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52화 (152/161)

152화.

어느새 편전 앞마당에 들어온 정엽이 위풍당당하게 소리쳤다. 정엽이 끌고 온 사병 무리 주변으로 종실왕공과 대신들의 모습도 보였다. 종소리를 듣고 태후를 찾아왔다가 뜻밖의 상황을 목격한 그들은 하나같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황후가 기다리던 게 이거였구나!’

졸지에 황후를 겁박하는 모습을 들키게 된 태자가 이를 갈며 검을 내렸다. 대신 무도하게 사병들을 이끌고 궁 문을 넘은 정엽을 향해 칼끝을 세웠다.

“소정엽! 종정사에 갇혀 있어야 할 네놈이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반역을 일으키고자 탈옥이라도 한 것이냐!?”

“본 왕은 너희 모자를 섬멸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정엽은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듯 오른손을 말아쥔 채 높이 들어 올렸다. 그의 오른손 엄지에는 황제에게서 넘겨받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정엽의 손에서 빛나는 황제의 반지를 확인한 태자가 사색이 되어 윽박질렀다.

“닥쳐라! 지금껏 황제 폐하의 곁을 지킨 건 네놈이 아니라 나다! 한데 어찌하여 네놈 손에 폐하의 반지가 있을 수 있단 말이냐?”

“…….”

“저 반지는 가짜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금군은 뭣들 하느냐? 당장 저 역도를 추포해라!”

태자의 명을 받은 금군들이 정엽과 그의 군사들을 향해 무기를 겨눴다. 하지만 정엽은 지지 않고 높이 들어 올렸던 주먹을 펴 손날을 세웠다.

정엽의 신호를 받은 군사들이 앞으로 쏟아져 나와 대열을 갖추고 일제히 금군을 향해 창검을 겨눴다.

무수한 군사들의 머리 위로 전운이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피바람이 불어닥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가 덕교궁을 덮쳤다.

그 순간.

“황제 폐하의 성지요!”

첨예하게 대치 중인 군사들 사이로 한 손에 성지를 든 연주가 나타났다. 황제가 붕어하고 차기 제왕의 재목들이 대립하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태자가 궁중에 깔아 놓은 궁인들과 군사들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덕교궁 후문으로 들어온 연주는 편전 앞마당 한가운데로 나섰다.

그러는 동안 정엽과 시선이 마주친 연주는 그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재차 외쳤다.

“모두 폐하의 뜻을 받드시오!”

총관태감을 통해 연주가 가지고 있는 것이 황제가 찾으라 명한 성지임을 알고 있던 정엽이 가장 먼저 몸을 낮췄다.

그러자 정엽을 따르는 용무군과 사병들 역시 일제히 손에서 무기를 내려놓고 연주를 향해 예를 갖췄다.

“…….”

금방이라도 칼부림을 일으킬 듯하던 정엽과 사병들이 무기를 내려놓자, 그들과 대적할 필요성이 사라진 금군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황궁 안에서 내전이 벌어지는 것을 막은 연주는 상현궁에서 가져온 벽옥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담긴 성지를 낭독했다.

“황제께서 이르시길, 무릇 천자의 의무는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을 평안케 하고 천하의 도를 바로 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덕 있고 능력 있는 자에게 후세를 맡겨 대대손손 제국의 영화를 보존하고 창성케 하는 데 있다.”

“…….”

“짐의 적장자 소정엽은 일찍이 하늘의 굄을 받아 짐의 아들 중 가장 자질이 뛰어나고, 변방에서 오래도록 제국을 수호해 온 공이 크다. 하여, 짐은 그에게 황통을 잇게 하여 대화국의 번영을 만세토록 이어가고자 한다. 만민은 그를 천자로 받들어 모시라!”

연주의 성지 낭독이 끝나자, 인파로 가득한 덕교궁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지금의 태자가 석연치 않은 과정으로 동궁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버젓이 황제의 후계자가 존재하는 마당에 적장자에게 황위를 물려준다니.

“아니, 이게 무슨…….”

“그러게나 말입니다.”

중궁 앞에 모여든 종실왕공과 대신들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간 자신이 저지른 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태자는 이 상황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개소리하지 마라!”

터벅터벅 편전 밖으로 걸어 나온 태자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연주에게 쏘아붙였다.

“네년은 소정엽과 혼인했던 사이가 아니냐? 네년이 읽은 성지가 진정 부황의 뜻이라고 어찌 믿을 수 있어!”

성지를 갈무리하고 자세를 꼿꼿하게 가다듬은 연주가 지지 않고 맞섰다.

“정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거든 여기 있는 종친과 대신들에게 확인하게 하십시오! 이 성지는 폐하의 친필로 작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옥새까지 선명하게 찍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군주, 성지를 내게 주오! 성지의 진위는 우리가 판단하리다!”

정세를 지켜보던 황제의 아우 유친왕이 여전히 무릎을 꿇고있는 군사들을 지나 종친과 대신들을 이끌고 연주 앞에 섰다.

“받으십시오.”

