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42화 (142/161)

142화.

연주의 입에서 가시처럼 벼린 말들이 쏟아졌다. 하나같이 통렬하기 그지없는 현실 인식이라, 정엽은 차마 그에 반박할 수 없었다.

엷은 한숨을 삼킨 연주가 숫제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느리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옥좌를 등지고 떠나면 나는 평생 당신의 앞길을 막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거예요. 나 하나 때문에 내린 선택이 당신을 괴롭게 만든다면,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요?”

“…….”

“당신의 평안은 황궁 가장 높은 곳에 있어요. 내 평안은 황실 밖에 있고요. 그러니까…….”

“아니. 내 평안은 네 안에 있어.”

“정엽.”

정엽의 고집에 연주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정엽은 연주와 곧게 시선을 맞추며 또박또박 말했다.

“내 행복은 너로 인해 완성돼. 너도 날 사랑한다며. 난 그거면 됐어.”

“…….”

“매번 내가 틀렸다고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네가 나를 이해해 줘.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최대한 침착한 척 말하고 있지만, 정엽은 아득히 높은 곳에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 앞에 선 것처럼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이 공포와 괴로움을 연주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정엽은 침상에서 내려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침의를 낚아챘다. 긴 팔을 매끄러운 비단 소매에 꿰어 넣은 그는, 허리께를 동여매 벌거벗은 몸을 가리는 동안 터질 듯 복잡한 심사를 가라앉혔다.

이어 표정을 가다듬은 정엽이 몸을 돌려 연주와 마주 섰다. 그는 제 사랑을 증명하듯, 혹은 연주가 제 소유임을 확인하듯 그녀를 끌어당겨 이마에 짙게 입 맞춘 뒤 낮게 속삭였다.

“그동안 힘들었다는 거 알아. 그러니 지금은 좀 쉬자.”

“…….”

“알았지?”

정엽은 대답이 없는 연주를 달래듯 그녀의 흰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언제 봐도 어여쁜 입술을 엄지로 가볍게 문질러 보던 그는, 한참 다정한 눈빛을 보내다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 * *

홀로 경수당에 남겨진 연주는 잠시 후 정엽의 명으로 들어온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마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연주는 이쯤에서 궁녀들이 물러나길 바랐으나, 그들은 얼마나 충성심이 대단한지 한시도 연주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궁녀들은 식사 시중까지 마치고도 경수당을 떠나지 않으며 문 앞을 가로막듯 늘어섰다.

연주가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자, 그나마 궁녀 중 연장자로 보이는 이가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처소 안에 모든 궁녀가 다 남아 있을 필요는 없다. 거기 둘은 나와 함께 문밖을 지키자.”

“예.”

“그리고 마마를 모신 경험이 있는 너희 셋은 안에 머물며 마마의 시중을 들어라.”

“알겠사옵니다.”

내내 엄한 표정을 짓던 연장자가 사라지자, 방 안에 남은 궁녀들은 기다렸다는 듯 연주 주변으로 모여들어 재잘대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마께서 다시 돌아오시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사옵니다!”

“소인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저는 마마께서 꼼짝없이 위나라로 화친 가시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던 궁녀가 다른 궁녀들의 눈총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간식을 좀 가져올까요?”

“혹시 춥지는 않으세요? 화로를 몇 개 더 들여놓을까요?”

하지만 침묵도 잠시, 연주의 눈치를 살피던 궁녀들은 마치 경쟁하듯 앞다퉈 나섰다. 이상하리만치 부산스러운 궁녀들의 태도에선 저를 절대로 되돌려 보내지 않겠다는 정엽의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연주는 갑갑함에 엷은 한숨을 삼켰다. 그러나 정엽이 어떻게 나오든, 한시라도 빨리 그를 설득해 서둘러 왕부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너희들이 필요하면 바로 부르마. 지금은 좀 쉬고 싶구나.”

연주는 저를 위해 애쓰는 궁녀들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궁녀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다 이내 허리를 숙이고 자취를 감췄다.

마침내 홀로 남은 연주는 서늘한 창가에 앉아 정엽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연주는 뭉친 관자놀이를 느리게 문지르며 정엽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이야기를 구상했다.

하지만 해가 지고 달이 떠도 정엽은 돌아오지 않았다. 연주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창가에 아침 햇살이 드리울 무렵,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연주는 직접 정엽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연주가 경수당 문밖으로 나서려 하자마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소렴자가 연주를 막아섰다.

“이게 무슨 짓이냐?”

“마마께서 충분히 몸을 회복하시도록 푹 쉬게 해 드리라는 전하의 명을 받았사옵니다. 처소 안으로 드시지요.”

소렴자의 어투는 공손했지만, 그 이면에는 저를 경수당 안에 가둬 두려는 술수가 숨겨져 있었다. 한숨을 쉰 연주가 다시 한번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저 전하를 뵈러 가려는 것뿐이다. 그러니 비키거라.”

