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55화 (완) (155/161)

155화.

‘이 정도 각오도 없이 황후의 자리를 마다한 것이 아닌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연주를 응시하던 허 상궁이 어린 손녀를 달래듯 조곤조곤 태후의 뜻을 전했다.

“만일 군주께서 외명부 부인들의 뜻마저 외면하시거든 태후마마께서 전하라 하신 말씀이옵니다.”

“…….”

“태후마마의 뜻을, 부디 깊이 곱씹어 보소서.”

그 말을 끝으로 연주에게 단정히 예를 갖춘 허 상궁이 별당을 나섰다. 연주는 가슴을 헤집는 상상의 여운에 하릴없이 입술을 사리물었다.

* * *

허 상궁이 전한 태후의 질문은 연주의 가슴에 크나큰 파문을 일으켰다. 연주는 바람에 휩쓸리는 풀잎처럼 실연의 잔상에 오래 괴로워했다.

하지만 제 마음이 아무리 괴롭다 한들, 제 뜻이 바뀌기만을 기다리며 애태우는 이들보다 더 괴로울 리 없었다. 그러니 저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탓하느니, 저 자신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것이 먼저였다.

연주는 마음을 다잡듯 이튿날부터 직접 남은 짐 정리에 매달렸다. 속 편하게 가화와 금란에게 짐 정리를 맡겨 두었더니 정리가 되긴커녕 오히려 신경 써야 할 일만 늘어났기 때문이다.

연주가 서둘러 떠나지 못하도록 최대한 시간을 끌라는 세자의 밀명을 받았던 시녀들은 묵묵히 짐을 정리해 나가는 주인의 곁에서 물건이라도 훔친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아가씨 말씀대로 계절별 의복도 전부 챙겼고, 평소 쓰시던 물건들도 챙겼어요. 그리고 장신구도요. 나중에 팔아서 비상금으로 쓸 수도 있으니까요.”

“…….”

“아가씨, 혹시 화……나셨어요?”

“…….”

“제가 잘못했어요. 네? 그러니 화 푸세요.”

장신구가 든 상자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밑도 끝도 없이 변명을 늘어놓던 금란이 연주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금란의 짐작과 달리, 연주는 그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을 따름이었다.

‘이 방의 물건을 모두 챙긴대도 지금 내 마음만큼 무거울까.’

손을 멈추고 방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된 짐을 살피던 연주의 눈동자에 근심이 어렸다.

“아가씨…….”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는 연주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금란이 상자를 내려놓고 조용히 별당을 나섰다.

아가씨께서는 아무렇지 않다면서 왜 저리 힘들어하시는 것인지. 아직 사랑은커녕 누군가를 제대로 좋아해 본 적도 없는 금란의 눈에는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드디어 마지막 짐 정리를 마친 연주는 쓰러지듯 책상 위에 엎드려 뺨을 기댔다.

“이제 정말 다 끝난 거야. 정신 차려, 채연주.”

내일 수도를 떠나면 이 지독한 상사병도 차츰 가라앉게 되리라.

맥없이 쏟아진 가는 팔이 나무 끝에 매인 비단처럼 애처롭게 흔들렸다. 망연한 마음에 덧없이 구르던 눈동자가 어느덧 달빛이 쏟아지는 창가에서 멈췄다.

밤하늘의 달은 오늘도 멀고 또 멀었다.

‘아무리 발끝을 세우고 손을 뻗은들 잡을 수 없어. 그러니 이게 옳아.’

태후의 말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여인에게 보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황후가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앞으로 정엽이 나아갈 길은 유혹이 넘실대는 가시밭길. 역대 제왕들이 그렇듯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며 다른 후궁들을 찾다가, 그가 더는 나를 돌아보지 않는 날이 온다면 연주는 황후가 된 일을 후회하게 될 게 분명했다.

‘이미 한 번 멀어졌던 사이잖아. 언제 깨질지 모르는 행복을 위해 인생을 거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할 순 없어.’

연주는 남은 사랑을 가슴에 묻은 채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는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새 물건처럼 반짝이기만 할 뿐 절대로 망가지지 않으니까.

내도록 애틋하게. 내도록 아름답게. 가슴 아프지만 그렇게 각자의 삶에 평생 어여쁘게 남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재녀로 남느니, 죽어 가슴에 남은 경국지색이 낫지.’

하지만 수없이 고민해 결정한 이별임에도 슬픔만은 도저히 무뎌지지 않았다. 오히려 슬픔을 이기려 할수록 가슴 속에 정엽을 향한 열망이 거세게 일었다.

연주는 흐르는 눈물을 숨기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디를 바라보아도 그리운 얼굴은 여름날의 태양처럼 선명하기만 했다.

‘아, 정엽…….’

이대로 서슬 푸른 그리움에 평생 몸서리칠 생각을 하면, 마치 향기로운 풋사과가 썩어 문드러지듯 가슴이 짓무르는 것만 같았다.

