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홀로 퇴궐한 연주는 그날 저녁 향주로 돌아갈 채비를 시작했다. 주군의 성공을 지켜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귀가한 채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연주야, 꼭 이래야겠느냐?”
“저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에요. 아주 못 보는 사이가 되는 것도 아닌걸요.”
“하지만…….”
꼭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 같구나.
뒷말을 삼킨 채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연주가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건지 짐작은 가지만, 이번만큼은 누이를 말리고 싶었다.
“너무 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 조금 천천히…….”
“저는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연주는 채신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별당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듯 꼼꼼히 짐을 챙겼다. 더는 누이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달은 채신이 쓸쓸히 별당을 나섰다.
“후우…….”
연주는 하나밖에 없는 오라비가 방을 나서는데도 돌아보지 않았다. 시시각각 밀려드는 이별의 여운에 휩쓸려 그간의 결심을 잊고 후회할 일을 벌이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꾸만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단속하듯 정신없이 부산을 떨었다. 그러다 끝내 덜 닫힌 상자 뚜껑에 실수로 손끝을 찧고 말았다.
“아……!”
연주는 저린 손끝을 감싸 쥐고 어깨를 웅크렸다. 이를 보다 못한 금란과 가화가 연주를 말리고 나섰다.
“아가씨, 짐은 저희가 챙길게요.”
“맞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좀 쉬세요.”
얼렁뚱땅 밀려난 연주는 하는 수 없이 별당 한쪽에 놓인 평상에 앉아 멀거니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여길 떠나면 다 괜찮아지겠지. 몸이 멀어지면 이 그리움도 견딜 만하겠지.’
시녀들의 정갈한 손놀림에 점차 정리되어 가는 짐들을 보며 마음을 달래던 연주가 이유 모를 갑갑함에 방 안을 서성였다. 하지만 아무리 주의를 돌리려 해도 가슴에 이는 파도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나자, 이번에는 황제의 칙령을 받든 행렬이 세자부의 대문을 넘었다.
잠을 이루지 못해 파리한 낯으로 침상에 앉아 있던 연주는 집사 표 씨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한동안 우두망찰했다.
“지금. 뭐라고……?”
“유친왕 전하와 예부상서, 그리고 총관태감께서 와 계십니다.”
“무슨 일로 오셨다던가?”
“폐하의 성지를 가지고 오셨다고 합니다.”
“성지……?”
간신히 정신을 차린 연주가 되묻자, 표 집사가 흥분한 얼굴로 답했다.
“예! 게다가 붉은 비단으로 포장된 선물 행렬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분명 엄청난 소식을 전하러 오신 게 틀림없어요!”
붉은 비단으로 포장된 선물, 성지를 받든 황실의 종친과 예부상서, 그리고 황제의 수족인 총관태감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청혼 예물이로구나.’
상황을 파악한 연주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반면 이미 두 눈으로 황실 사절의 엄청난 위용을 확인한 표 집사는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연주를 재촉했다.
“아가씨, 더는 지체하실 시간이 없습니다. 세자 저하께서 아가씨를 모셔오라고 난리세요.”
“……알았네.”
연주는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길게 심호흡했다. 그러곤 표 집사와 함께 별당을 나섰다.
잠시 후 도착한 정방 앞마당에는 붉은 비단으로 장식된 커다란 자단나무 상자 십여 개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예복을 갖춰 입은 유친왕과 예부상서, 총관태감이 꼿꼿한 자세로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오셨군!’
오랜 기다림 끝에 연주가 모습을 드러내자 좌중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황제의 사절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유친왕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화정공주는 황제 폐하의 성지를 받드시오.”
기쁜 기색이라곤 없이 한참 머뭇거리던 연주는 주변의 시선에 치여 천천히 몸을 낮췄다. 이를 확인한 유친왕이 기쁜 목소리로 성지를 읽어 내렸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황제께서 이르시길, 한때 황실에 비극이 있어 온 나라가 혼란하였다. 이를 바로잡고자 평해왕의 적녀에게 내려졌던 화친공주의 봉작을 거둔다!”
“…….”
“흠흠. 그리고 다음 성지를 이어 전하겠습니다.”
총관태감에게서 두 번째 성지를 받아 든 유친왕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한층 엄숙하게 성지를 낭독했다.
“제왕이 치국의 과업을 잇기 위해선 하늘과 땅이 바로 서고 해와 달이 나란히 빛나 만민을 두루 비추어야 한다. 하늘의 도는 홀로 운행할 수 없고 오로지 현숙한 중궁의 내조가 있어야만 이룩할수 있으므로, 자질이 옥같이 아름답고 성품이 온화한 짐의 조강지처 채 씨를 황후로 삼는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이를 어찌해야 하나…….’
