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귀비와 태자가 전국옥새를 손에 넣기 위해 황궁을 수색하는 그 시간, 연주는 불 꺼진 상현궁을 홀로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선황후의 영전을 지키던 벽선이 얼마 전 귀비의 흉계로 인해 궁 밖으로 내쳐지는 바람에 도움을 구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넓디넓은 상현궁을 활보하던 연주는 다시 돌아온 선황후의 위패 앞에서 지쳐 주저앉았다.
어전에 잠입한 3일 동안 황제를 몰래 돌보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탓에 체력은 바닥이 난 지 오래. 초조한 만큼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가 머리를 울려 눈앞이 핑핑 도는 것만 같았다.
“채연주, 그래도 찾아야 해. 생각해 내야 해.”
연주는 점점 지쳐 가는 심신을 다잡기 위해 끊임없이 소리 내 중얼거렸다.
“일단 눈에 보이는 가구와 집기는 모두 뒤져 봤어. 침상이나 탁자 밑, 장롱 깊숙한 곳. 남들도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곳에는 없어.”
그렇다면 어디에 있을까. 성지는 어디에 있을까.
연주는 자기 자신에게 주문을 걸듯 그간의 상황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우선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전하라 한 걸 보면 분명 황위 계승에 관한 성지일 거야.”
그런 물건이 평범한 곳에 숨겨져 있을 리 없다. 내가 황제 폐하라면 어디에 성지를 숨겼을까?
연주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선황후의 위패에서 몇 걸음 물러나 영전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그러고는 한눈에 보이는 영전의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황제가 하필 상현궁에 성지를 숨겼다면, 이 전각 안에서도 선황후와 특히 인연이 깊은 사물이 지표가 될 가능성이 컸다.
“황제와 선황후, 선황후와 황제…….”
하지만 시모였던 선황후는 부군인 황제에 관한 이야기를 아끼는 편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정엽이 제게 스치듯 들려준 이야기 속에 실마리가 있을지도 몰랐다.
‘분명 정엽이 예전에 들려준 얘기가 있었는데.’
연주는 지금쯤 황궁으로 달려오고 있을 정엽을 생각하며 차분히 옛일을 되짚었다.
그 순간, 상현궁의 모든 것을 훑던 연주의 시선 끝자락에 황제의 친필로 쓰인 족자가 걸렸다. 세월을 덧입어 희미하게 바랜 종이 위에 남은 필적은 기상이 웅장해서, 평면에 불과한 글씨가 모가 난 것처럼 툭 불거졌다.
[身無彩鳳雙飛翼, 心有靈犀一點通. (신무채봉쌍비익, 심유영서일점통)]
‘우리 몸에 찬란한 봉황의 날개는 없지만, 마음만은 영묘한 무소의 뿔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다네.’
영묘한 무소의 뿔처럼…. 영묘한 무소(靈犀)?
족자에 담긴 이상은의 시구를 무심코 곱씹던 연주의 눈이 일순 커졌다. 향주에서 정엽과 함께 묵었던 전각의 이름이 바로 이 구절에서 따온 ‘영서각(靈犀閣)’이었던 것이다.
정엽의 말에 따르면 영서각은 과거 선황후와 황제가 소싯적 함께 머물던 곳. 게다가 연주의 기억에 의하면 선황후는 병중에도 저 족자를 침실에 들여놓으라고 지시할 만큼 무척이나 아꼈다.
마지막엔 침실에 걸려 있던 족자가 왜 다시 응접실로 나와 있겠는가?
“저거다……!”
연주는 발끝을 돋워 벽에 걸려 있던 족자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가려져 있던 매끈한 나무 벽을 손으로 두드렸다.
똑똑- 똑똑- 텅-!
신중하게 탐색해 보니 속이 비어 울림소리가 유달리 큰 부분이 느껴졌다.
연주는 그곳에 미세한 틈이 파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거기에 손톱을 끼워 나무판을 뜯어냈다. 그러자 숨겨져 있던 비밀 벽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벽장 속에는 황금으로 장식된 벽옥 상자가 들어 있었다.
“찾았다!”
연주는 다급히 손을 뻗어 벽옥 상자를 꺼냈다. 이젠 정엽을 누구도 해하지 못할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덕교궁으로 향하기 위해 돌아선 순간.
데엥- 데엥- 데엥- 데엥-!
황궁 전체에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 귀에 들리는 소리를 의심하던 연주가 얼음처럼 굳었다.
‘폐하께서 돌아가시다니……!’
자신과 총관태감에게 명령을 내릴 정도로 의식을 회복했던 황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날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모두가 자리를 비운 사이, 태자가 끝내 황제를 시해했다는 뜻이었다.
‘이제 시간이 없어!’
연주는 죽을 각오로 상현궁을 뛰쳐나갔다.
* * *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덕교궁에서 애종 소리를 들은 황후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폐하께서, 떠나셨구나…….”
“마마…….”
“강인하신 분이셨는데. 이렇게 떠나시다니.”
“곧 연친왕께서 오실 것이옵니다. 그러니…….”
허 상궁은 곽 귀비와 태자를 향한 분노로 어금니를 악무는 황후를 달랬다. 이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정엽이 파옥을 감행하고 황궁으로 진격해 올 때까지 전국옥새를 지키는 일이었다.
황후는 결연한 표정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옥새를 가져오너라.”
“예, 마마.”
황후의 명령을 받든 허 상궁이 침통한 표정으로 전국옥새를 가져왔다.
