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41화 (141/161)

141화.

완전한 합일의 기쁨은 꿀보다 달콤했다. 쾌락 속에서 깨어나, 다시 희열 속에서 잠드는 동안 시간의 경계가 무너졌다.

밤낮없이 황홀경에 몸부림치다 지쳐 잠이 들었던 연주는 심한 갈증을 느끼고 눈을 떴다. 머리맡에 놓여 있을 물 잔을 찾기 위해 팔을 뻗으니, 밤새 시달린 몸이 뒤늦게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아무리 손끝을 돋워 봐도,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 잠든 정엽 때문에 물 잔까지 닿을 수 없었다. 연주는 단단하게 감긴 정엽의 팔을 낑낑대며 풀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허리부터 아랫도리까지 이어지는 둔통에 절로 앓는 신음이 터졌다.

“흣…….”

그 순간, 갑자기 근육질의 긴 팔이 불쑥 뻗쳐 와 연주 대신 물 잔을 가져갔다.

‘어?’

연주가 당황하는 사이 그녀의 몸이 건장한 팔에 휘감겨 다시 이불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침상에 머리를 눕히자, 부르튼 입술 위로 물을 머금은 촉촉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놀라 벌어진 잇새로 차가운 물이 넘어왔다. 연주는 흘러들어 온 액체를 본능적으로 받아 마셨다. 도드라지지 않은 목울대가 희미하게 꿈틀대는 것을 확인한 정엽이 입술을 떼고 재차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잘 잤어?”

해가 중천에 뜬 시간에 오갈 만한 인사는 아니었지만, 정엽의 목소리는 세상이 본래 그렇게 돌아가는 것처럼 무덤덤했다.

연주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느른하게 웃으며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입술로 그녀의 목덜미를 베어 물었다.

그는 가빠지는 연주의 숨소리를 즐기며 우아하게 도드라진 쇄골 위로 내려와 입술을 비볐다. 간밤의 격정으로 울긋불긋하게 물든 몸이 못내 사랑스러워, 지나가는 자리마다 입술을 짙게 눌렀다.

“더는 안 돼요…….”

나흘이 지나도록 식을 줄 모르는 정엽의 열정에 지친 연주가 몸을 뒤척이며 그를 등지고 누웠다. 이젠 그가 깨물고 빨아 대는 곳마다 멍이 든 듯 쓰라려 견딜 수가 없었다.

“안 되긴.”

정엽은 제 손길을 뿌리치는 연주에게 항의하듯 그녀의 작은 어깨와 톡 불거진 날개뼈를 크게 깨물어 잇자국을 남겼다.

연주는 굴하지 않고 힘껏 몸을 웅크렸다. 정엽은 그제야 별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연주의 머리에 턱을 괴고 여린 몸을 품속으로 당겨 안았다.

‘아, 이제 정말 여길 떠나야 하는데…….’

지금쯤 화친 행렬이 습격당한 일로 조정이 난리가 났을 터였다. 더는 연왕부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등 뒤에 와 닿는 따뜻한 맨살이 주는 포근함 때문에 자꾸만 눈이 감겼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인데도 창가를 기웃대는 쌀쌀한 겨울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매일 눈을 뜰 때마다 이 위험한 열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정엽과 함께 이곳에서 쭉 머무르고 싶었다.

‘도대체 왜 이런담.’

연주는 오늘도 약해지는 결심을 곱씹으며 한숨지었다. 그러나 정엽은 한숨의 의미를 아쉬움으로 오해했는지, 군불을 지피듯 스멀스멀 살결을 더듬어 올라와 넘치도록 풍만한 가슴을 은근히 감싸 쥐었다.

그는 손길이 닿는 대로 형체를 달리하는 부드러운 살집을 주무르다, 앵두처럼 맺힌 가슴 끝을 검지로 살살 굴리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연주야.”

“……네?”

“우리, 돌아오는 봄에 한수로 갈까?”

갑자기 한수라니. 생각지도 못한 정엽의 제안에 연주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 갔다.

“왜. 싫어?”

얼굴을 마주 보고 있지 않아도 당혹감이 전해졌는지, 정엽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민 끝에 정엽이 요 며칠 꿈같은 날들에 취해 사리 분별이 흐려진 거라고 결론 내린 연주는 그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한수는 봄도 여름도 쌀쌀한 곳이잖아요. 추워서 싫어요.”

“그럼 네가 춥지 않도록 저택에 화로를 잔뜩 준비하라고 할게. 상의국에 시켜서 따뜻한 솜옷도 여러 벌 짓고, 또…….”

“…….”

“너는 꽃 키우는 걸 좋아하니까. 한수에서도 정원을 가꿀 수 있게 저택에 온실을 짓는 것도 괜찮겠네. 조향도 계속할 수 있게 침실 근처에 작업실도 따로 만들고…….”

“아니요. 필요 없어요.”

이쯤에서 무언가 크게 잘못됐음을 직감한 연주는 습관처럼 제 가슴을 희롱하고 있던 정엽의 손길을 조용히 밀어 냈다. 그러곤 이불귀로 나신을 가린 채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단호한 구석이 느껴지는 연주의 태도에 정엽이 입을 다물었다. 연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당신은 절대로 수도를 떠나선 안 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죠?”

“……엉뚱한 생각?”