연주는 소리 없이 눈물을 떨구며 이별의 고통을 삼켰다. 얼음 낀 겨울 강물로 심장을 씻은 듯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렸다.

딱 하루만 일정을 미룰까?

떠나기 전에 딱 한 번만 정엽의 얼굴을 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비탄의 그늘이 짙어질수록 마지막 발악처럼 갈등이 깊어졌다. 연주는 유약하고 변덕스러운 저 자신이 원망스러워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슬픔에 지쳐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연주는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문밖에, 폐하께서…….”

“……?”

“이것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발갛게 부은 연주의 눈을 보며 엷게 탄식한 가화가 샛노란 비단에 싸인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떠나기로 마음을 굳히고도, 연주는 홀린 듯 두루마리를 펼쳤다.

평소답지 않게 투박한 필체가 연주의 시선을 당겼다.

[짐이 부덕하여 더는 제왕의 업을 이을 수 없는바, 황위를 선황의 적황자 소정영에게 넘긴다.]

고민 끝에 휘갈겼을 글씨에서 연인의 참담한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연주는 깜짝 놀라 별당의 문을 열어젖혔다. 캄캄한 앞마당 한가운데에 새까만 미복을 두른 채 서 있는 정엽이 보였다.

휘청거리며 정엽에게 달려간 연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다 뭐예요?”

그간의 마음고생을 보여 주듯 눈에 띄게 수척해진 정엽이 힘없이 대꾸했다.

“네가 나를 황제로 만들어 놓고서는 버렸잖아. 곧 그 성지가 제국 전역에 반포될 거야.”

곧 전국에 반포될 거라고? 정엽의 대답에 크게 당황한 연주가 되물었다.

“곧이 언젠데요?”

“네가 원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그런 무책임한 소리가 어디 있어요!”

연주의 언성이 절로 높아졌다. 정엽은 그간 꾹꾹 눌러 온 원망을 분출했다.

“무책임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 해야 할 일을 하라며. 한데 그 결과가 이거야? 나는 황제가 되고 너는 떠나는 거?!”

연주를 향해 윽박지른 정엽이 우는 듯 찡그리는 듯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한숨을 삼켰다. 처음 보는 정엽의 반응에 놀란 연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간신히 감정을 억누른 정엽이 말했다.

“다 네가 원해서 한 일이야. 그런데 네가 나를 버리고 떠나겠다면 나도 이 자리를 버려야지.”

“……정엽.”

“정 나를 황제로 살게 하고 싶거든 네가 내게로 와.”

정엽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연주의 손을 가만히 끌어 쥐며 호소했다.

“알잖아. 네가 앉힌 이 자리는 아주 높은 곳에 있어서 위협으로부터 안전하지만 그만큼 고독해. 너는 네가 내 운명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말은 틀렸어. 내 삶을 완성 시킬 수 있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니까.”

“…….”

“내 운명의 주인은 너야. 그러니 나를 떠나게 할 수 있는 것도, 황제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오직 너뿐이지.”

운명의 주인. 내가 당신의…….

마음을 울리는 고백에 연주가 젖은 눈으로 정엽을 올려다보았다. 정엽이 연주와 시선을 곧게 맞춘 채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살 곳과 죽을 곳 모두 네 품이니까. 나는 네가 가는 길을 따를게.”

“…….”

“어디로 갈래?”

정엽은 연주의 뺨을 다정히 어루만지며 물었다. 우습게도 정엽의 온기 한 조각에 태산 같던 근심이 봄눈처럼 녹고 가슴이 뛰었다.

‘아, 이런 마음이라면, 일평생 서로만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어떤 난관도 이겨 낼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모든 게 불확실했지만, 서로를 향한 사랑만은 어떤 보석보다도 더 단단했다. 다시 정엽에게 외면받고 홀로 사랑을 지키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점차 선명해졌다.

결심을 굳힌 연주가 말했다.

“자미성이요.”

“……지금, 자미성이라고 했어?”

뜻밖의 대답에 놀란 정엽이 되물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이제 연주의 뜻은 변하지 않았다.

“후세에 악처로 이름을 남기고 싶지는 않아요. 하루 아침에 제왕을 꾀어 나라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여자가 되느니 차라리 황후가 되는 게 낫지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친 연주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언제 봐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내였다.

정엽은 냉큼 연주를 끌어안고 소중히 보듬었다. 터질 듯 벅찬 마음을 어렵사리 가다듬은 그가 놀리듯 말했다.

“어쩌지. 제왕을 현혹해 끝내는 미치게 했으니 현모양처는커녕 요부로 기록될 듯한데.”

“……그래서. 싫어요?”

정엽의 든든한 품에 안겨 어느새 안정을 되찾은 연주가 새침하게 되물었다. 피식 멋스럽게 실소한 정엽이 확신에 차 대답했다.

“그럴 리가.”

마침내 서로의 이름을 심장에 아로새기듯, 두 사람의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엇갈렸던 연인이 돌고 돌아 영원을 약속하는 순간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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