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누군가의 외침대로 행렬을 습격한 게 비적 떼라면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금은보화를 쓸어 담는 일에 더 집중해야 맞았다.
하지만 주변에는 물건을 챙기느라 옥신각신하는 분위기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죽고 죽이는 잔혹한 소음만이 가득했다.
삶의 종말을 예견한 연주는 어둠으로 가득 찬 가마 안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모아 쥐었다. 그렇게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끊임없이 이어지던 소란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이제 사람이 내지르는 비명보다 소름 끼치는 적막이 주변을 에워쌌다.
“제발, 제발…….”
연주는 누구를 향해 애원하는지도 모른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벅저벅, 꽃가마를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커졌다. 연주는 본능적으로 가마 벽에 최대한 붙어 앉았다.
잠시 후, 가마 문에 질린 빗장이 덜그럭 풀렸다. 두꺼운 붉은 비단이 걷히고, 휘늘어진 수정렴 사이로 커다란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이리 와.”
겁에 질린 채 낯익은 손을 확인한 연주가 울컥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이 손과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혹시 이 모든 게 제 간절함이 낳은 환상이 아닐까. 연주는 떨리는 손을 그에게 조심스럽게 맡겼다. 단단한 손이 그녀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고는, 굵은 엄지로 작은 손등을 쓸었다.
보드라운 살결의 감촉으로 가마 안의 여인이 제가 찾고 있던 정인임을 확신한 사내는 연주를 캄캄한 어둠 속으로 끌어냈다. 그 손길에 모든 걸 맡긴 연주는 감옥 같던 꽃가마에서 벗어났다.
“…….”
선혈이 낭자하고 시체가 넘치는 아수라장 한가운데, 홀로 우뚝 선 정엽이 연주의 시야에 가득 찼다.
다음 순간, 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삭풍에 밀려나며 휘영청 밝은 달빛이 쏟아졌다. 살랑이는 면사를 통해 보는 정엽은 온통 붉기만 해서, 꼭 지옥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 영원히 죽지 않을 나의 불사왕이로구나.’
그 잔혹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맥이 풀린 연주가 스르륵 무너져내렸다. 정엽은 연주를 품에 가볍게 들어 안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집으로 가자.”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낮은 목소리가 연주의 영혼을 잠식했다.
* * *
정엽은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석을 차지한 도적처럼 달과 별을 피해 암흑 속을 질주했다. 먼동이 트기 전에 도착한 곳은 그가 그녀와 처음 만난 곳이자, 그가 아는 가장 안전한 은신처였다.
아무도 없는 경수당에 도착한 정엽은 품에서 한시도 놓은 적 없던 연주를 마침내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연주를 되찾은 순간, 그의 가슴에 맨 처음 끓어오른 감정은 분노였다. 정엽은 이리로 오는 내내 거슬렸던 붉은 너울을 신경질적으로 끌어 내렸다.
“…….”
사람을 유혹하는 강렬한 색채 아래, 가련하게 젖은 연주의 말간 얼굴이 드러났다.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심장이 화살에 꿰인 것처럼 뻐근한 통증이 일었다.
이것은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지독한 불치병. 사람의 피를 말려 죽게 만드는 상사병.
스멀스멀 들불처럼 타오르는 병증을 감지한 정엽이 홀린 듯 연주의 입술을 탐했다. 버들가지 같은 허리를 절박하게 끌어안고, 힘에 밀려 꺾인 작은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친 채 다디단 숨결을 거침없이 빨아들였다.
맞닿은 입술을 그간의 원망을 표출하듯 깨물고 씹어 대다가, 숨이 달려 자연스럽게 벌어진 잇새를 파고들어 혀를 얽었다. 약탈하듯 집요한 입맞춤이 길게 이어지자, 머잖아 힘겨워하는 연주의 숨소리가 정엽의 귓전을 어지럽혔다.
“흣…….”
상대를 배려하기보다 늘 자신의 쾌락에 몰두하는 데 익숙했던 정엽이 간신히 입술을 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좀 전까지 한 덩어리로 뒤엉켜있던 입술 새로 터지는 뜨거운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제 보니 저를 올려다보는 연주의 눈가가 붉었다.
“왜 울어.”
이 상황이 두려운가?
아니면 싫은 건가?
