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43화 (143/161)

143화.

한편, 오늘 새벽 갑작스럽게 황제의 소환령을 받아 입궁한 정엽은 어전 대문 앞에서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폐하께서 오늘은 신의군이 금군을 대신하라고 분부하셨사옵니다. 조회에 참석하는 폐하를 호위하고 조당을 경비하시라고요.”

“……폐하께서?”

“예. 하니 지금 당장 폐하의 호송을 준비하시지요.”

빠르게 말을 쏟아 낸 어전 태감은 금세 등을 돌려 다시 어전으로 향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연주와 채신을 통해 황제가 오석산에 중독된 상태임을 아는 정엽이 고심했다.

이제 태자와 곽 귀비에게 단약과 해독제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황제가 갑작스럽게 조회에 나서게 된 것을 보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인지…….’

애써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힌 정엽은 자미성 동쪽 군영으로 가 갑주와 검을 챙긴 뒤 신의군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그러곤 황제가 탄 가마를 상양궁에서 조회가 열리는 근화전(謹和殿)까지 호위했다.

잠시 후 황제의 가마가 근화전 앞에 내려서자, 황제를 마중 나온 태자가 어가에 다가섰다. 정엽은 자연스럽게 태자에게 밀려 황제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연친왕은 어디에 있느냐?”

그러나 황제는 자신을 부축하러 다가온 태자의 팔을 뿌리치고는 정엽을 찾으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갑옷미늘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다가온 정엽이 고개를 숙였다.

“소자를 찾으셨습니까.”

“오늘따라 짐의 눈이 침침해서 불안하구나. 네가 나를 부축하거라.”

“예, 부황.”

황제는 꼭 눈이 먼 사람처럼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정엽은 불안해 보이는 황제의 손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엉기는 차가운 철갑의 촉감을 감지한 황제가 힘주어 정엽의 팔을 움켜쥐고 어가에서 내려왔다.

내내 웃는 낯으로 황제의 기행을 지켜보던 태자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반면, 전례 없이 저를 의지하는 황제를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정엽은 황제의 느린 걸음에 맞춰 오직 천자만이 이용할 수 있는 어도를 걸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래, 그래…….”

황제는 기력이 많이 쇠한 듯 몸의 중심을 완전히 정엽에게 맡겼다. 그는 휘청거리면서도 금빛으로 번쩍이는 용상을 향해 나아갔다. 처음 잡아 보는 부친의 손에 정신이 팔린 정엽은 마치 꿈속을 걷듯 황제와 조심조심 발을 맞추었다.

하지만 한낮의 꿈은 꽃에 앉은 나비의 입맞춤보다 짧았다.

정엽은 황제가 앉아야 할 용상 앞에서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황제의 정좌를 도운 그는 본래 제 자리인 단상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맞잡은 손을 놓으려 했다.

그때, 황제가 멀어지려는 정엽의 손을 꼭 잡고 그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폐하……?”

그것이 제 곁에 남으라는 무언의 명령임을 눈치챈 정엽이 단상 아래 선 태자를 흘깃 바라보았다.

역시 황제의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건 오석산의 부작용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신의군을 맡긴 뒤 한 번도 자신을 찾지 않던 황제가 갑자기 저를 불러들인 게 아니겠는가?

황제가 태자를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판단한 정엽이 황제의 오른편에 섰다. 그리고 뒤늦게 이 사실을 눈치챈 태자가 황제 곁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정엽을 올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황제가 허튼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해독제를 반만 먹였던 태자로선, 신의군을 불러들인 것도 모자라 정엽을 옆에 끼고 있기까지 하는 황제의 돌발 행동에 어떻게 대처할지 계획된 바가 없었다.

휘이익- 쫘악! 짜악- 짝!

태자가 이 상황을 어떻게 요리할지 고심하는 사이, 조회의 시작을 알리는 채찍 소리가 조당 앞마당에 울려 퍼졌다. 근화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소신료들이 조당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관직의 품계에 따라 줄지어 섰다.

“오황(吾皇) 만세 만세 만만세!”

“태자 천세 천세 천천세!”

대신들은 황제를 향해 만세 인사를, 태자를 향해 천세 인사를 올리는 것으로 예를 다했다. 대신들의 우렁찬 목소리에 힘겹게 손을 들어 올린 황제가 느지막이 평신을 명했다.

“모두 일어나라.”

본격적인 조회가 시작되자, 태자는 황제가 입을 떼기도 전에 평소처럼 조정 대신들을 호령했다.

“폐하께 아뢸 것이 있는 신료는 앞으로 나와 말하라. 단, 폐하의 옥체가 여즉 미령하니 중요한 안건이 아니면 되도록 상주문으로 대신하라!”

황제가 살아 있음을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것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지금으로선 조회를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는 게 상책이었다. 태자는 수굿이 고개를 떨군 신료들에게 엄포를 늘어놓듯 짐짓 엄한 눈빛을 쏘아 댔다.

