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등 뒤에서 놀란 정엽의 절박한 외침이 들렸다. 하지만 연주에게는 번쩍이는 칼날과 피를 뒤집어쓴 야차처럼 시뻘건 낯의 태자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만 보였다.
찰나의 순간인데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온 세상이 느려진 그때, 단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촤악-!
날렵하게 연주와 태자의 사이로 끼어든 정엽이 검을 든 태자의 오른쪽 손목을 무참히 끊어 버렸다.
챙그랑- 챙강-!
떨어져 나간 손목과 함께 맥없이 추락한 검이 카랑카랑한 쇳소리를 내며 울었다.
상황을 인지할 틈도 없이 말초를 타고 올라오는 강렬한 통증을 느낀 태자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다.
“으아악!”
베어진 것은 머리가 아닌 팔이었지만 태자는 이미 참살이라도 당한 듯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군사들은 엎어진 태자의 양쪽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재빨리 그를 일으켜 세운 뒤, 쇠사슬로 몸을 결박했다.
정엽은 태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강제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북풍한설보다 차갑게 속삭였다.
“너 같은 놈에게는 죽음조차 사치다.”
“…….”
“하지만 부황의 뜻을 어길 수야 없지. 네 어머니와 함께 얌전히 처분을 기다려라. 때가 되면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여 주마.”
귀와 심장을 후비는 무감정한 목소리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전의를 상실한 태자가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태자의 머리채를 팽개친 정엽이 용무군 군사에게 명령했다.
“멀리 갈 것 없이 죄인을 영방궁에 유폐 시켜라. 곽 귀비와 함께 지내고 있던 어린 공주들은 모두 난희전으로 옮기고.”
“그럼 죄인의 다른 가족들은 어찌할까요?”
“별도의 처분이 있을 때까지 전부 각자의 처소에 가둬라.”
정엽의 명령을 받은 군사들이 태자를 끌고 덕교궁을 빠져나갔다. 무사히 소동이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연주가 밀려드는 현기증에 가볍게 휘청였다.
정엽은 연주를 곧장 품속 깊이 당겨 안았다.
“……고생했어.”
연주는 정엽의 다정한 속삭임에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품을 말 없이 파고들었다.
황궁으로 달려오는 내내 연주를 잃을까 봐 가슴 졸였던 정엽은 모든 일을 무탈하게 끝마친 것에, 또 사랑하는 정인을 다시 품에 안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그녀의 이마에 길게 입 맞추었다.
* * *
세자부로 돌아온 연주는 며칠 동안 죽은 듯이 잠만 자며 그동안 쌓인 피로를 씻어 냈다. 그사이 오른손이 잘린 채 영방궁에 갇혀 있던 태자는 정엽이 내릴 처결이 두려웠는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엽은 그런 태자의 지위를 폐하고 서인으로 강등시킨 뒤 황적에서 제외했다. 다만 서인의 생모인 곽 귀비는 오랜 세월 선황을 모신 공을 인정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대신 자진을 명받았다.
“폐하께서 옳은 결정을 내리셨네요.”
몸을 추스르고 오랜만에 침상에서 일어나 앉은 연주가 오라비로부터 정엽의 처결을 전해 듣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황이 곽 귀비를 참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아직 이승에는 그녀의 자녀가 다섯이나 남아 있었다. 그러니 당장 곽 귀비를 처단하더라도 남은 아우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소기 일가는 어떻게 되는 거죠?”
“폐태자비와 후궁들은 모두 헌왕부에 유폐될 거다. 출가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 또한 들어줄 것이고.”
“그렇다면 민예공주나 다른 황자들은…….”
“곽 귀비가 낳은 황자와 공주들은 선황의 태비들에게 입적돼 길러질 것이야. 특히 민예공주는 희태빈께서 맡으셨으니 염려하지 말거라.”
“희태빈께선 태후마마만큼이나 지혜롭고 온화하기로 유명하신 분이죠. 다행이네요.”
정엽을 위해 민예공주를 속이고 그녀의 호의를 이용했던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연주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공주에게서 어머니와 오라비를 앗아 가게 됐지만, 공주도 언젠가 이것이 최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나이가 올 터였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테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거라.”
채신은 연주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오라비의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추스른 그녀가 말했다.
“이제 남은 건 폐하의 즉위식이네요. 흠천감에선 금년에 길일이 남아있다던가요?”
“그래, 마침 선황 폐하께서 황릉으로 운구되신 직후 대길일이 있다고 하더구나. 몇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길일이라니, 어쩌면 이 또한 폐하의 운명인 거겠지.”
“아마도, 그렇겠지요.”
연주는 정엽의 즉위식을 들뜬 표정으로 고대하는 오라비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제 그가 진정한 황제로 거듭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허했다.
‘내내 기다려 왔던 일인데. 왜 마음껏 기뻐할 수가 없는 거지?’
