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침착한 연주의 태도에 조급함을 가라앉힌 채신이 누이를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그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인 연주가 말을 이었다.
“태자가 이번 일을 집안일이라고 우기며 조정 대신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있다면서요? 그렇담 우리도 집안사람을 내세우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집안사람……?”
연주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채신은 그녀가 말한 ‘집안사람’ 중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을 만한 자를 딱 한 사람 떠올렸다.
당대 황제가 일으킨 반정의 일등 공신이자 선황후와 현 황후의 오라비, 정엽의 외숙이자 황제의 처남, 성국공 교서형.
“누군지 아시겠나요?”
“그래. 그분이라면 조정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바꿀 수 있겠지.”
채신은 지금껏 성국부와 깊이 교류한 적이 없었다. 성국공은 선황후의 뜻에 따라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에서 물러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국공이 정엽을 구할 적임자이자, 가장 든든한 협력자라는 사실은 부정키 어려웠다.
“당장 성국부에 가 봐야겠다.”
마음을 정한 채신은 곧장 외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주가 밖으로 향하는 오라비의 뒤를 따랐다.
“저도 함께 가요.”
우뚝 멈춰 선 채신이 누이를 향해 돌아섰다.
“지금 너는 대외적으로 행방불명 상태다. 네가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조정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야.”
“오라버니의 말씀도 맞아요. 하지만 분명 제가 필요한 곳이 있을 거예요. 시간이 없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하고 싶어요.”
“안 된다.”
정엽과 가문의 안위를 지키고 싶어 하는 연주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누이를 또다시 위험에 빠뜨릴 순 없었다. 오라비에게 외면당한 연주가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당장 제가 성국부에 함께 간다고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겠어요. 성국부는 황후마마께서 덕교궁 보다 더 안전하다고 여기시는 곳이에요. 그만큼 보안에 신경을 쓰고 있는 곳이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너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채신은 이미 연주가 단지 집안의 영화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게 아님을 알았다.
연주에게 가문의 영화보다 더 귀한 것, 사랑. 정엽과 연주 모두 이 사랑이 문제였다.
“내가 아무리 막아 봐야 너는 결국 네 고집대로 행동하겠지.”
옅게 실소한 채신이 연주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함께 가자꾸나.”
함께 성국공을 만나기로 결정한 남매는 최대한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자 밤늦게 세자부를 떠났다. 연주의 지시를 받은 마부는 성국부의 대문이 아닌 뒷문에 마차를 세웠다.
“내 손을 잡고 내리거라.”
먼저 마차에서 내린 채신은 오가는 사람이 없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 연주가 마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연주와 함께 작은 쪽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누구십니까?”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하인의 얼굴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채신은 그런 하인을 나무라지 않고 순순히 정체를 밝혔다.
“나는 평해왕부의 세자 채신이다. 성국공 합하를 뵈러 왔으니 안내하거라.”
“지금 세자라고 하셨습니까……?”
채신의 말에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던 하인이 뒤편의 마차와 채신을 번갈아 보았다. 등불을 높이 들어보니 마차에 새겨진 평해왕부의 문장이 선명했다. 그럼에도 마음을 놓지 못한 하인은 채신과 나란히 서 있는 정체 모를 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이분은?”
외투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얼굴을 가리고 있던 연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과거 황후가 연주를 성국부로 불렀을 때 그녀와 허 상궁을 맞이한 기억을 떠올린 하인이 급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송구하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연주와 채신은 함께 성국부 뒤뜰로 들어섰다.
문밖을 다시 한번 좌우로 살핀 하인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뒤, 두 사람을 황후가 연주와 만났던 수상 전각으로 안내했다.
“주인어른을 모셔 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하인은 서둘러 거대한 연못을 가로지르는 대리석 다리를 건너 사라졌다.
하인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사방의 유리창을 통해 주변에 넓게 펼쳐진 연못을 둘러보던 채신이 나직이 읊조렸다.
“어쩌면 성국부를 둘러싼 소문이 낭설이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성국부를 둘러싼 소문이요……?”
“나는 성국부에 오늘 처음 와 보지만, 소문에 의하면 성국부 후원에 거대한 연못이 있고, 그 밑에는 십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의 병장기와 금괴가 묻혀 있다고 하더구나.”
처음 듣는 이야기에 연주가 반신반의하듯 엷게 웃었다.
“설마 그게 사실이겠어요.”
하지만 매사에 자신만만한 정엽의 태도나, 조정에서 물러난 지 오래이면서도 곳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성국공의 위세를 생각하면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지도 몰랐다.
안 그래도 태자에 대항하기 위해 거병까지 고려 중인 엄중한 시기. 연주가 막연히 그 소문이 진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한낱 낭설치고는 너무 구체적인 얘기라는 생각은 안 듭니까? 꽤 그럴싸하지요.”
어느새 다리를 건너와 문간에 서 있던 성국공이 명쾌하게 소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남매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국공 합하.”