연주는 유친왕에게 공손히 성지와 벽옥상자를 넘겨준 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곧이어 성지를 확인한 종친과 대신들은 심상치 않은 얼굴로 수군거렸다.

“폐하의 친필도 맞고, 성지에 찍힌 옥새 또한 위조된 것이 아니군.”

“한데 이 성지는 3황자가 황태자로 책봉되기 한참 전에 작성된 것이지 않소?”

“맞소. 내 기억이 맞다면 성지에 쓰인 이 날짜는 선황후께서 훙서하신 바로 그 날이오.”

“하면 폐하께서는 이렇듯 미리 성지를 작성해 두시고도 어찌하여 3황자를 태자로 책봉하신 것이오?”

의문 투성이인 대화를 가만히 듣던 유친왕이 연주를 돌아보았다.

“군주, 이 성지를 대체 어디서, 어떻게 가져온 것이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상현궁에 있는 폐하의 친필 족자 뒤에서 꺼내 온 것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군주에게 이 성지의 위치를 알려 주셨다는 거요?”

“맞습니다. 또 황제 폐하께선 그 자리에서 당신의 반지를 총관태감에게 넘겨주시며 연친왕 전하를 풀어주고 태자와 곽 귀비를 섬멸하게 하라 명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그런 명령을 내리셨소?”

“곽 귀비와 태자가 폐하를 시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뭐, 뭐요?!”

황제를 시해하려 하다니. 말만으로도 놀라 어쩔 줄 모르던 사람들이 일제히 태자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완벽히 궁지에 몰린 태자의 얼굴이 점점 검게 변했다.

그런 태자를 흘깃 바라본 연주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황제 폐하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은 총관태감이 증명해 줄 것입니다. 방 공공! 이리 오시게!”

연주는 정엽의 뒤편에 서있는 총관태감 방유신을 불러냈다. 그는 곧장 앞으로 나와 성지를 살핀 뒤, 종친들과 대신들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유친왕이 다급히 물었다.

“방 공공, 군주의 말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3황자의 황태자 책봉 당시에 이 성지가 공개되지 않았는가?”

“폐하께서는 처음부터 이 성지를 당신께서 세상을 떠난 후에 공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올봄 폐하께선 급병으로 누워 계셨을 뿐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성지를 공개할 이유가 없었지요.”

총관태감은 황제가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며 그의 절대적 신뢰를 받은 인물이었다.

또 연주와 총관태감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종정사에 갇혀 있던 정엽이 어떻게 황제의 반지를 가지게 됐는지, 또 왜 그가 사병을 이끌고 덕교궁으로 왔는지 모두 설명이 가능했다.

“태자가 이런 엄청난 흉계를 꾸민 줄은 몰랐습니다!”

“권력에 대한 탐욕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로군요!”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복잡하긴 해도 그간의 정황을 모두 이해한 종친과 대신들이 우왕좌왕했다. 그들의 다양한 반응을 확인한 연주가 마지막 일격을 위해 태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귀비와 태자는 지금껏 오석산을 섞은 단약을 이용해 황제 폐하를 미혹하고 국정을 멋대로 주물러왔습니다. 그러다 끝내는 권력을 위해 폐하를 시해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황위에 오르려 했지요! 저런 자가 어찌 천자로서 만인의 공경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면 폐하께서 내게 전국옥새를 맡겨 두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구나!”

연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후가 보좌에서 일어나 전국옥새를 꺼내 들었다. 전국옥새를 품에 안은 그녀는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

“애종이 울리자마자 태자가 본 후를 찾아와 겁박하는 게 처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진정 폐하께서 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자 하셨다면, 얌전히 종친과 대신들이 도착하길 기다렸다가 옥새를 받아 가면 될 일 아니었더냐?”

“…….”

“죄를 지은 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내게 옥새를 내놓으라 칼을 들이미는 천인공노할 짓을 벌일 수 있어!”

매섭게 호통치는 황후를 지켜본 사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태자가 황후를 칼로 겁박하는 장면만은 모두가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

이로써 황위를 둘러싼 모든 공방이 해소됐다.

‘내가 이 자리를 어떻게 차지했는데! 이제 한 걸음만 더 가면 옥좌가 코앞인데 어째서!’

자신이 파국을 맞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태자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분노로 몸을 떨었다.

“반역자 소기를 추포하라!”

묵묵히 상황을 관망하던 정엽이 용무군에게 명령하고는 새카만 외투를 휘날리며 연주에게로 향했다.

군사들은 덕교궁 월대에 있는 태자를 사로잡으려 달려 나갔고, 연주는 제게 다가오는 정엽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음 순간.

“이게 다 네년 때문이다-!”

군사들이 편전의 계단을 다 오르기도 전에 태자가 높다란 월대에서 도약해 뛰어내렸다. 공중에 붕 떠오른 태자는 그대로 아래에 있는 연주를 찌르기 위해 검을 세웠다.

악에 받친 태자의 고성에 놀란 연주가 본능적으로 돌아섰다.

“채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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