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46화 (146/161)

146화.

더 중요한 변수라? 생각지 못한 성국공의 이야기에 연주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폐하의 용태입니다. 두 사람 모두 알다시피 벌써 폐하께서 병석에 누우신 지도 반년이 넘었지요. 게다가 며칠 전 조회에선 갑자기 쓰러지시기까지 하셨고요.”

성국공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깨달은 채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폐하께 해독제를 올리는 게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지금 두 사람은 태자가 집안일이라는 핑계로 대신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이유를 단지 연친왕 전하를 암살하기 위한 것으로만 이해한 듯하군요.”

태자의 목적이 황후와 연친왕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면 또 뭐란 말인가? 성국공의 말을 들은 채신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태자가 가장 해치우고 싶을 사람은 황후마마나 연친왕 전하가 아닙니다. 황제 폐하시지요. 폐하께서 붕어하시면 황위는 자연스럽게 태자의 몫이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태자가 아무리 악독해도 설마하니 누구보다 저를 아껴 준 아버지를 살해하는 패륜을 저지를 거라고까진 생각하지 못한 채신과 연주가 경악했다.

그러나 과거 향산에서 황제에 관해 얘기하던 태자의 말과 행동을 되짚어 보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두 사람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던 성국공이 노련미 넘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 태자는 제 앞길에 걸림돌이 될 만한 사람들을 가둬 둔 것뿐입니다. 한 사람은 처소인 덕교궁에,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종정사 감옥에 말이지요.”

“…….”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폐하의 용태를 확인하고 해독제를 사용할지 말지 판단하는 겁니다.”

설마 이대로 황제를 포기하려는 것인가?

성국공의 제안에 당황한 연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반면 채신은 좀 더 차분한 반응이었다.

“합하의 뜻을 이해했습니다.”

“폐하께서 어떤 상태에 계시든 황후마마와 연친왕 전하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만약 폐하께서 이미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계신다면 우리는 파옥과 거병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어전은 태자와 곽 귀비가 장악하여 쉽게 출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군주가 궁인으로 위장해 어전에 잠입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단순한 제안이나 부탁이 아니었다. 성국공이 차분한 얼굴로 연주를 돌아보았다.

“……제가 말입니까?”

갑자기 입궁이라니.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하겠노라고 굳게 마음먹고 온 연주지만 선뜻 결정하기 어려웠다.

도사의 도움으로 한동향을 완성하기는 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황제의 용태를 살피는 일이 아닌가? 차라리 황후의 사람인 호 태의를 이용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민하는 연주와 달리 성국공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다름 아닌 폐하의 용태를 확인하고 해독제를 올리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절대 재물로 매수한 자에게 맡길 수 없지요.”

“…….”

“게다가 지금 군주는 대외적으로 행방불명 상태이지 않습니까. 궁중에서 군주는 이미 불귀의 객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군주가 우리 중 황궁 안에서 가장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누군가는 반드시 입궁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다 일이 잘못되면 내 누이는 어찌 되는가.

눈앞이 캄캄해진 채신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제 누이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건 너무 위험…….”

“세자, 우리는 이미 거병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여기 있는 우리 셋과 황후마마뿐이고, 만약 이번 일이 실패한다면 군주가 입궁을 하든 안 하든 모두 죽습니다.”

성국공이 희미하게 미소 띤 얼굴로 비정한 말들을 쏟아냈다. 지금은 한가하게 내 가족의 안위를 고려하며 일을 진행할 상황이 아니란 뜻이었다.

‘과연 이 나라의 황제를 갈아치울 수 있게 만든 일등 공신답구나.’

성국공의 서늘한 태도에 기가 꺾인 채신이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고민을 끝낸 연주가 무릎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말했다.

“입궁하겠습니다.”

“그럼 나는 두 사람의 말대로 조정의 판도를 뒤흔들어 보겠습니다. 태자가 이번 일을 어찌 생각할지 나도 궁금하군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합하.”

“그런 말은 필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배를 탄 사람들이니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성국공이 채신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러고는 연주에게 다가와 그녀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말했다.

“군주는 내일 아침 이 사람의 부인과 함께 입궁해 황후마마를 뵙고 우리 뜻을 전해 주세요. 또 황후마마께 도움을 청하면 어전에 잠입할 방도를 일러 주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결연하게 대답한 연주가 긴장으로 흥건히 젖어 가는 손을 소맷부리 사이로 감췄다.

* * *

그날 밤, 연주는 계획대로 성국부에 남아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성국부 시녀로 위장해 성국공 부인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연주는 긴장을 숨기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차창만 바라보았다.

