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44화 (144/161)

144화.

“……!”

정엽은 태자에 대항하고자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당장 종정사에 갇힐 위기에 처한 정엽보다 황제의 반응이 더 격렬했다.

쿵-!

태자를 제지하듯 사지를 버둥거리며 침상을 기던 황제가 끝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마당에, 몸을 움직이는 일이라고 쉬울 리 없었다. 추락한 황제를 등 뒤로 흘깃 확인한 정엽이 갈등에 빠졌다.

혼절한 황제를 옮기느라 미처 예법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뿐이지만, 이는 명백히 저의 실수였다. 황제의 친위대인 신의군 통령으로서 황궁 안에서 검을 차고 활보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황제의 침실만큼은 예외였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검을 뽑거나 도망치면 저놈의 의도대로 꼼짝없이 역도로 몰리겠지.’

게다가 지금 그의 수중에는 황제를 중독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킬 해독제마저 없었다. 태자는 정엽을 도발하기 위해 더욱 악에 받쳐 소리쳤다.

“당장 몸에 지닌 무기를 모두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라! 어서!”

현재로선 태자에게 맞설 방법이 전혀 없다.

이를 깨달은 정엽이 태자의 함정을 피하고자 허리춤에 찬 검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천천히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하던 동궁의 시위들은 이내 정엽의 양손에 무쇠로 만든 족쇄를 채웠다. 뒤이어 쇠사슬로 칭칭 휘감아 정엽을 결박한 그들은, 정엽의 목에 형구까지 채운 뒤, 마치 짐승을 대하듯 거칠게 밖으로 끌고 나갔다.

“엽아……. 엽아……!”

황제는 멀어지는 정엽을 향해 애타게 손을 뻗으며 핏발 선 눈으로 버둥거렸다. 정엽이 스스로 역도가 되어 줬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일단 정엽과 황제를 갈라놓는 데 성공한 태자는 버러지처럼 흐느적거리는 황제 앞에 시정잡배처럼 쭈그려 앉아 조소했다.

“왜요. 이제 와 큰아들이 불쌍하십니까?”

“끄윽……!”

“하하하! 이 모습이 어딜 봐서 만인지상의 모습이란 말입니까?”

분노에 차 괴이한 숨소리를 내며 기어 오는 황제를 희롱하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태자가 피식 실소하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부황께서는 어떻게 늘 소자의 상상을 뛰어넘는 행동만 골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칫하면 또 부황께 당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으으…….”

“돌아온 형님에게 갑자기 신의군 통령 자리를 내어 주시더니, 나중엔 제례까지 주관하게 하시고. 정신이 조금 들게 해 드리자마자 보란 듯이 형님을 입궁시켜 저와 대적하려 하시다니…….”

수더분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태자가 그의 턱을 오만하게 끌어 쥐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애증, 아니 증오에 가까운 얼음장 같은 눈빛이 황제의 두 눈에 화살처럼 꽂혔다.

“제가 이렇게 된 건 다 부황 탓입니다. 형님이 명을 재촉하게 된 것도 다 부황 때문이지요.”

“…….”

“부황께서 그토록 죽이고 싶어 하던 적장자는 소자가 알아서 잘 처리해 드릴 테니 염려 마십시오.”

마침내 황제 앞에서 자신의 속내를 말끔히 드러낸 태자가 싱긋 눈웃음쳤다. 그는 마지막 남은 단약 한 알을 소매에서 꺼내 황제에 입 안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오. 부황.”

씹어뱉듯 말을 마친 태자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켜 저벅저벅 침실을 떠났다.

일평생 정엽의 손에 죽게 될까 봐 그를 경계해 왔던 황제는, 엉뚱하게도 다른 아들의 손에 생을 마감하게 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메마른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정엽이 아니라 당신이야. 나를 죽인 건 내 아들이 아니라 당신이라고!”

그 순간, 죽어 가면서까지 저를 향해 원망을 토해 내던 선황후의 모습이 황제의 뇌리를 스쳤다.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 맛봤던 기쁨과 행복은 모두 어디로 가고,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고 저를 향해 예쁘게 웃어 보이던 아내는 또 어디로 가고 나 혼자 남았단 말인가.

“염희……. 엽아…….”

가슴 한쪽이 뻥 뚫린 듯 차디찬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을 뇌까리던 황제는 온몸을 태우는 익숙한 열기에 잠겨 눈을 감았다. 맥없이 닫힌 눈꺼풀에서 끝내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황제의 침실에 숨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그림자가 은밀하게 어전을 빠져나갔다.

* * *

“아가씨, 연왕부 앞에 금군들이 쫙 깔렸대요! 그 앞을 지키고 서서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게 한다나 봐요!”

정엽이 종정사에 갇힌 그날, 연왕부에 군사가 들이닥치고 황후가 처소인 덕교궁에 연금당했다. 양해의 도움으로 연왕부에서 세자부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연주는 이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이번 일로 놀란 사람은 연주뿐만이 아니었다. 황제의 적장자와 정실 황후가 모두 갇히자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한 관료들은 일제히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어전으로 몰려갔다.

