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56화 (외전) (156/161)

외전 1화.

황후의 궁전, 상흠궁(常嬜宮).

“어머나! 부지런히도 뜨셨네요.”

호화로운 내실에 감탄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에도 연주의 손에 들린 비단 위에선 장수를 기원하는 상징물이 생생하게 어우러졌다.

뾰족뾰족 이어진 산봉우리 위에 해와 달.

산 아래로 흘러 나가는 개천과 물가 주변의 우거진 소나무와 대나무.

솔숲을 뛰노는 사슴 한 쌍과 정답게 부리를 비비며 춤을 추는 두루미 한 쌍.

바위틈에 자라난 불로초와 거북이…….

일 년 새 어엿한 상급 궁녀로 거듭난 금란이 이를 보며 연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빙그레 웃던 연주가 끌어안고 있던 수틀을 멀찍이 바깥쪽으로 뻗으며 물었다.

“이만하면 그럴싸하지?”

“그렇다마다요. 황후마마께서 손수 수놓으신 것인데요. 매일 수만 놓는 수방 궁녀들이 만든 것보다 훨씬 고와요!”

“네 눈에 차는 만큼 우리 아이들도 맘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

아이를 가진 지도 벌써 7개월.

연주는 보름달처럼 부푼 아랫배를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손길에 실린 온기를 느꼈는지, 내내 얌전하던 생명이 배 속에서 툭 발길질로 화답했다.

‘다행히 잘 자라고 있구나.’

황후가 되어 정엽의 곁에 서기를 근심했던 것이 무색하게, 대혼 직후 훈풍과 함께 찾아온 새 생명은 매일 연주를 기쁘게 했다.

배 속의 아이들은 온 나라에서 쏟아지는 관심과 사랑을 안다는 듯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 왔다.

연주는 별안간 경쟁적으로 이어지는 격렬한 태동에 잠시 숨을 멈췄다가 가늘게 날숨을 뱉었다.

“아기씨. 황후마마께서 두 분이 쓰실 물건은 전부 똑같이 만들어 두셨으니 싸우지들 마세요. 황후마마께서 힘들어하신답니다.”

보다 못한 금란이 연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긋이 속삭였다. 그 덕인지 태풍처럼 요란하던 배 속이 이내 잠잠해졌다.

“아이들이 벌써부터 너를 잘 따르는구나.”

“그럴 리가요. 두 분 아기씨의 효성이 지극하신 거지요. 황후마마께서 힘들어하신다니 금방 얌전해지셨잖아요.”

“어느 쪽이든 듣기 좋은 얘기다.”

뿌듯하게 미소 짓던 연주가 뻣뻣해진 허리를 달래려 수틀을 내려놓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눈치 빠른 금란이 푹신한 베개를 가져와 연주의 허리 뒤에 놓아 주었다.

수를 놓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다 베개에 기대니 그제야 피로가 몰려왔다. 자꾸만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한숨을 쉰 연주가 편한 자세를 찾아 이리저리 뒤척였다.

“마마, 간식을 좀 준비해 드릴까요? 오늘은 드신 게 너무 없으시옵니다. 식사가 내키지 않으시면 과일이라도 좀 드시는 게 어떠세요?”

하나도 아닌 둘.

날이 갈수록 일상생활조차 힘들어하는 연주를 지켜보던 금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뭐라 하든 아무것도 내키지 않았다. 연주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때, 태후의 처소인 덕교궁으로 심부름을 보냈던 소렴자가 부리나케 내실로 뛰어 들어왔다.

“왜 이렇게 부산스러워요?”

요즈음 태동 때문에 밤에도 편히 눈을 붙이지 못하는 연주였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던 금란이 소렴자를 향해 숨죽여 핀잔을 늘어놓았다.

오늘따라 정신이 없어 보이는 소렴자는 한참 급한 숨을 몰아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황제, 황제 폐하께서 귀환하셨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뜻밖의 소식을 들은 연주가 다급히 허리를 세웠다. 금란이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정엽은 토하(土河) 범람 때문에 시찰을 떠나 석 달 가까이 황궁을 비운 상태였다.

“마마, 그럴 리가 없사옵니다. 폐하께서 태동성에서 출발하신다고 연통하신 게 고작 6일 전 아니옵니까? 무엇보다 태동성에서 황성까지는 최소한 열흘은 걸리는 거리인데…….”

“금란 낭자,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르겠지만 폐하께서 이미 화곡관을 넘으셨고 머잖아 조양문에 다다르신답니다. 그래서 관료들도 전부 단봉문 앞으로 집결하고 있어요!”

화곡관은 수도 조양성으로 진입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화곡관에서 조양까지는 반나절 거리고, 조양성 정문에서 황궁 정문인 단봉문까지는 반 시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정엽의 도착 시간을 계산한 연주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서, 어서 새로 단장해야겠다. 예복을 내어오너라.”

“예, 황후마마.”

불안한 걸음으로 뒤뚱거리는 연주를 부축한 금란이 문간에 서 있던 궁녀를 향해 매섭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궁녀는 날래게 자취를 감췄다.

궁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금란은 연주와 함께 유리 병풍을 지나 상흠궁 안쪽으로 향했다.

* * *

여인이 오랜만에 만나는 낭군 앞에서 누구보다 고와 보이고픈 마음은 인지상정이었다.

