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49화 (149/161)

149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귀비는 의심 없이 태자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성국공이 어제 조정에 들어 너를 곤란하게 했다고 들었다. 종정사에 배치한 동궁 시위들을 모두 바꿔 달라고 했다면서?”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조회에 나와 생떼를 쓰더군요. 뭐 다 형님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다 부질없는 짓일 테지만요.”

“하기야. 폐하께서 붕어하시는대로 우리 세상이 열릴 것인데, 연친왕이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뭘 할 수 있겠느냐. 차라리 폐하의 붕어를 핑계로 파옥이라도 해 주면 우리로선 고마운 일이지.”

“그렇습니다.”

태자는 무심하게 대꾸하면서도 정엽을 향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아들을 보며 마주 웃던 귀비가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침상이 너무 뜨거워 그런지 목이 타는구나. 거기 있는 물 좀 다오.”

태자는 아무 생각 없이 탁상 위의 찻잔에 차를 따라 귀비에게 건넸다. 그런데 문득 버선 밑이 축축하게 젖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천천히 바닥을 내려다보니 바닥 한가운데가 둥그렇게 젖어 있었다. 좀 전에 연주가 침상의 화항을 끄느라 급히 대야의 물을 옮기면서 흘린 물이 태자의 발을 적신 것이었다.

‘물이 여기 왜………?’

급격히 표정이 굳은 태자는 차를 다 마시고 무어라 말하려는 귀비를 제지하듯 손을 들어 보였다.

“왜 그러느냐?”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태자의 말에 깜짝 놀라 주변을 살핀 귀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말이 되느냐, 네가 착각한 거겠지!”

태자는 귀비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몸을 숨길 수 있을 법한 장소를 찾아보던 태자는 거대한 비단 병풍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태자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눈치챈 연주는 숨이 멎을 만큼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병풍 뒤에 주저앉아 몸을 작게 웅크렸다.

그렇게 태자가 병풍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태자 전하, 성국공이 중신들과 조당으로 몰려와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당장이라도 병풍을 걷고 숨어 있던 연주를 끌어낼 것 같던 태자는 갑자기 조정에서 날아든 비보에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문밖을 향해 명령했다.

“본 자는 폐하의 곁을 지켜야 하니 할 말이 있으면 상주문을 올리라고 전해라!”

“하, 하오나……. 전하께서 당장 나오시지 않으면 중신들이 모두 어전으로 집결해 폐하를 뵈러 오겠다고 엄포를 놓는지라……!”

“하아…….”

긴 한숨을 내쉰 태자가 갑자기 밀려드는 두통에 체머리를 떨었다. 처음부터 성국공이 무슨 말을 하든 물러서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시간은 내 편이야.’

그토록 조정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주어야지. 그러다 황제가 죽고 나면 제까짓 게 뭘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든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 애쓰던 태자가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가마를 준비해라!”

태자는 성난 걸음으로 황제의 침전을 나섰다.

그렇게 아들이 떠나고, 홀로 침전에 남은 귀비가 불안한 눈으로 침전 주변을 살폈다.

‘정말 태자의 말대로 정말 여기에 염탐꾼이 숨어든 걸까? 그렇다고 침전 안으로 궁인들을 불러들이면 기껏 숨겨 온 폐하의 용태가…….’

고민에 거듭을 거듭하던 귀비가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다음 순간.

“죽여라! 죽여!”

갑자기 황제가 눈을 까뒤집으며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깜짝 놀란 귀비가 본능적으로 침상에서 멀어졌다.

‘설마 황제가 깨어난 건가?’

간신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귀비가 슬금슬금 황제의 결으로 다가와 타이르듯 말했다.

“대체 왜 이러십니까. 폐하. 신첩 곽 귀비이옵니다!”

“……죽여라!”

퍼억-!

“꺄악!”

끊임없이 죽이라고 소리치며 침상에서 버둥거리는 황제의 팔에 머리를 얻어맞은 귀비가 바닥에 쓰러졌다. 어찌나 정신이 아찔한지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간 팔은 고사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던 황제가 갑자기 무슨 힘이 솟아서 이런 행동을 한단 말인가?

황제가 무의식중으로 내뿜는 광기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귀비가 소리쳤다.

“폐하께서 아무리 소리치셔도 우리 모자를 죽이실 순 없을 겁니다!”

그렇게 일갈하면서도 울분이 가시지 않은 귀비가 황제를 죽일 듯 노려보며 씩씩댔다, 하지만 황제의 발작은 계속됐고, 결국 귀비는 도망치듯 침전을 빠져나갔다.

* * *

곽 귀비는 그 뒤로 종일 황제의 침전을 찾지 않았다. 태자 역시 성국공을 비롯한 중신들에게 붙잡혀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지 밤늦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연주는 태자와 귀비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다시 어전으로 돌아온 총관태감과 합세해 황제를 간호했다. 그녀는 솜이불을 모두 걷고 황제의 얼굴과 손, 발을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꼼꼼히 닦았다. 또 때마다 연하게 쑨 미음을 떠먹이며 황제가 기력을 찾도록 도왔다.

