇 번씩 상흠궁을 오갔다.
그사이 연주는 태후와 함께 다가올 명절 준비에 신경을 쏟았다.
하지만 명절 준비로 신경을 쓴 탓인지, 아니면 세상 임부들이 원래 다 그런 것인지.
연주가 아직도 입덧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 정엽은 일과를 마친 뒤 서재에 틀어박혀 낯선 서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주에게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찾기 위한 그의 노력은 도리어 쌍생의 잉태와 출산이 임부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막연히 짐작하던 일의 결과가 어쩌면 상상 이상으로 혹독할지도 모른다니.
정엽은 눈앞이 캄캄해져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렇게 먼동이 트고 날이 밝자, 낙심한 정엽의 곁을 지키던 양해가 방문객의 도착을 알렸다.
“왕세자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들어오라고 해라.”
이내 서재로 들어온 채신이 예를 갖췄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
정엽은 대꾸 없이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덮었다. 잠시 눈치를 보다 멋대로 몸을 일으킨 채신이 여상히 말을 이었다.
“태동성에서 활약하신 덕에 역대 제왕들의 골칫거리였던 토하(土河) 범람 문제도 해결하셨고, 황후마마와 약속하신 대로 중추절 전에 돌아오셨고. 또 내일이면 온 가족이 단란하게 모이는 대명절인데 왜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계십니까?”
“……내가 연주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
“짓……, 이라니요?”
간밤에 연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누이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채신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하룻밤 새 눈에 띄게 수척해진 정엽이 마른세수를 하곤 한탄했다.
“쌍생을 잉태하는 게 이렇게 위험한 일인지 몰랐다. 고작 입덧이 문제가 아니더구나. 아이가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나는 일도 허다하고, 그러다 산부와 아이가 잘못되기도 하고…….”
“…….”
“이럴 줄 알았으면…….”
“황제가 아니라 수도승이 될 걸 그러셨다고요?”
정엽의 이야기에 심각하게 귀를 기울이던 채신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며 실소했다. 자연히 정엽의 눈초리가 세모꼴로 변했다.
“웃음이 나와?”
“그럼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근심하며 울어야 합니까?”
“그건…….”
“이제 와 후회하신들 늦었습니다. 또 황후마마께서 잉태하신 생명은 두 분의 사랑으로 맺어진 결실이 아닙니까? 황후마마께서 지금 폐하께서 하신 말씀을 들으시면 아주 서운해하실 겁니다.”
“하아…….”
정엽은 지친 듯 고개를 젖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아무리 한숨을 내쉬어 봐도 심란함은 가시지 않았다.
채신이 슬쩍 미간을 구겼다.
“땅 꺼지겠습니다. 황후마마께서도 의연히 견디고 계신 데 폐하께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채신의 핀잔에도 묵묵히 천장의 황룡 조각을 응시하던 정엽이 입을 열었다.
“……연주가 쌍생을 회임했단 사실은 언제 안 거냐? 호 태의도 한동안 반신반의했다던데.”
“폐하께서 떠나신 뒤 한 달쯤 되었을 때 알았습니다.”
“연주가……, 기뻐하던가?”
“예, 제 눈엔 그래 보였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 힘들어하지는 않았고?”
“폐하께서 매일 전서구를 띄우시지 않았습니까. 비둘기 다리에 묶인 서신을 일일이 모으시며 무척 즐거워하셨습니다. 또 태후마마와 시양대공주, 태중의 아기씨들과 함께 계셨으니까요.”
괜한 걱정이었나……?
마음속 근심을 헤아리듯 느린 속도로 탁상을 두드리던 정엽이 대꾸했다.
“……다행이군.”
연주가 기쁘고 행복하다면야 당장은 만사형통이었다. 불안감은 여전하지만, 정엽은 채신의 조언을 따라 지금 연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돌아와서 보니 연주가 전보다 음식을 더 못 먹는 것 같더군. 예전엔 잠시나마 당기는 요리가 있어 보였는데 말이야. 근래엔 뭘 주로 먹었지?”
“과일을 자주 찾으신 줄로 압니다.”
“……과일?”
“예. 웬만한 요리들은 먹고 나면 속이 좋지 않다며 잘 드시지 않더군요. 그래서 풍 대인에게 연락해 향주에서 나는 과일을 물길로 운송 받아 황후마마께 올려 드렸습니다. 아무래도 당신 입으로 매번 과일만 찾기도 민망하실 듯하여…….”
“그랬군.”
고개를 끄덕인 정엽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하면 평해왕비께서는 언제쯤 수도에 도착할 예정이지?”
“어머니께선 이미 해광성에서 올라오셔서 세자부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예법에 따라 황후마마께서 회임 8개월이 넘으시면 길일에 맞춰 입궁하실 겁니다.”
“그때가 언제냐?”
“앞으로 스무날 뒤입니다.”
20일은 너무 길다. 그러나 예법 따지기를 좋아하는 노신들은 평해왕비가 예정보다 일찍 입궁하면 평해왕부의 권세가 지나치다며 시끄럽게 떠들 게 뻔했다.
‘안 되면 되게 만드는 수밖에.’
미간을 좁히던 정엽이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연주가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했을 거다. 흠천감에 길일을 새로 잡으라 명할 테니 하루라도 빨리 모녀지간의 회포를 푸시라고 해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채신이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다음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시간을 가늠하던 정엽이 상흠궁으로 이동하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앞으로 연주가 더 힘들어질 텐데, 나를 배려한답시고 괜찮은 척할까 봐 걱정이다. 나도 세심히 연주를 살피겠지만 부족함이 있을지도 몰라. 평해왕비는 물론이고 너도 자주 입궁해 연주를 잘 보살펴라. 이상한 낌새가 비치거든 즉시 내게 전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정말 상흠궁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어젯밤 연주와 있어 주지 못했으니 그녀가 눈을 떴을 때라도 곁을 지켜 줘야 했다.
정엽은 믿음직한 벗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주고는 급히 서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