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연왕부 어딘가에서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할 연주가 뜬금없이 황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인 어전에 잠입해 있다니. 아무리 외숙의 결정이 옳은 것이라 해도 정엽은 결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연주의 소식을 전하자마자 눈에 띄게 동요하는 정엽을 침착하게 주시하던 성국공이 입을 열었다.
“어젯밤 전하의 소식을 듣고 마음 졸이던 세자와 군주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거병에 합의했고, 제가 군주에게 어전에 잠입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대체 왜!”
“태자의 손에 폐하가 있는데, 거병 전에 폐하의 용태를 살피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성국공의 말로 미루어 연주가 자신이 없는 틈을 타 세자부로 돌아갔고, 투옥 소식이 전해지자 저를 구하기 위해 다시 황궁 안으로 잠입했음을 알아챈 정엽이 언성을 높였다.
“꼭 그 사람이 아니어도 되는 일 아닙니까. 왜 하필 그 사람을 사지로 떠민 겁니까!”
“제가 떠민 것이 아니라 군주가 스스로 결정한 일입니다.”
“외숙!”
“오랜 세월 전하께서 황위에 욕심내시는 날을 기다려 왔습니다. 전하께서 황실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매번 전장을 떠도는 걸 알면서도, 폐하께서 건재하신 이상 부자가 서로 부딪쳐서 좋을 게 없으니 그냥 두었을 뿐이지요.”
“…….”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전하의 손에 모두의 목숨이 달려 있지요. 아직 군주를 마음에 두고 계신 거라면, 황후마마를 비롯한 가족들을 진정으로 위하신다면 이제 방황을 끝내셔야 합니다.”
정엽은 반격할 틈을 주지 않는 성국공의 직설 앞에서 입을 꾹 다물었다.
‘정말 모두가 내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고 있단 말인가.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고집스럽게 성국공의 시선을 외면하던 정엽은 문득 제게 반드시 황제가 되어야 한다던 연주의 말을 떠올렸다.
태어나 단 한 번도 황제가 되기를 꿈꾸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젠 정말 황위에 미련이 없었다.
천하는 고사하고 연주 한 사람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버둥거리기에도 벅찬 생이었다. 저마저 부황처럼 권력에 미쳐 자신의 핏줄을 외면하는 괴물이 되긴 싫었다.
하지만 성국공은 그런 정엽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이 싸움에서 지면 이 일에 가담한 우리는 만고의 역적이란 이름 아래 두고두고 손가락질당하게 될 것입니다.”
“…….”
“그러니 설령 일이 잘못되더라도 전하께서는 반드시 살아남아 황제가 되십시오.”
한 걸음, 또 한 걸음.
숨소리 하나까지 선명하게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온 성국공이 장성한 조카의 어깨를 잡고 토닥였다. 신하로서가 아니라 외숙으로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네 어머니께서 너를 위해 남겨 둔 선물을 기억하느냐?”
“……예.”
선황후는 자신의 아들이 사천감에서 내린 예언 때문에 황제에게 핍박받기 시작하자 오라비인 성국공을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성국부에 거대한 연못을 파게 했다.
그런 뒤 꾸준히 자금을 모아 백만 대군를 양성하고 그 대군을 50년은 족히 유지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금괴를 연못 아래 매장했다. 오로지 정엽을 위해서.
지금 성국공이 정엽에게 이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제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때가 왔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태자에게 위협당하면서도 먼 미래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지던 것들이 서서히 피부로 와닿았다.
‘아, 이제는 피할 수 없구나.’
생각보다 크게 충격을 받은 듯한 정엽을 지켜보던 성국공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태자는 아마 폐하를 죽이려 할 겁니다. 승설군주가 그 전에 폐하를 깨워 전하를 감옥에서 방면하라는 칙령을 받아 내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면 성국부와 평해왕부의 군사들을 동원해 곧장 파옥을 감행할 겁니다.”
“…….”
“전하께서는 반드시 황궁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렇게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해 두세요.”
정엽은 어느 쪽이든 연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 속이 탔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역시 황궁으로 연주를 구하러 달려가는 것뿐이었다.
정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아침, 밤새 황제 곁을 지키던 태자가 곽 귀비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연주는 총관태감에게 이 소식을 듣자마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대야와 수건, 옥빗을 가지고 황제의 침전으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침상으로 다가가 보니, 황제는 새카만 얼굴로 두꺼운 솜이불을 덮은 채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게 맞겠지?’
주변을 휘 둘러보며 침전 문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총관태감의 그림자를 확인한 연주가 조심스럽게 황제의 이마를 짚었다.
예상대로 황제의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황제의 명을 재촉하기 위해 일부러 두꺼운 솜이불을 덮게 한 덕분이었다.