연주는 알다가도 모를 제 마음을 외면하며 말을 아꼈다. 그러나 평생 봐 온 누이가 지금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채신이 아니었다.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연주를 응시하던 채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너도 즉위식에 참석하라고 특별히 분부하셨다. 가겠느냐?”
“네? 제가요?”
뜻밖의 제안을 들은 연주가 채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황제가 된 정엽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반, 못 본 척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또 반이었다. 쉽게 갈피를 잡지 못하던 연주는 고민 끝에 고개를 저었다.
“여인인 제가 어찌 감히 즉위식에 참석하겠어요. 태후마마께서도 참석하실 수 없는 자리인걸요.”
“그래도…….”
“저는 먼발치에서 지켜볼게요. 중요한 예식이니만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전통과 예법을 따라야죠.”
“네 뜻이 정이 그렇다면야……. 알았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채신이 누이의 가는 손을 힘있게 잡았다. 제 손을 굳게 잡은 오라비의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 많은 표정을 짓던 연주가 애써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이렇듯 누군가는 기뻐하고, 누군가는 슬퍼하는 동안 새 황제의 치세가 열렸다.
“오라버니, 다녀오세요.”
“그래, 너는 태후마마를 뵈러 갈 생각이냐?”
“비밀이에요.”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창공이 인상적인 대길일, 황궁 자미성의 외조 흥화전(興華殿)에서 정엽의 즉위식이 열렸다. 오라비와 함께 입궁한 연주는 즉위식에 참석하는 그와 헤어져 흥화전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숭루(崇樓)에 올랐다.
금빛 지붕과 기둥이 온통 붉은 비단으로 장식된 흥화전은 옥황상제의 하늘 궁전을 지상으로 옮겨놓은 것처럼 호화롭고 아름다웠다.
새하얀 대리석이 깔린 광장에는 황제가 지나는 길을 따라 금사로 황룡을 수놓은 붉은 양탄자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와아…….”
광활한 광장 곳곳에는 천자의 위엄을 드러내는 상징물이 번쩍였다. 동서남북 방위에 맞춰 줄지어 세워진 수백 개의 깃발과 의장이 그것이었다.
정엽의 어가가 지나갈 길 양옆으로는 알록달록한 일산이 상쾌한 겨울바람에 나부꼈다. 투명한 겨울 햇살은 새 황제의 치세를 축복하듯 봄볕처럼 다사로웠다.
‘웅장하고 아름답구나.’
연주는 오직 정엽 한 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완전무결한 예식을 지켜보며 저도 모르게 가슴 위에 두 손을 모았다.
촤악- 짝-! 촤악- 짝-!
이윽고 어가의 도착을 알리는 채찍 소리가 고요한 광장을 갈랐다. 그 후 길시를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온 황궁에 울려 퍼지고, 이를 신호 삼아 악공들이 북을 치기 시작했다.
심장의 박동 소리를 닮은 북소리에 장엄한 뿔 나팔 소리와 풍부한 관현악의 선율이 더해져 천지를 메웠다. 잔잔하던 연주의 가슴 속에 누군가 돌을 던진 것처럼 깊은 파문이 일어났다.
“아…….”
그 순간, 정엽이 탄 금빛 가마가 느릿느릿 광장의 중심을 가르기 시작했다. 유유히 흥화전의 답도 앞에 도착한 가마는 사뿐히 지상에 내려앉았다.
드디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예복인 십이장복과 12류 면류관을 갖춘 정엽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엽…….”
정인의 늠름한 자태는 아무리 먼 발치에서 봐도 눈부시게 찬란했다. 연주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용상으로 향하는 정엽을 눈에 담았다.
신묘한 향을 풍기는 향로와 공작 깃털로 장식된 거대한 파초선, 수십 개의 쌍룡단선(雙龍團扇)과 일산(日傘)에 둘러싸인 정엽은 여의주를 희롱하는 오조룡이 꿈틀거리는 답도를 지나 위풍당당하게 보좌에 올랐다.
정엽이 보좌에 앉자, 황제의 보검과 전국옥새를 받쳐 든 종친들이 가장 먼저 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뒤이어 만조백관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경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황제 만세!”
아, 더는 당신에게 닿을 수 없겠구나.
“만세!”
잊지 못하고 그리워할 날만 남았구나.
“만만세!”
죽는 날까지 홀로 사랑할 운명이로다.
아득한 곳에 오른 정엽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연주는 그간 막연히 생각해 왔던 이별을 오늘에야 비로소 실감했다.
넓은 광장에 울려 퍼지는 만세 소리가 커질수록 정엽이 밤하늘의 달처럼, 거울 속의 꽃처럼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 안 돼…….’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연주가 울음을 참느라 자꾸만 들썩이는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하지만 눈물은 참아도 자꾸만 넘치는 마음을 가눌 수는 없었다.
결국, 연주는 도망치듯 숭루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