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황후가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전에 잠입하다니. 그건 왜?”
“성국부와 세자부가 합세해 거병하기로 결의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황제 폐하의 용태를 살피고 약을 쓸지 말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차라리 황제가 태자의 손에 죽어 거병의 명분이 확실히 굳어지길 바라시는 거로군. 성국공의 속내를 알아차린 황후가 한숨지었다.
“역시 오라버니께선 냉철한 분이시구나.”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슬픈 것인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던 황후가 가만히 연주를 바라보았다.
“황후마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연주의 부름에 황급히 고개를 저은 황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그 차림새로는 황궁 안에서 움직이기 어려울 테니 궁녀 옷을 한 벌 내어 주마. 덕교궁을 나서는 대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갈아입거라.”
“예, 마마.”
“또 어전에 잠입하는 건 총관태감을 통하면 될 것 같구나. 내가 그자에게 연락을 넣어 놓을 테니 후궁 북쪽에 있는 하계각으로 가거라.”
하계각이라면 예전에 시양공주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후궁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가 스치듯 본 적이 있었다. 북쪽 우물인 하계정이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총관태감이라 하심은 폐하를 모시는 방 공공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하지만 황제의 오랜 수족인 총관태감이 황후의 사람이었다니…….
두 사람의 인연이 깊은 줄은 미처 몰랐던 연주가 재차 확인하듯 되물었다.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그자다. 그간 어전에서 내 눈과 귀 노릇을 했지. 폐하와 선황후를 향한 충심이 깊은 자이니 이번에도 반드시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그럼 저는 하계각에서 방 공공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네가 묻는 게 많아지는 것을 보니 이 상황에 무슨 수로 총관태감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모양이구나. 염려 말아라. 그간 내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총관태감과 연락해 온 방법이 있으니.”
황후의 어조는 확신에 차 있었다. 황후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한시름 덜은 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두 눈에 이채를 띤 황후가 말했다.
“어차피 태자는 절대로 황제가 될 수 없다. 그러니 너는 황제 폐하와 정엽을 구하는 데만 집중하거라.”
“……태자가 절대로 황제가 될 수 없을 거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자가 침전에 들이닥치기 직전, 황제 폐하께서 연친왕에게 전국옥새를 가져오라고 명하셨다. 그걸 안 태자가 연친왕을 침전에서 끌어내고 폐하께 다시 단약을 먹였지. 그래서 총관태감이 폐하의 뜻을 받들기 위해 내게 전국옥새를 가져왔다.”
전국옥새는 최초로 대륙을 통일한 황제가 화씨벽을 깎아 만든 옥새를 뜻했다. 이것은 진정한 황제의 상징물이기 때문에, 오로지 선대 황제가 다음 대 황제에게 제위를 물려줄 때만 사용되었다.
따라서 전국옥새를 손에 넣지 못한 자는 그게 누구든 대화국의 황제로 인정받을 수 없었으며, 설령 부정한 방법으로 옥좌를 차지한다고 해도 스스로를 황제라 칭할 수 없었다.
“곽 귀비나 태자가 옥새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채기 전에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하는 거군요.”
“그래. 옥새는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킬 것이다. 그러니 폐하와 연친왕을 부탁하마.”
정말로 내 손에 모든 것이 달렸구나.
파도처럼 밀려드는 부담감에 연주의 얼굴이 점점 흙빛으로 물들었다. 이 순간 연주가 누구보다 힘겨울 거란 사실을 잘 아는 황후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네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워 미안하구나. 하지만 폐하께서 오석산에 중독된 사실을 알아낸 것도, 도사를 이용해 해독제를 손에 넣은 것도 모두 네가 해낸 일 아니더냐. 연친왕과 나, 그리고 평해왕부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힘을 내다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섣부른 위로 대신 최선의 해답을 되짚어준 황후가 허 상궁을 향해 명령했다,
“어서 군주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너라.”
“예, 마마.”
잠시 후, 허 상궁이 여분의 옷을 가지고 돌아왔다. 허 상궁은 연주가 가져온 찬합의 내용물을 모두 비우고, 그 안에 갈아입을 옷을 숨겨 연주에게 내밀었다.
“고맙네.”
찬합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은 연주가 훗날을 기약하듯 예를 갖추었다.
“곧 다시 뵙겠습니다.”
“어서 가거라.”
촉촉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 황후가 화답했다. 그렇게 성국공 부인과 함께 덕교궁을 빠져나온 연주가 앞서 나가는 성국공 부인에게 낮게 속삭였다.
“합하께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짧은 대화를 끝으로 홀로 남겨진 연주는 황궁을 활보하는 궁인들의 시선을 피해 후원으로 숨어들었다. 그녀는 겨울이면 아무도 찾지 않는 석가산 동굴로 들어가서 몰래 옷을 갈아입었다.
이윽고 수많은 궁녀 중 하나로 변신한 연주가 하계각으로 숨어들었다. 하계각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선지 솜을 누빈 겨울옷을 입고 있는데도 금세 한기가 들고 손끝이 시렸다.