형용할 수 없이 심경이 복잡해진 연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연주의 속마음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유친왕은 두 개의 성지를 조심스럽게 갈무리하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속삭였다.
“폐하께서 즉위식을 마치시자마자 가장 먼저 내리신 칙령입니다. 감축드립니다.”
“…….”
“군주……?”
미동조차 없는 연주에게서 뒤늦게 이상을 감지한 유친왕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 기류를 감지한 연주가 이내 눈을 뜨고 굳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거듭 생각해 봐도, 역시 중궁의 자리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었다.
“송구하오나, 소녀는 폐하의 뜻을 받들 수 없사옵니다.”
“……!”
예기치 못한 연주의 선언에 방 안의 모두가 황망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파란을 일으킨 연주는 침통한 듯 얌전히 시선을 내리깐 채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소녀는 덕이 부족하여 이미 한차례 황실에서 내쳐진 몸이옵니다. 그런 제가 어찌 만인의 존경을 받고 중궁의 소임을 다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지만 군주……!”
“긴 혼란 끝에 폐하께서 새 시대를 여셨으니, 마땅히 새 사람과 함께하심이 옳습니다. 저는 폐하의 만수무강 외에 다른 것은 바라지 않으니, 부디 폐하께 명을 거두어 주십사 전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연주는 한 걸음 물러나 빈틈없이 예를 갖추고는 곧장 뒤돌아 정방을 떠났다. 주인공이 사라진 자리에 좌중의 무거운 탄식이 흩어졌다.
* * *
황제의 사절은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갔다. 소식을 들은 태후는 며칠 후 허 상궁을 내려보냈다.
“태후마마께서 이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연주와 마주 앉은 허 상궁은 묵직한 흑단 나무 상자를 건넸다. 으레 제 마음을 돌리기 위해 태후의 뜻을 전하러 왔다고 쉽게 생각하던 연주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허 상궁은 빙그레 웃어 보이기만 할 뿐 연주의 의문을 쉽게 해소해주지 않았다. 잠시 기 싸움 아닌 기 싸움을 하던 연주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게 무엇인가?”
“직접 확인해 보옵소서.”
직접 확인해 보라?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던 연주가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자색 비단이 덧대어진 두루마리가 담겨있었다.
‘서신인가?’
연주는 망설임 끝에 두루마리를 펼쳤다.
[세상에 덕 있는 여인 많다 하나 군주의 덕망보다 깊지 못하고, 세상에 지혜로운 여인 많다 하나 군주의 지혜보다 밝지 못한 줄 압니다.
저희 외명부 구성원 모두가 삼가 고개 숙여 청하오니, 승설군주께선 부디 만백성의 어머니가 되시어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유려한 필체로 담아낸 숭고한 뜻에 숨이 턱 막혔다. 연주는 해명을 요구하듯 허 상궁을 바라보았다. 허 상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친왕비를 비롯한 외명부 부인들이 자발적으로 마음을 모아 군주께 전해 주십사 청한 것이옵니다.”
“그런…….”
유친왕비는 현재 외명부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여성으로, 외명부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연주가 다시 한번 두루마리에 쓰인 문장을 읽어 내렸다. 정수리를 짓누르는 중압감에 절로 한숨이 새었다.
연주는 이내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서둘러 두루마리를 갈무리했다.
“외명부 부인들의 뜻은 잘 알겠으나, 나의 뜻엔 변함이 없네.”
“……정녕 중궁의 자리를 감당하실 수 없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네.”
사실 외명부 부인들까지 나서 저를 기꺼이 국모로 떠받들겠다고 나선 이상, 덕이 부족하여 황후의 자리를 감당할 수 없다는 명분에는 금이 간 셈이었다. 그럼에도 연주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린 연주는 애써 태연한 척 치마폭 위에 얌전히 두 손을 포갰다. 생각 많은 표정으로 연주를 지켜보던 허 상궁이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
“하면 마지막으로 여쭙겠사옵니다.”
“……?”
“황제 폐하께서 다른 여인과 혼인하시는 모습을 지켜볼 자신이 있으시옵니까?”
“…….”
“또 그 여인이 폐하의 아이를 낳으면, 온전히 기뻐하실 자신이 있으시옵니까?”
“……그건.”
허 상궁의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시험에 가까웠다.
연주는 최대한 의연히 허 상궁의 말을 받아치고자 했다. 한데 막상 입술을 떼려니 연인에게서 이별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정엽의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정엽이 제 손을 놓는다고 생각하니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듯 맥이 풀리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