표현이 조금 불쾌했는지, 정엽이 설핏 미간을 좁히다 뒷말을 이었다.

“너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신중하게 고민해 내린 결정이야. 오로지 너를 위해서.”

“그건 나를 위한 일이 아니에요.”

“……뭐?”

“당신은 황자예요. 제위에 올라야만 일평생 원하는 대로 뜻을 펼치며 평온하게 살 수 있다고요.”

물론 모든 황자가 황제가 되기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정엽 역시 권력을 탐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제 연주도 잘 알았다.

하지만 태자와 대적하게 된 이상, 그리고 많은 이들의 헌신과 기대를 어깨에 짊어진 이상, 연친왕 소정엽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황제가 되는 것.

“지금까지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왔잖아요.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공적도 세웠고요. 한데 어째서 그 모든 걸 뒤로하고 떠나겠다는 거예요?”

“너를 사랑하니까.”

“……네?”

“내겐 이 나라보다 너 한 사람이 더 소중해. 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더는 낭비하고 싶지 않아. 너도 나를 사랑하잖아. 아니야?”

정엽에게서 이성적이고 거창한 대답이 나올 거라 예상했던 연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연주 역시 정엽을 향한 사랑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과 별개로 그가 사랑에 눈이 멀어 가서는 안 될 길을 선택하려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연주는 이제 오랜 고민과 갈등을 매듭지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사랑해요. 하지만 그래서 당신과 함께할 수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정엽이 기억하는 연주는 사랑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여자였다. 향산궁에서 이별을 고하던 날도 스스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니.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정엽이 연주를 따라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혹시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야? 그동안 내가 보여 준 행동들이 못 미더워서?”

“그게 아니라…….”

“그럼 한수에서 아이를 잃은 일이 여전히 마음에 걸려서 그래?”

“……정엽.”

“이젠 나도 알아. 내가 너를 제대로 배려하지도, 위로해 주지도 못해서 상처 입혔다는 거. 그래서 네가 향주로 떠나자마자 내가 직접 한수로 가서 아이를 수습해 사찰에 봉안했어. 너를 힘들게 했던 시간들은 함께하며 두고두고 갚을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엽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연주의 안타까운 눈빛, 표정, 말투. 이번에도 그가 내놓은 답이 틀렸고, 여전히 연주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번에도 연주가 품에서 도망쳐 버릴 것만 같았다. 설령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해도 지금은 뭐든 지껄여야 했다.

“아뇨.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나 연주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불행 그 자체였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좌절과 분노가 꿈틀거리며 정엽의 마음을 헤집었다. 이 감정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강렬했고, 또 참혹했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내가 당신의 운명과 어울리지 않는 나약한 사람이란 얘길 하고 있는 거예요.”

연주는 정엽이 황제가 되길 바랐지만, 그의 옆자리에 서게 되는 순간 따를 책임과 의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황후, 태자비, 왕비. 그 무엇이 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연주에게는 황실의 잔혹한 세파를 견딜 만큼 강인한 마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간 황실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받아 왔기 때문이다.

정엽의 아내로 지내는 동안, 연주는 아들을 미워하는 황제 때문에 매일 살얼음판을 걸으며 주변의 된서리를 맞았다. 자식을 앞세우는 고통도 맛봤다.

그것으로 삶의 불행이 끝났다면 괜찮았을까. 신은 얄궂게도 황궁 한복판에서 정엽과 다시 만나게 했다. 그러곤 이미 죽어 차디찬 땅속에 묻힌 아이의 존재를 일깨우듯, 그녀를 가장 낮은 곳으로 처박았다.

영항, 황궁에서 가장 비천한 자들이 모인 그곳에서 나는 무슨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던가. 마지막 존엄을 위해 곡기를 끊고, 금수만도 못한 자에게 농락당하다 우물에 내던져진 일이 아직 뇌리에 생생했다.

뿐인가. 권력에 눈이 먼 태자 때문에 적하 행궁의 거대한 호수에 빠져 죽을 뻔한 일도 있었고, 여인으로서 견디기 힘든 일도 겪었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황궁 사람 모두가 저를 해치지 못해 안달했다.

물론 연주 또한 사람인지라 음모를 꾸미는 자들에게 화가 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고난이 반복될수록 분노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내일은 누가 나를 노릴까. 또 무슨 함정이 나를 기다릴까. 연주는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서웠다.

그러니까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자신의 결정은 옳았다. 이런 나약한 마음으로는 절대로 정엽을 지켜 줄 수도, 그에게 도움이 될 수도 없을 테니까.

“당신은 어깨에 짊어진 게 많은 사람이에요. 나는 당신이 소중하지만, 당신의 고단한 삶을 분담할 여력은 없어요.”

“그래서 내가 다 버리겠다잖아. 한수로 돌아가자고 하잖아. 너 없인 아무 의미도 없다고!”

“그럼 왜 하필 한수죠?”

“……뭐?”

“당신도 모든 걸 내려놓고 나와 떠나는 게 불안한 거잖아요. 그러니 당신이 가장 익숙한 한수를 목적지로 삼은 거고요.”

“…….”

“지금의 태자가 아니더라도 훗날의 누군가는 반드시 당신을 위협할 테니까. 그래서 최대한 수도에서 멀어지려는 거잖아요.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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