“왜 이렇게 춥지…….”
자신이 하계각에 숨어 있다는 걸 들킬까 봐 촛불 하나 댕기지 못하고 전각 구석에 웅크려 앉은 연주가 제 몸을 감싸 안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그렇게 얼마나 추위에 발을 굴렀을까.
끼이익-.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자 하계각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 공공……?”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경계하듯 주변을 살핀 연주가 추위로 굳은 몸을 일으켰다. 이내 굳게 닫혀있던 하계각 합문이 열리고, 황제의 총관태감 방유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하신 분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 송구합니다.”
“아닐세. 이제라도 와 주어 고맙네.”
뼛속까지 스민 한기에 파르르 떨리는 손을 가지런히 포갠 연주가 화답했다.
“군주께서 폐하께 접근할 수 있도록 소세궁녀를 잠시 궁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하나 지금은 태자전하께서 폐하의 곁을 지키고 있어 침전에 들기 어려우니, 우선은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어전 내 소불당(小佛堂)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연주는 총관태감을 따라 하계각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태감이 건네는 등불을 들고 걸으며 오늘따라 머리 위에서 밝게 빛나는 별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향주의 안가에서 정엽과 함께 보낸 칠석이 떠올랐다. 반짝이던 밤하늘. 작은 연못. 그리고 제 옆에 앉아 조심스레 저를 향한 마음을 내비치던 정엽의 표정과 눈빛이 가슴속을 헤집었다.
‘정엽을 위해서라도 마음 굳게 먹어야 해.’
연주는 이 순간 차디찬 종정사 감옥에 갇혀있을 정엽을 생각했다.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매 순간 암살의 위협을 받고 있을 정엽에 비하면 티끌처럼 가벼울 게 분명했다.
‘할 수 있어. 해 내야 해.’
스스로 다독인 연주는 한참을 걸어 황제가 있는 어전에 숨어들었다.
* * *
그 시각, 종정사.
“모두 밖으로 나와라!”
거대한 지하 감옥에 그동안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사지가 단단히 결박된 정엽은 인상을 찌푸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뭘 꾸물거려. 당장 나오라니까!”
오랜 시간 팔다리가 결박되어 있던 데다 눈까지 새카만 천으로 가려져 있어 귀가 더욱 예민해진 탓인지 사내의 목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위들이 감옥에서 물러나는 건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혹시 살수로 위장한 자들은 아닐까.
감옥 앞을 지키고 있던 동궁 시위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낀 정엽이 낯선 사내들의 인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데 이내 감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의 기척은 살수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둔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을 해하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뭐지?’
정엽이 자문하는 순간, 내내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이 풀렸다.
며칠간 빛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던 정엽은 감옥을 밝히는 횃불에도 눈이 시려 미간을 좁혔다. 한껏 가늘어진 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외숙?”
“볼수록 가관이군요. 어서 쓸데없는 형구를 모두 걷어라.”
조금 전, 채신 남매와의 약속대로 조정에 나와 종정사에서 동궁의 시위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성국공이 뒤따라온 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그러자 이름 모를 군사 넷이 정엽을 구속하던 치렁치렁한 형구들을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쇠사슬로 만든 목줄, 발목을 넓게 벌려 채운 족쇄, 허리를 바위만 한 쇳덩이에 연결한 무쇠 요대가 줄줄이 정엽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마지막으로 가장 불편했던 수갑까지 풀리고 나자, 저린 손목을 감싸 쥐고 감옥 주변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정엽은 차디찬 감옥 한구석에 마련된 낡은 평상에 앉았다.
그사이 군사들은 감옥의 문을 걸어 잠그고 쥐새끼들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정엽과 마주 선 성국공이 물었다. 족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엽은 괜찮다는 말 대신 바깥을 살피며 말했다.
“방금 나간 저들은 누구입니까?”
“유친왕께서 직접 천거한 종정사 군관들입니다. 그나저나 좀 전의 모습을 보니 태자는 어지간히 전하가 밉고 두려운 모양이군요.”
“원래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는 녀석입니다. 그런 놈이 어쩌자고 이런 엄청난 짓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 황위 때문 아니겠습니까.”
황위라. 어쩐지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를 곱씹던 정엽이 조소했다.
“그 자리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정엽이 한숨처럼 뇌까리자 성국공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남들은 혈육의 정을 끊어서라도 황위를 얻고자 했다.
가진 것이 많아 욕심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아비가 아들을 망쳐 놓은 것인가.
저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성국공의 눈빛을 애써 외면한 정엽은 딴소리를 늘어놓기 바빴다.
“부황께선 좀 어떠십니까. 또 내가 군주를 연왕부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는데, 군주는 무사합니까?”
“폐하께서는 사경을 헤매고 계십니다. 그리고 군주께선 그런 폐하를 구하기 위해 어전에 잠입해 있지요.”
“지금, 누가 어디…….”
당황한 정엽이 몇 마디 뱉지 못하고 외숙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