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침전 합문 앞에 선 귀비는 초조한 얼굴로 태자를 흘깃 돌아보았다. 태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이제 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기야.”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3일이 지났습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요.”
성국공이 이끄는 중신들의 압박에 질려, 오늘 밤 기필코 황제를 떠나보내기로 작정한 태자였다. 그는 귀비의 만류에도 벌컥 합문을 열고 성큼성큼 황제 곁으로 다가갔다. 제왕의 명줄이란 도대체 얼마나 질긴 것인지, 황제의 코끝에선 여전히 미약한 숨결이 느껴졌다.
미간을 좁힌 태자는 침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귀비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황제를 죽이려는 아들의 의지를 읽은 귀비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래도 오랜 세월 폐하를 모신 정이 있으니 내게 잠시만 시간을 다오.”
“어머니.”
“잠깐이면 된단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겠다는 것인가?
태자는 이제 와 황제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로막아 봐야 쓸데없는 원망만 살 게 뻔했다.
태자는 마지못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한참 동안 멀거니 황제를 내려다보던 귀비는 느릿느릿 침상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폐하.”
“…….”
“폐하……?”
심란한 얼굴로 황제를 조심스럽게 불러보던 귀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를 외면한 채 홀로 뇌까렸다.
“아무래도 우린,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인연이었나 봅니다.”
“…….”
“알고 있었습니다. 매일 밤 내 품을 찾는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는, 선황후 한 사람뿐이었다는 걸.”
“…….”
“당신이 마음에도 없는 나를 귀비로 삼고 총애하는 척한 건, 황후와 교씨 가문의 권력이 커지는 게 싫어서였을 뿐이었다는 것도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귀비의 눈앞에 옛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처음에는 귀비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외면해도 황제의 마음은 언제나 선황후에게 가 있었다.
“나와 밤을 보내고도 꿈속에선 선황후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당신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염희, 염희…. 밤마다 당신이 부르짖는 목소리가 얼마나 절절했는지 아십니까.”
“…….”
“어떻게 하면 선황후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까. 매일 궁리하면서도 정작 상처받은 선황후를 마주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던 당신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황제는 몸을 영방궁에 두고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늘 상현궁을 맴돌았다. 지독한 집착이라고 할 만했다.
그래서 한때는 선황후가 죽으면 황제의 진심을 온전히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선황후가 죽었든 살았든, 황제의 마음은 영영 제게 오지 않았다. 그를 위해 선황후 보다 많은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아 주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런 당신이 너무도 밉고 싫었습니다.”
“…….”
“한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우면서도 애틋해 마음 저린 것 또한 사랑이란 것을요.”
이제는 패배를 인정할 때였다. 그래, 산 사람이 어떻게 죽은 사람을 이기겠는가. 회한에 잠긴 귀비가 탄식하듯 말했다.
“내 사랑을 배반한 건 당신입니다. 그러니 돌려받아야겠어요. 지금껏 당신이 내 인생을 마음대로 휘둘러 왔듯, 이번엔 내가 당신의 마지막을 이용해야겠습니다.”
“…….”
“그래도 가시는 길은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던 아들이 편히 보내 드릴 겁니다. 너무 억울해하지 말고 먼 길 조심히 가세요.”
대답 없는 황제를 상대로 넋두리를 마친 귀비가 떨리는 입술로 황제의 이마에 길게 입 맞추었다. 감은 눈 사이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귀비는 이내 도망치듯 침전을 빠져나갔다.
“……어머니?”
“아무것도 아니다. 어서 가거라.”
하얗게 질린 어머니의 얼굴을 확인하고 당황한 태자가 귀비와 황제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이제 와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태자는 이내 싸늘한 얼굴로 침전으로 향했다.
타악-!
등 뒤에서 매정하게 닫히는 문소리에 귀비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 *
그 시각, 종정사.
반 시진을 꼬박 달려 종정사에 닿은 총관태감은 정엽에게 황제의 반지와 밀명을 전달했다. 즉시 감옥에서 풀려난 정엽은 횃불이 듬성듬성 타오르는 좁고 어두운 길을 빠르게 걸으며 물었다.
“폐하께서는 무사하신가? 연왕비는 어디 있지?”
“연왕비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아마 지금쯤 폐하의 명대로 상현궁에서 성지를 찾고 계실 겁니다.”
“성지……?”
예상치 못한 단어에 정엽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정엽과 보폭을 맞추느라 진땀을 빼던 총관태감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폐하께서 연왕비에게 성지를 찾아 황후마마께 전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쯤 상현궁이나 덕교궁에 있겠군.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입궁해야겠다.”
“예, 전하.”