하지만 황제는 도사가 말한 하룻밤이 지나고도 눈을 뜨지 못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초조해진 연주는 먼동이 터 오는 창가와 황제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말했다.

“방 공공, 이대로는 안 되겠네. 침전에 얼음을 들일 방법이 없겠는가?”

“얼음이요?”

“그렇네. 폐하를 얼음 욕조로 모실 수 없다면, 화항에 얼음을 넣어 침상 온도를 더 낮추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일세.”

임기응변에 불과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일단 뭐라도 해 보는 것이 먼저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총관태감이 이내 결연한 얼굴로 물었다.

“얼음은 얼마나 구해 오면 되겠사옵니까?”

“어제 화항을 보니 넣을 수 있는 얼음의 양은 많지 않을 것 같네. 얼음이 녹아 화항이 젖으면 그것대로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놋대야 하나를 채울 정도면 충분할 걸세.”

“알겠사옵니다.”

황제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연주와 함께 마음을 졸이던 총관태감은 그날 오후 은밀히 얼음을 구해와 화항을 가득 채웠다. 연주는 곽 귀비 모자의 부재를 틈타 끊임없이 황제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 주며 열을 떨어뜨리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나자, 두 사람의 노고가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방 공공, 어제보다 폐하의 안색이 조금 나아지신 것 같지 않은가?”

“정말 그렇습니다. 어제만 해도 폐하의 용안이 거무튀튀했는데 오늘은 희미하게나마 혈색이 도는 듯합니다.”

얼음으로 침상 온도를 낮춘 덕분인지, 황제는 조금씩 차도를 보였다. 이날 저녁 황제의 침전을 찾은 태자와 귀비는 말없이 황제를 들여다보고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황제에게 해독제를 먹인 지 3일째 되던 날 밤.

“쿨럭!”

“……!”

황제의 변화를 감지한 듯 온종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태자와 귀비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연주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연신 마른기침을 뱉던 황제는 연주의 목소리에 반응해 힘겹게 눈을 떴다.

“폐하, 정신이 드시옵니까?”

황제의 거친 숨소리를 확인하고 그와 시선을 맞춘 연주가 다급히 물었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물을 달라고 요구하듯 느릿느릿 탁자 위에 놓인 주전자를 가리켰다.

연주는 곧장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사이 총관태감이 황제를 일으켜 앉히고 그가 편히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도왔다.

“천천히 드십시오.”

연주는 메말라 갈라진 황제의 입술에 물 잔을 대어 주었다. 황제는 기갈난 사람처럼 다급히 목을 축인 뒤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물이 반이나 줄어든 잔을 확인한 연주는 손수건으로 황제의 젖은 입가를 닦아 냈다. 그러자 가쁜 숨을 내쉬던 황제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연주의 손을 꼭 그러쥐고 입을 달싹였다.

“아가. 이리……, 가까이… 오너라….”

황제는 연주가 정엽과 이별하기 전처럼 살가운 호칭으로 그녀를 찾았다. 새삼 울컥한 연주가 최대한 침착하게 황제의 부름에 응했다.

“예, 폐하. 말씀하십시오.”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였던 순간에도 주변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던 황제는 숨을 쌕쌕 몰아쉬며 연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상현궁에……, 짐이 오래전 써 두었던……, 성지가… 있다.”

“……성지요?”

“지금 당장……, 성지를 찾아……, 황후에게 가거라…. 가서… 그 성지를… 만천하에… 밝혀라.”

끊어질 듯 말 듯 위태한 목소리로 연주에게 제 뜻을 전한 황제가 지친 듯 크게 헐떡였다. 아직 완전히 몸이 회복된 것이 아니니 잠깐의 대화마저도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알겠사옵니다.”

연주는 황제에게 약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직한 화답을 들은 황제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뜨곤 목을 쥐어짜듯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유신아…….”

“예, 폐하.”

“너는…, 종정사로 가라……. 가서… 정엽을 풀어주고……, 태자와 귀비…, 그 두 연놈을……! 쿨럭!”

“폐, 폐하!”

“황제 시해죄로… 섬멸하라…, 전해라……!”

그간 쌓인 분노를 표출하듯 두 눈을 부릅뜬 황제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 총관태감에게 건넸다. 황제의 반지는 총관태감의 말이 곧 황제의 뜻임을 증명하는 상징물이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연주는 이로써 정엽이 무사히 종정사에서 풀려나 태자를 제압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러나 황제는 연주의 안일함을 일깨우듯 느리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움직여라……!”

“예, 폐하.”

황제를 침상 위에 바로 눕힌 연주와 총관태감은 그를 향해 나란히 예를 갖추고 침전을 떠났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눈에 담던 황제는 금세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연주와 총관태감이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흩어진 사이, 황제 홀로 남은 침전에 태자와 곽 귀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꼭 오늘이어야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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