그러자 관료들 틈바구니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위나라 사신이 앞으로 나섰다.

“위나라 사신 이조현이 황제 폐하께 아룁니다!”

아까부터 황제와 정엽 쪽으로 온 정신이 쏠려 있던 태자가 익숙한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저 쥐새끼 같은 자가 언제 조당으로 숨어들었단 말인가?’

위나라 사신이 국혼을 문제 삼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태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화친 문제는 위나라 국왕과 혼인하기로 한 공주의 행방이 묘연하니 나중에 다시 논하는 것이 좋겠소.”

태자는 그 ‘행방이 묘연한 공주’가 연주라는 사실을 황제에게 감추기 위해 일부러 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곤 사신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사신은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

“태자 전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희 위나라에서는 이미 화정공주가 죽었다고 보고 있사옵니다. 공주를 수행하던 관원들이 모두 몰살당했는데, 연약한 공주가 홀로 어떻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뭘 어찌하자는 것인가?!”

“화정공주의 일은 안타까우나 우리 국왕께서는 본래 약속대로 민해공주를 왕비로 맞이하길 원하고 계십니다. 폐하, 부디 가납해 주시옵소서.”

“닥쳐라!”

자꾸만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사신 때문에 극도로 예민해진 태자가 버럭 소리쳤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용상을 힐끔거리며 서둘러 국혼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가만히 용상에 앉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제가 하문했다.

“대체 화정공주가 누구인가?”

그러자 평소 정엽과 뜻을 같이해 온 예부시랑이 나서 고했다.

“평해왕의 적녀인 승설군주입니다.”

“승설군주가 공주에 책봉되었다고……?”

예부시랑의 대답을 들은 황제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태자를 굽어보았다. 예부시랑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태자를 몰아붙였다.

“폐하께서 이레 전 승설군주를 화정공주로 책봉해 민해공주 대신 위나라로 보내기로 하지 않으셨사옵니까? 소신들은 태자께서 이 모두가 폐하의 뜻이라 전하기에 그대로 따랐사온데, 어찌하여…….”

예부시랑은 말끝을 흐리며 태자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대소신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자의 입으로 향했다.

이쯤에서 태자가 내세운 밀약이 황제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실체조차 불분명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한 사신이 분개했다.

“설마 태자 전하께서 우리 위나라를 속이신 겁니까?”

“속이다니!”

“겉으론 동맹을 청하면서 뒤에서는 가짜 공주를 보낼 궁리나 하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리 대국이라지만 대화국이 우리 위나라를 이렇게 우롱해도 되는 것입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사신이 펄펄 뛰며 항의했다. 태자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하고 싶었으나, 말문이 막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를 악물 뿐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가짜 공주라니. 화정공주는 분명 성지를 통해 공주로 봉해졌는데…….”

혼란에 빠진 관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이 기막힌 촌극을 지켜보며 분기탱천한 황제가 용상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네 이놈, 네놈이 어떻게, 어떻게……!”

태자를 향해 삿대질까지 하며 목청을 높이던 황제는 곧 화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다 뒤로 쓰러졌다. 곁에서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정엽은 재빨리 황제를 받아 안았다.

“폐하!”

놀란 관료들이 한 박자 늦게 단상 아래로 몰려들었다. 황제는 의식이 꺼져 가는 와중에도 곁에 있는 정엽의 손을 꽉 움켜잡고 말했다.

“어전, 어전으로 돌아가자, 엽아…….”

점점 힘을 잃어 가는 말소리를 겨우 알아들은 정엽이 곧장 황제를 둘러업고 근화전을 뛰쳐나갔다. 관료들 역시 그 뒤를 따라 밖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수라장이 된 근화전에 홀로 남게 된 태자는 일이 완전히 꼬였음을 직감하고는 이를 부득 갈았다. 그는 혼란을 틈타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졌다.

“당장 태의를 불러라!”

의식을 잃은 황제를 업고 바람처럼 달려 어전에 도착한 정엽은 곧장 그를 침상에 눕힌 뒤 상태를 살폈다. 그사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황제가 아들을 향해 무어라 입을 벙긋거렸다.

“폐하,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이를 발견한 정엽이 몇 번이고 되물었으나, 황제는 전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고민하던 정엽이 황제의 입 모양을 주시했다.

황제는 그런 정엽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그를 향해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옥새, 가져, 와……. 옥새……, 가져와라.’

옥새를 가져와라. 황제의 입 모양을 그대로 모방하며 그가 말한 단어들을 조합한 정엽이 제 예상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옥새라 하심은……. 전국옥새(傳國玉璽)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정엽의 목소리를 들은 황제가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기다리십시오.”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정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침실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태자가 동궁의 시위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연친왕이 검을 차고 폐하의 침실에 난입했다! 감히 천자 시해를 꾀했으니 당장 사로잡아 종정사에 처넣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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