정엽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종정사 밖으로 나왔다.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열리자, 그 앞에서 용무군과 대기 중이던 채신과 장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정엽을 따르는 총관태감과 정엽의 손에 끼워진 황제의 반지를 차례로 확인하고는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확신했다. 장명은 연왕부에서 챙겨 온 검과 새카만 외투를 건넸다.
“용무군은 여기 모두 모여 있고, 성국부와 세자부 사병들은 황궁으로 향하는 골목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정엽은 밤의 장막처럼 펄럭이는 외투를 어깨에 두른 뒤, 장검을 허리춤에 동여매며 말했다.
“채신은 나를 따르고 장명 너는 당장 신의군을 이끌고 어전으로 가 폐하를 지켜라.”
“예, 전하!”
충직한 벗과 부하의 든든한 대답을 들은 정엽은 채신이 데려온 흑마 위로 바람처럼 날아올랐다. 그가 우뚝 솟아오르자, 위풍당당한 주군의 모습을 확인한 용무군 군사들의 눈에 번쩍 불꽃이 튀었다.
“황제 폐하의 명이다! 황궁으로 진격해 반역자 소기와 곽 귀비를 추포하라!”
“존명!”
정엽은 군사들의 우렁찬 대답에 힘입어 황궁 자미성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 나갔다. 용무군 군사들은 구름 같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날쌔게 정엽의 뒤를 따랐다.
* * *
황제를 시해한 태자는 무덤덤한 얼굴로 침전에서 걸어 나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내 아들이지만 어찌 저리 냉정할 수가 있을까.’
반쪽짜리라도 결국 황제의 아들이라서인가?
마지막으로 본 황제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입술을 꽉 깨문 귀비가 아들을 외면한 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 끝났느냐.”
“예.”
“그럼 다음 절차를 진행하자꾸나.”
귀비가 말하는 다음 절차란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애종(哀鐘)을 울리고, 전국옥새를 찾아와 새 황제의 등극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자는 귀비의 참견이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리로 오기 전에 미리 사람을 보내 놨으니 어머니께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애종은 앞으로 반 시진 뒤에 알아서 울릴 것이고, 전국옥새는 곧 이리로 옮겨질 겁니다.”
“그런…….”
태자의 철두철미함에 혀를 내두르던 귀비가 더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 황제의 시대도, 황제의 총비였던 자신의 시대도 모두 저물지 않았는가.
아들의 처사가 몰인정하다고 느껴질지언정, 그가 세상에 황제의 죽음을 공표하기도 전에 전국옥새부터 찾는 이유는 분명했다.
황후를 덕교궁에 연금시키긴 했지만, 궁중에는 아직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충직하고 대담한 몇몇이 황후를 위해 전국옥새를 빼돌리고 연친왕을 황제로 만들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 영명한 군주이십니다.”
아들을 향해 억지 미소를 지은 귀비가 그의 어깨를 천천히 쓸었다. 하지만 태자는 자랑스러운 제 어깨에 올라앉은 귀비의 손길을 불결한 물건처럼 떼어 내고는 차갑게 대꾸했다.
“별말씀을요.”
“기야…….”
세상의 어떤 칼날이 이보다 더 날카로울까.
저를 돌아보는 아들의 벼린 시선에 등골이 오싹했다. 귀비는 자꾸만 냉담해지는 아들의 태도가 마음에 걸려 그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하던 순간, 침전 복도 끝에서부터 재게 발을 놀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황제가 숨을 거두는 것보다 이 순간을 더 기다려왔던 태자가 희열에 찬 얼굴로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옥새를 가지고 왔느냐?”
그런데 전국옥새를 가져오라고 보낸 태감의 손은 텅 비어 있었다. 태자의 얼굴이 금세 험상궂게 변했다.
“어찌하여 빈손이냐?”
“저, 그것이, 저…….”
헐레벌떡 뛰어오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던 태감은 우선 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태자는 여차하면 제 목을 뎅겅 자를 것처럼 살벌한 기운을 풍겼다.
말까지 더듬으며 한참 어쩔 줄 모르던 태감은 벌벌 떨다 넙죽 엎드렸다.
“전국옥새가 사라졌습니다. 전하, 소인을 죽여 주시옵소서!”
“뭐라?!”
뜻밖의 비보를 접한 태자가 벼락처럼 노성을 질렀다. 당황한 귀비는 태감을 나무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울먹였다.
“일이 틀어졌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
태자는 발을 구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어쩌긴 뭘 어쩝니까!? 옥새를 찾아야지요!”
“기야……!”
“너는 어서 궁인들을 풀어 어전과 자미성 전체를 샅샅이 뒤져라! 지금 당장 전국옥새를 찾아와!”
광분한 태자는 바닥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움직일 줄 모르는 태감을 죽일 듯이 걷어차고는 어전 밖으로 뛰쳐나갔다.
홀로 남은 귀비는 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