“군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정 많고 인자하기로 소문난 성국공 부인이 연주의 손등을 감싸 쥐고 토닥였다. 연주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님,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마차가 황궁 북문에 닿자, 연주는 성국공 부인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그런 뒤 미리 준비해 온 찬합을 들고 성국공 부인 뒤에 붙어 서서 고개를 떨궜다.

두 사람은 덕교궁을 향해 종종걸음쳤다. 먼발치에서 보니 덕교궁 대문 앞에는 스무 명 남짓한 태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무리 황후께서 덕교궁에 갇히신 처지라지만 이렇게 많은 태감을 세워 두다니…….’

연주는 태자가 황후를 연금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반발이 무척이나 거셌던 걸 거라 짐작했다. 그게 다 누구를 위해서겠는가.

어린 황자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태자와 맞설 게 아니라 거래를 해야 했다. 지금 황후는 오로지 정엽을 위해서 그녀가 낳은 아이들과 저 자신의 명운을 걸고 태자와 맞서고 있었다.

‘황후마마를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절대로 실패해선 안 돼.’

성국공 부인과 눈빛을 주고받은 연주는 행여 일을 그르치게 될까 봐 태감들의 눈을 피해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덕교궁 대문 앞에 다다르자, 예상대로 그곳을 지키고 있던 태감이 앞길을 막아섰다.

“황후마마께서는 지금 연금 중이라 아무도 만날 수 없습니다.”

성국공 부인은 권위를 내세우는 대신 사정하듯 말했다.

“황실의 법도가 그런 것은 나도 알지만, 황후마마가 걱정되어 온 길이니 부디 인정을 베풀어 주시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성국공 부인.”

“딱 일 각이면 되네.”

대문 앞에서 한창 실랑이를 벌이던 성국공 부인이 주변을 살핀 뒤 태감의 손아귀에 묵직한 비단 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흠, 흠. 이거 나 원…….”

생각 이상의 무게감을 감지한 태감은 연신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슬며시 주머니 입구를 비틀어 보니 그 안에는 아기 주먹만 한 황금 덩어리가 가득했다.

“아니, 웬 금을 이렇게 많이……!”

번쩍이는 광채에 눈이 휘둥그레진 태감이 놀란 얼굴로 성국공 부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국공 부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자애롭게 웃으며 태감을 구슬렸다.

“자네들이 이렇듯 덕교궁 앞을 지키고 있는 건 모두 황후마마를 보호하기 위함임을 알고 있네.”

“그리 여겨 주시면 소인이야 감사하지요.”

“나는 그저 친정에서 보내온 간식을 마마께 전해 드리려는 것뿐일세. 좀 도와주시게.”

상상 이상의 금전을 내미는 것도 그렇지만,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오히려 저들의 노고를 알아주는 성국공 부인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마음이 누그러진 태감이 머뭇대다 말했다.

“그럼 딱 일각만 모른 척해 드리겠습니다. 어서 마마를 뵙고 나오십시오.”

“고맙네.”

주머니를 품속에 챙겨 넣은 태감은 제 뒤편에 늘어선 이들을 향해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태감들은 덕교궁 대문 양옆으로 비켜섰다. 성국공 부인은 가볍게 묵례를 건넨 뒤 덕교궁 안으로 들어섰다.

‘돈으로 매수한 사람에겐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없다더니…….’

재물 앞에서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태감을 보며 성국공의 말이 하나 틀린 것이 없음을 실감한 연주가 조용히 성국공 부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완전히 덕교궁 안으로 자취를 감추자 등 뒤의 합문이 닫혔다. 안에서 대문 앞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황후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성국공 부인을 맞이했다.

“입궁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래, 바깥 상황은 어떻습니까? 연친왕은요? 오라버니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이라고 하던가요?”

마음이 급한 황후는 성국공 부인이 입을 때기도 전에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 냈다. 하지만 성국공 부인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으며 제 뒤에 서 있는 여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건 저와 함께 오신 분께서 모두 설명할 겁니다.”

“아니, 너는……!”

그제야 성국공 부인의 뒤에 숨은 익숙한 얼굴을 알아본 황후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연주는 그런 황후를 향해 더욱 극진히 예를 갖췄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던 황후는 연주를 일으켜 세워 와락 끌어안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가 널 지켜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정말 미안하구나.”

황후는 연신 연주의 등을 토닥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 연주가 젖은 눈꼬리를 손끝으로 재빨리 훔쳤다.

“다 지난 일이니 저는 괜찮습니다. 지금 중요한 일은 따로 있으니 회포를 푸는 건 나중으로 미루시지요.”

“그래. 그래. 그러자꾸나.”

연주를 마지못해 품에서 놓아준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는 황후를 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바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당장 제가 어전에 잠입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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