옥새를 건네받은 황후는 보좌에서 일어나 비단 보료를 걷었다. 자단나무로 만들어진 보좌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공간이 숨어 있었다.
황후는 이중, 삼중으로 탄탄하게 잠겨 있는 잠금장치를 풀고 보좌의 밑바닥을 들어 올려 그 안에 전국옥새를 넣었다. 그런 후 보좌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다시 앉았다.
이제 태자는 중궁의 보좌에서 자신을 끌어내리고 이 보좌를 깨부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전국옥새를 차지할 수 없으리라.
“후…….”
일생일대의 격전을 직감한 황후가 소리 없이 길게 심호흡하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콰앙-!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무수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덕교궁 앞뜰을 뒤덮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덕교궁을 찾아온 목적이 분명한 탓인지, 눈 깜짝할 새에 드넓은 앞뜰을 가로지른 그들은 덕교궁의 편전부터 에워쌌다.
이윽고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태자가 적막을 가르고 모습을 드러냈다. 무장한 동궁 시위들을 대동한 채였다.
“…….”
앞을 보고 있지 않은 데도 태자가 내뿜는 살기가 느껴졌다. 마음을 가다듬은 황후가 천천히 눈을 떴다.
관음보살처럼 가늘고 온화한 눈매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서려 있었다. 태자는 저를 꼭 아둔한 중생 보듯 하는 황후가 불쾌해, 그녀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황후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간 문안 한번 없더니, 태자께서 덕교궁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전국옥새를 내어 주십시오.”
“옥새라, 옥새…….”
황후는 옥새를 왜 내게 찾느냐고 되묻는 것처럼 의뭉스럽게 답했다. 이미 속이 까맣게 타 버려 황후의 침묵을 조금도 견딜 수 없는 태자가 언성을 높였다.
“황후!”
분노한 태자의 음성이 고요하고 드넓은 궁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황후는 선황의 정궁인 자신을 향해 조금도 예의를 갖추지 않는 태자의 저급한 태도에 옅게 조소할 뿐이었다.
“기야, 너를 배 아파 낳은 사람은 곽 귀비일지 모르나 너 또한 황후인 나의 아들이니라. 한때 국본이었던 몸으로 어찌 이런 무례를 범하느냐?”
“전국옥새가 당신 손에 있는 걸 알고 왔소. 어서 내놓으시오.”
“잊었느냐? 나를 이곳에 가둔 사람은 다름 아닌 너다. 어찌 엉뚱한 사람에게 전국옥새를 찾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황후의 반응은 태자의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헛웃음을 터뜨린 태자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돌변해 곁에 서 있던 동궁 시위의 허리춤에서 장검을 빼 들었다.
“……!”
태자는 꼿꼿하게 앉아 있는 황후의 긴 목에 시퍼런 칼날을 들이댔다. 지금껏 누군가의 피를 무수히 마셨을 칼날이 냉혈동물처럼 서늘한 기운을 뿜었다.
“황궁 암암리에 당신을 따르는 충복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소. 더는 시치미 뗄 생각 마시오.”
멀쩡하던 전국옥새가 갑자기 왜 사라졌는가? 발도 없는 물건이 어찌하여 어전과 온 황궁을 샅샅이 뒤져도 나오지 않는가?
지금 자신 외에 전국옥새를 탐낼 사람은 황후뿐. 그러니 사라진 전국옥새는 필연적으로 황후의 품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없소. 곧 예법에 따라 종친과 주요 대신들이 이리로 몰려올 거요. 하니 당장 전국옥새를 내놓으시오.”
황제가 붕어했음을 알리는 애종이 울리면, 황궁에 대기 중이던 종실왕공과 각 부처의 수장인 각료들은 현재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태후, 즉 선황의 황후를 찾게 되어 있었다.
아무리 선황이 자신의 후계자를 미리 정해 두었다고 하더라도, 황태후가 그를 차기 황제로 인정하지 않으면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새 황제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명목상 절차에 불과했지만, 태자가 전국옥새를 손에 넣지 못한 이상 그의 황위 등극에 차질이 생긴 것만은 확실했다.
“어서.”
검을 움켜쥔 태자의 팔에 핏대가 섰다. 황후의 얇은 목덜미에서 금세 실금 같은 붉은 피가 돋기 시작했다.
“마마, 피가……!”
“닥쳐라!”
태자의 일갈에 황후의 곁을 지키던 허 상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각오한 황후는 여전히 침착하고 냉정했다.
“애종이 울린 지 일각조차 지나지 않았다. 한데 너는 왜 이리 흥분해 칼까지 들고 본 후를 위협하는 것이냐?”
“…….”
“폐하의 임종을 제대로 지키기는 한 게냐?”
“…….”
“네가 폐하의 임종을 지켰다면 폐하의 유고 또한 네 귀로 직접 들었을 터. 폐하께서 네게 황위를 물려주겠노라 선언하셨다면 이렇듯 미치광이처럼 날뛸 연유가 무엇이냐?”
황후는 점점 살갗을 깊이 파고드는 칼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직설을 쏟아 냈다.
반면 황후에게 정곡을 찔린 태자는 이대로 황후의 목을 베어 불완전하게나마 제위에 오른 뒤 전국옥새를 찾을 시간을 버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하늘은 더이상 그의 잔꾀를 용납하지 않았다.
“으악-!”
“아아악!”
태자가 고심하는 사이 덕교궁 대문 밖을 지키던 금군들이 비명과 함께 하나둘 쓰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소기! 검을 거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