“마마, 안 됩니……!”

연주는 소렴자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뜨락으로 내려섰다. 당황한 소렴자가 헐레벌떡 따라 내려와 재차 연주의 앞을 막아섰다.

“감히 항명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마마. 소인은 전하의 뜻을 받들 뿐이옵니다.”

“……뭐?”

“여봐라!”

소렴자는 경수당 대문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그것을 신호로 갑자기 스무 명쯤 되는 태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근 뒤 소렴자 뒤로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늘어섰다.

“이게 다 무슨……!”

황당해하던 연주는 버럭 화를 내려다 멈칫했다. 정엽이 고작 저 하나를 경수당에 묶어 두고자 이렇듯 많은 태감을 배치해 둔 점이 이상했다.

내가 당장 세자부로 돌아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엽을 만나겠다고 했을 뿐인데 왜…….

‘설마 정엽이 왕부에 없는 건가?’

어제 일로 정엽이 저를 피해 다니기로 작정했다고 해도, 그가 왕부 안에 있다면 이렇게 많은 궁인을 동원해 앞을 막아설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정엽이 자신과 연왕부에서 칩거한 지도 벌써 나흘째. 계속 왕부에만 머무르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오히려 태자의 눈에 띄어 의심을 살 것이 뻔했다.

오늘은 정엽이 일부러라도 외출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어쩜 바로 지금이 연왕부를 떠날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라.’

연주는 소렴자와 불필요하게 충돌하기보다, 정엽을 위하는 제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 줄 사람을 찾아 설득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무례하구나! 내 오늘 반드시 너희들의 죄를 물을 것이다! 양해는 어디 있느냐?”

“양 태감께서는 지금 주방에서 마마께 올릴 아침 식사를 챙기고 계십니다.”

“아침 식사는 필요 없으니 당장 양해를 불러오너라!”

단호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인 연주는 안절부절못하는 소렴자를 남겨 두고 경수당 응접실로 돌아갔다. 상석에 정좌한 연주는 양해를 기다리며 그를 설득시킬 전략을 구상했다.

“군주마마를 뵙습니다.”

이윽고 명을 받은 양해가 응접실로 들어와 연주에게 예를 갖췄다. 이어 우유를 넣고 끓인 연와탕을 건넨 그가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아침 식사를 들지 않겠다 하셨다지요. 그래도 속이 비면 금방 몸이 상하옵니다. 마마의 몸이 상하면 전하께서 걱정하시니 소인이 준비한 연와탕이라도 조금이나마 드셔 주십시오.”

연주는 간곡한 눈빛을 보내는 양해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그가 건네는 연와탕 그릇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수저로 건더기를 가볍게 휘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 탕을 먹기 전에 자네에게 긴히 할 말이 있네. 지금 경수당을 에워싸고 있는 태감들을 모두 100보 밖으로 물러나게 하게.”

“그것은…….”

“잠깐이면 되네.”

“하면 아주 잠깐만이옵니다.”

고민하던 양해가 제 뒤에 선 소렴자를 향해 눈짓했다. 스승의 뜻을 받든 소렴자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물러났다.

“모두 경수당 밖으로 물러나라!”

이윽고 경수당 앞을 지키던 태감들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이를 확인한 연주가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내가 떠날 수 있도록 연왕부 뒷문에 조용히 마차를 준비시켜 주게.”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연왕부에 계속 몸을 숨기고 있다간 전하께서 위험에 처하실 거란 것쯤은 자네도 알지 않는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피하던 양해가 연주의 말에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쯤 내가 사라진 일로 대화국 조정과 위나라 조정 모두 발칵 뒤집혔을 걸세. 이러다 의심 많은 태자가 갑자기 연왕부로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하오나…….”

“내가 연왕부에서 발견되면 전하께선 순식간에 국혼을 망친 죄인으로 전락하게 되네. 태자가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두고 보겠는가? 태자라면 곧바로 전하를 참살하고 말 걸세!”

참살. 연주의 입에서 나온 뜻밖에 단어에 멈칫한 양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판단이 옳다는 건 알지만 주인에게 당부받은 바가 있으니 쉬이 판단이 서질 않았다.

“자네가 진정으로 전하를 위한다면, 지금은 내 뜻에 따라 주어야 하네. 그래야 모두가 살 수 있어.”

“……우리 전하를 위하시는 마마의 결단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연주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한 양해가 바닥에 이마를 조아렸다.

“마마께서 곧장 떠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사옵니다.”

“전하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나 하나뿐이겠는가. 오늘 자네가 보인 충심을 잊지 않겠네.”

“황송하옵니다. 마마.”

다시 한번 연주를 향해 허리를 숙인 양해가 비장한 얼굴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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