“폐하께선 안에 계시는가?”

“저, 그것이…….”

“우물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을 하게!”

이렇듯 관료들이 어전 밖에서 애를 태우는 동안, 안에서는 오석산에 중독된 황제가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물론 그런 황제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태자의 몫이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그 누구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시니 모두 물러가오.”

“태자 전하, 연친왕께서 종정사에 갇히고 황후마마께서 덕교궁에 연금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옵니까?”

“모든 건 폐하의 뜻이오. 집안일을 차마 조정에서 논할 수 없으니 이 일에 대해 깊이 알려고 하지 마오.”

이 기막힌 상황을 평해왕이 천거한 새로운 병부상서를 통해 전해 들은 채신은 분개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자와 곽 귀비가 궁중에서 벌이는 일들을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지금 당장 남해 출신의 궁인들을 접촉해 자세한 내막을 알아내라.”

다음 날, 자미성 곳곳에 숨은 궁인들의 눈과 귀를 동원해 모든 의문을 해소한 채신은 분개했다.

“태자가 드디어 미친 것이 틀림없구나!”

오라비가 이토록 크게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대체 황궁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연주는 채신이 책상 위에 내려놓은 서신을 집어 서둘러 내용을 확인했다. 서신의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남해 출신 궁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본 바, 연친왕 전하께서 종정사에 갇히신 이유는 황제 폐하의 침실에 검을 차고 들어갔기 때문이며, 황후마마께서 연금당하신 이유는 황제 폐하의 침실에 난입해 용태를 확인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찌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보아도 선뜻 믿을 수 없는 내용에 경악한 연주가 소리쳤다. 말인즉, 정엽이 반역을 꾀했다는 뜻이었다.

‘이게 단순히 집안일이라고?’

분명 문제가 있었다. 채신 역시 연주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며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이윽고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자가 연친왕 전하를 종정사에 가둔 것으로 모자라 연왕부를 에워싸고 철통같이 지키는 것이 수상하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폐하의 침전에 무장하고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전하를 종정사에 가뒀으면서 연왕부를 에워싸고 철통같이 방비할 이유는 또 뭐란 말이냐? 대체 그 안에서 뭘 하려고?”

“연왕부에서 뭔가를 찾아내려는 걸까요?”

“찾아내는 게 아니라……. 만들어 내려는 건지도 모른다.”

정엽은 황제의 친위대인 신의군의 수장이다. 어디서든 황제를 지키는 것이 신의군 통령의 소임이었다.

황제가 조회 도중 어전으로 돌아간 그날도 정엽은 황제를 구하기 위해 그를 업고 어전으로 달려갔다. 한시가 급한데 몸에 지닌 무기를 모두 내려놓고 침전에 들어갈 정신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태자 역시 이것만으로는 언제든 상황이 뒤집힐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게 전부일까요?”

하지만 연주는 오라비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최악의 상황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오라버니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저는 조정이 쑥대밭이 되었는데도 태자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게 더 수상해요. 어쩌면 연친왕 전하를 종정사에서 암살하려 들려는 게 아닐까요?”

“그건…….”

“태자가 얼마나 연친왕 전하를 미워하는지 잘 아시잖아요. 게다가 태자는 위나라와의 화친 문제로 이미 궁지에 몰렸어요. 그런 사람이 지금 제정신이겠어요?”

깜짝 놀라 연주를 바라보던 채신이 이내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가 명분과 절차를 갖춰 정엽을 쳐 낼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질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병부상서의 말에 따르면, 지금 정엽이 갇혀 있는 종정사를 지키고 있는 것도 감옥을 지키는 군졸이 아니라 동궁의 시위들이라고 하지 않은가. 연주의 말마따나 당장 정엽이 종정사 안에서 숨을 거둔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안 되겠다. 파옥을 해서라도 전하를 종정사에서 구출해야겠어. 당장 세자부의 사병을 모아서 거병할 것이다!”

“오라버니, 거병이라니요!”

놀란 연주가 채신을 말리고 나섰다.

“지금 거병하면 태자에게 전하를 제거할 빌미만 하나 더 주는 꼴이잖습니까. 게다가 지금 우리에겐 종정사에 갇힌 전하를 구하겠다는 것 외에 어떠한 명분도 없어요!”

“그럼 어쩌란 말이냐!”

오랜 시간 보필해 온 주군을, 가장 아끼는 벗을 허망하게 잃게 될까 봐 이성이 흐려진 채신이 머리를 감싸 쥐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엷게 한숨을 쉬며 마음을 가라앉힌 연주가 오라비를 달래듯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지금 전하께 가장 위협이 되는 건 종정사를 지키고 있는 동궁의 시위들이에요. 우리, 급한 문제부터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요. 오라버니.”

“하아…….”

“끝내 거병을 하더라도 되더라도 고작 세자부 사병만으로는 황궁의 군사들을 감당할 수 없어요. 그러니 우리와 힘을 합칠 만한 사람을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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