‘어떻게 이런 짓을……!’
연주는 잠시 본연의 임무를 잊고 곽 귀비와 태자의 만행에 분개했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자, 지금 황제의 상태로는 일부러 쌀알 정도의 크기로 만든 한동향조차 삼키기 어려울 거 같단 생각이 스쳤다.
‘어찌하면 좋을까.’
황제의 낯빛을 살피며 고민하던 연주의 눈에 좀 전에 들고 들어온 대야 속 물이 비쳤다. 다음 순간, 묘안을 떠올린 연주가 소매 속에서 해독제가 담긴 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 대야에 담갔다.
작은 유리병에 점차 물이 차오르고, 물과 섞인 한동향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연주는 입구를 막은 병을 쥐고 세게 흔들었다.
그러곤 황제의 머리를 들어 제 무릎 위에 올린 뒤, 그의 입을 벌려 해독제를 천천히 부었다. 그간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했는지, 황제는 물과 섞인 해독제를 본능적으로 받아마셨다.
“……다행이다.”
황제가 스스로 물을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사실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연주는 다시 황제를 침상에 바로 눕히고 이불을 정리했다.
그런데 아무리 황제의 신열이 높고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있는 상태라지만 이불 밑이 이상하리만큼 뜨끈뜨끈했다.
“……설마!”
연주는 몸을 납작 엎드리고 침상을 데우기 위해 숯을 넣는 화항(火炕)의 입구를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항 안에서는 시뻘겋게 타오르는 숯덩이가 무섭도록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오석산 중독을 치료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몸의 열을 떨어뜨리는 것. 하지만 태자와 곽 귀비는 정반대의 방법을 쓰고 있었다.
‘당장 이 불부터 꺼야 해!’
다급히 몸을 일으킨 연주는 가져온 대야의 물을 재빨리 화항 안에 쏟아 불길을 잡았다.
태자가 하루라도 빨리 황제를 죽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이상,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황제가 지금껏 버텨 온 것은 다행이지만, 이래서야 모두의 뜻대로 황제를 구할 수 있을까 싶어 정신이 아득했다.
그 순간, 갑자기 침전 밖에서 낯선 인기척이 들려왔다.
“태자 전하, 귀비 마마 오셨사옵니까.”
연주는 저를 위해 일부러 방문객의 정체를 알리는 총관태감의 목소리를 듣고는 재빨리 바닥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사이 문밖의 귀비는 예의 화사한 목소리로 총관태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방 공공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내 자네가 노환으로 고생한다는 얘길 듣고 푹 쉬게 하라고 명해 두었거늘.”
“두 분이 베풀어 주신 은혜 덕에 충분히 쉬었사옵니다. 소인이 박복하여 폐하를 모실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루라도 더 폐하의 곁을 지켜드려야지요.”
“방 공공의 충심이 대단하군.”
그간 일부러 호의를 베푸는 척 하며 총관태감을 황제 곁에서 떨어뜨려 놓았던 귀비가 난처한 듯 태자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자 모비의 눈길을 받은 태자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를 향한 네 충심은 알겠다마는, 지금은 내가 폐하의 곁을 지켜드리며 효를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 좀 더 쉬다 나오거라.”
이를 어쩐다. 침전 안의 상황을 알 길이 없는 총관태감이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여기서 더 고집을 부려 봐야 태자의 경계만 살 게 분명했다.
“미천한 소인을 이리 생각해 주시다니 감읍하옵니다. 그럼 소인은 먼저 물러나겠나이다.”
문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총관태감이 태자 앞에 납작 엎드려 예를 갖추고 뒷걸음질 쳐 어전을 떠났다. 총관태감이 완전히 어전 밖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귀비와 태자가 손수 침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귀비는 어제보다 어두워진 황제의 낯빛을 확인하고는 그의 머리맡에 앉아 작게 한숨지었다.
“다행히 어제보다 상태가 나빠지신 듯한데, 폐하께서도 참 끈질기시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래도 화항에 불을 때고 솜이불까지 덮어 드렸으니 버텨 봐야 얼마나 버티시겠느냐. 거기다 물 한 모금 드시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앞으로 길어야 사흘이겠지.”
“사흘이라…….”
어린아이처럼 손으로 날짜를 꼽아 보며 황제가 죽을 날을 가늠한 태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반면, 침전 한쪽 벽면에 늘어서 있는 비단 병풍 뒤에 몸을 숨긴 연주는 곽 귀비 모자의 대화를 듣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황제의 신열을 높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곡기까지 끊었다니!’
이러다 어렵게 먹인 해독제가 약효를 발휘하기도 전에 황제가 절명해 버리는 건 아닐까 불안이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