서둘러 화장을 고치고 머리를 다시 빗어 올린 연주가 새로 지은 자줏빛 예복을 걸친 뒤 상흠궁을 나섰다.

하지만 급한 마음과 달리 연주의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회임 사실을 안 뒤, 만일의 사고를 피하고자 한사코 가마를 멀리해 왔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느리지만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연주가 잠시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보다 빨리 걸은 탓인지 눈앞이 어지럽고 구역질이 밀려왔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연주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금란이 물었다.

“마마, 지금이라도 가마에 오르시겠습니까?”

힘겹게 헛구역질을 삼킨 연주가 고개를 저었다.

“태중에 아이가 둘이나 있다. 느리더라도 이게 맞아.”

호흡을 가다듬은 연주가 다시 고집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내궁과 외조의 경계를 지나자, 멀리서부터 외조의 광장을 가로지르는 흑마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그 뒤에는 말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의장대가 알록달록한 비단 일산과 부채를 들고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세상에…….”

연주는 보기 드문 진풍경에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무섭게 질주하던 정엽이 고삐를 당겨 연주의 지척에 말을 세우곤 훌쩍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연랑!”

연주는 부푼 배를 끌어안고 환한 얼굴로 남편을 맞이했다. 한데 막상 연주를 발견한 정엽은 잠시 멈칫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연랑……?”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연주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대꾸 없이 그녀를 감싸 안은 정엽이 날카롭게 명령했다.

“뭣들 하느냐! 당장 호 태의를 불러라!”

“갑자기 태의는 왜…….”

당황한 연주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스쳤다.

하지만 식은땀이 맺힌 작은 이마에 입술을 내리찍은 정엽은 대뜸 연주를 들어 안고 가까운 궁전으로 향했다.

그는 잘 정돈된 흥화전 난각의 평상에 연주를 내려놓았다.

정엽은 오늘따라 더 가늘어 보이는 아내의 두 손을 감싸 쥔 채 불안을 숨기지 못했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이지?’

연주는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정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무래도 마중 나오는 길에 지친 제 모습을 보고 그가 혼자 오해를 한 것이라 짐작했다.

“연랑, 나는 괜찮아요.”

“…….”

“정말이에요. 난 당신이 돌아왔단 소식을 듣고 기뻐서 마중을 나온 것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성치 않은 몸으로 무리를 해?”

성치 않은 몸이라고……?

연주는 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살포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정엽은 자책하듯 한참 제 입술을 짓이기다 원망을 토로했다.

“병이 났으면 바로 내게 알렸어야지. 대체 나를 얼마나 나쁜 놈으로 만들 셈이야?”

“…….”

기쁘기만 해야 할 재회의 순간이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연주는 정엽의 걱정을 덜어 주고 싶었지만, 좀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부름을 받은 호 태의가 헐레벌떡 달려와 바닥에 엎드렸다.

“황제폐하와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황후의 용태가 이상하다. 서둘러 살펴라.”

“예……?! 예! 폐하!”

놀란 호 태의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차분히 연주의 맥을 짚었다. 정엽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미간을 좁힌 채 신중하게 맥박을 확인한 호 태의가 머리를 갸웃거리다 물러나 다시 허리를 숙였다.

“폐하, 황후마마께서는 무탈하시옵니다.”

“……무탈하다고?”

“그렇사옵니다.”

“그럴 리가. 황후가 회임한 지 이제 고작 일곱 달이 지났다. 한데 지금 황후의 배를 봐라. 만삭은 되어 보이지 않느냐?”

정엽은 연주 앞에서 언성을 높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살벌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첫 아이가 잘못된 것도 갓 일곱 달을 넘긴 시점이었다. 그리고 정엽은 당시 연주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연주는 절대 이 정도로 배가 부르지도 않았고, 이토록 거동을 힘겨워하지도 않았었다.

“아, 그것은…….”

호 태의가 난처한 듯 말끝을 흐리며 연주를 흘끗 돌아보았다.

이제야 정엽의 오해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알아차린 연주가 허탈하게 웃었다.

“연랑, 내가 다 설명할게요.”

“……?”

“호 태의. 수고했네. 이만 돌아가 보게.”

“예. 황후마마.”

“금란, 다른 궁녀들과 함께 잠시 문밖을 지키거라.”

“알겠사옵니다.”

연주를 향해 가볍게 무릎을 굽혀 보인 금란이 궁인들을 이끌고 내실 밖으로 나갔다.

드디어 정엽과 단둘이 남게 된 연주가 그를 향해 새초롬히 눈을 흘겼다. 영문을 모르는 정엽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하…….”

고작 이만한 일로 소란을 일으킨 정엽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연주는 그의 반응을 보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엷게 한숨을 내쉬곤 정엽의 무딘 손을 그러쥐었다.

“걱정 마요. 나는 아픈 게 아니니까.”

“아픈 게 아니면?”

연주는 대답 대신 정엽의 손을 제 배 위에 끌어다 놓았다.

“이 안에……. 우리 아이가 둘이나 있대요. 그래서 보통 임부들보다 배가 큰 거고요.”

“……둘, 이라고?”

연주가 완벽히 안정기에 접어든 것까지 확인하고야 태동성 시찰을 결정하고 서둘러 다녀온 정엽이었다. 그는 좀처럼 믿기 힘든 얘기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기쁨이나 행복보다 좀 더 근본적인 의문이 떠돌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 몸에 어떻게 아이가 둘이나 자라고 있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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