“평해왕께서 보시면 속상해하실 겁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화답하는 성국공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황후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자리에서 일어난 채신과 연주가 성국공이 가리킨 빈자리에 앉았다.
세 사람이 모두 자리에 앉자 하인들이 각자의 자리 옆에 놓인 작은 협탁 위에 일사불란하게 차를 내려놓았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할 일을 마친 그들은 서둘러 전각문을 닫고 연못 밖으로 물러났다.
“차는 식기 전에 마시는 것이 좋지만, 두 사람이 이 늦은 밤에 나를 찾아온 걸 보면 급히 할 얘기가 있는 걸 테지요.”
“예, 그렇습니다.”
“너무 어려워 말고 얘기해 보세요.”
황후와 정엽이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도 생각 외로 태연한 성국공의 행동에 서로 눈빛을 교환한 채신과 연주가 잠시 침묵했다. 남매 중 먼저 침묵을 깬 쪽은 채신이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연친왕 전하의 구명을 위해 조정에 나서 주십시오.”
“내가 말입니까?”
“황후마마께서 연금되신 마당에 이제 연친왕 전하를 위해 나서 주실 분은 합하뿐이십니다. 조정에서 물러나신 지 오래이신 건 알지만 그렇다고 태자의 횡포를 손 놓고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흐음…….”
길게 뻗은 촘촘한 수염을 우아하게 쓸어내리던 성국공이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평해왕부가 오래전부터 자신의 조카를 위해 애써 왔다는 사실은 성국공도 인정하는 바였다.
“태자가 연친왕 전하도 모자라 황후마마까지 연금하는 것을 보고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끼고는 있었습니다. 내게 조정 일에 나서 달라 청하러 왔을 때는 심중에 뜻이 있어서겠지요.”
채신의 대답을 기다리며 성국공이 찻잔을 들었다. 행여 일을 그르칠까 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채신을 바라보던 연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합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태자는 이번 일을 집안일이라 칭하며 조정의 반발을 묵살하고 있습니다. 해서 저희들은 황실의 인척이신 합하께서 직접 나서 판을 흔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판을 흔든다?”
“그렇습니다. 합하께서 직접 나서시면 태자 또한 지금처럼 방관만 할 수는 없게 되겠지요. 이번 일이 생각보다 커지면 아무리 태자라도 함부로 연친왕 전하를 해하려 들진 못할 것입니다.”
“그 말은, 지금 태자가 내 조카를 암살할 계획이라도 세웠다는 겁니까?”
성국공의 질문에 이번에는 채신이 연주보다 먼저 대답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저희는 언제든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
“병부상서를 통해 알아본 바에 따르면, 지금 종정사를 지키고 있는 게 다름 아닌 동궁의 시위들이라고 합니다. 상황이 이런데 어찌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있겠습니까.”
“저런, 일이 우습게 돌아가는군요.”
감히 황제의 정실과 적장자를 무희의 아들 따위가 위협하는 꼴이라니. 이 기막힌 상황에 헛웃음을 터뜨린 성국공이 고개를 흔들었다.
종정사의 감옥을 지키는 군졸들은 일반 죄수가 아닌 황족들을 대하기에 어전 시위들만큼이나 선발이 까다로웠다.
종정사는 존귀한 황족과 종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곳이므로 한낱 형부 관리에게 맡길 수 없거니와, 특정 인물이나 세력이 종정사를 멋대로 주무를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합하께서 조정에 나서 최우선으로 관철하실 일은 종정사에 버티고 있는 동궁 시위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먼저 연친왕 전하의 신병을 확보한 뒤에, 태자에게 반격을 시작해야지요.”
“반격이라면?”
“곽 귀비 모자는 지금껏 오석산과 그것의 해독제를 이용해 황제 폐하를 조종해 왔습니다. 여기 있는 제 누이가 그 사실을 알아내고 증인을 확보했습니다. 해독제 역시 이곳으로 오기 직전 완성되어 가지고 왔습니다.”
채신이 말을 마치자, 연주가 품에 소중히 보관해 온 작은 병을 꺼내 보였다.
“이 병에 든 것이 바로 오석산을 해독하는 한동향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그간 병석에 오래 누워 계셨던 건 단약으로 위장한 오석산을 복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석산이라면 나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자와 곽 귀비가 폐하께 쓴 오석산은 귀족들이 유희를 위해 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래도 보통은 이 약을 쓰면 하루 만에 안정을 찾고 제정신으로 돌아온다고 하니, 폐하를 깨워 그간 태자가 국정을 농락한 죄상을 낱낱이 밝히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 이 약을 드시게 만들 방법만 찾으면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황후마마께서 연금되시기 전에는 이것을 황후마마께 전해 폐하를 깨울 생각이었습니다. 한데 지금은 황후마마께서 연금당해 계시니 이 일을 도모할 방법이 없습니다.”
대화가 끝나자 연주가 성국공에게 묘안을 청하듯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가 내민 해독제를 내려다보며 수염을 가다듬던 성국공이 옅은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흐음. 한데, 이 늙은이 생각엔 지금 이보다 더 중요한 변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