정엽이 연주의 속마음을 읽기 위해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연주는 어느새 눈물 고인 눈으로 저를 가련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왜…….”
언제부터인지 이 여자가 울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저를 향해 원망을 쏟아내던 영항에서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연주의 눈물이 뭘 의미하는지, 이럴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수식을 풀 때처럼 명쾌한 답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엽은 마음 가는 대로 연주를 품에 안았다. 그리곤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그녀의 작은 등을 느리게 토닥였다.
“괜찮아.”
“…….”
“괜찮을 거야.”
대체 뭐가 괜찮을 거라는 건지.
그러나 연주를 안심시키고 싶은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정엽은 연주의 젖은 눈과 뺨을 가볍게 입술로 훑으며 눈물 자국을 지웠다. 당황한 듯 잠시 굳어졌던 연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촉촉하게 젖은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봄 나비처럼 나풀거렸다. 그게 참 어여뻐서, 정엽은 연주의 오뚝한 코끝에 짧게 입 맞추었다.
연주는 오랜 고민 끝에 머뭇머뭇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정엽은 그녀의 용기에 화답하듯 작고 따스한 손바닥을 당겨 짙게 입술을 비빈 뒤, 그녀에게 길든 짐승처럼 온순히 제 뺨을 맡겼다.
연주는 오랜 근심으로 수척해진 정엽의 얼굴을 보듬고, 험악하게 주름진 그의 미간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눌러 폈다. 그녀는 정엽의 존재를 확인하듯 날렵한 얼굴선을 따라 수려한 눈, 코, 입을 신중하게 덧그려 보고는, 정엽의 단정한 입술 위에 살포시 제 입술을 포갰다가 멀어졌다.
“……보고 싶었어요.”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비처럼 온화한 고백에 정엽의 가슴이 뛰었다. 비록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연주의 고백에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용솟음쳤다. 정엽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연주를 원앙금침 위로 밀어 눕혔다.
다시 혼례복을 입고 돌아온 아내는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순식간에 연주의 몸 위로 올라탄 정엽은 꽃처럼 벌어진 입술을 삼켰다. 단단히 여며진 앞섶을 잡아 찢듯 벌리고, 탐스러운 가슴이 드러나자마자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흣……!”
정엽은 연약한 살집을 멋대로 물고, 빨고, 주물러 댔다. 잘 익은 복숭아를 깨문 것처럼 입 안 가득 단맛이 돌았다. 그러나 연주의 입술은 삼킬수록 갈증이 일었다. 유려한 여체는 맛볼수록 허기가 돌았다.
“하아…….”
마지막 기억 속의 파리한 모습과 달리, 싱그럽게 농익은 자태가 눈부셨다. 손으로 굴곡진 능선을 훑는 것만으로 성마르게 몸이 달았다.
자제할 수 없는 욕정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품에 가둔 몸을 남김없이 씹어 삼키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를 되찾고자 공을 들인 건 고작 하룻밤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정엽은 당장 붉은 속살을 가르고 온몸으로 짓이기고픈 욕구를 간신히 뿌리쳤다. 꽃향기에 취한 나비처럼 힘겹게 입술을 떼자, 별처럼 맑은 눈망울이 따라왔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샘솟았는지, 연주는 가느다란 팔로 제 목을 끌어안은 채였다.
정엽은 연주의 변함없는 다정함이 눈물겨웠다. 예전에 그랬듯 여전히 따뜻하고, 부드럽고, 향기로운 아내가 소중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손으로 흐트러진 연주의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아 주었다. 연주와 시선을 맞추자, 정욕으로 어두웠던 정신이 차츰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기적인 욕망 대신 함께 타오르고픈 소망이 뜨겁게 샘솟았다.
“오늘은 너와 맞춰 볼게.”
정엽이 연주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순간에 정엽의 넓적다리 위에 올라앉게 된 연주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도 아니면서 새삼스러워하긴.
앙큼하리만치 순수한 눈빛이 얄미웠다. 정엽은 사랑을 채근하듯 연주의 가녀린 어깨에 이를 박았다.
“아……!”
어깨에 싸하게 펴지는 통증에 연주가 흠칫 몸을 떨었다. 깨물린 어깨가 꽤 아팠는지, 찌푸려진 순한 눈이 눈물로 반짝였다.
예나 지금이나 특별히 무얼 하지 않아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새삼 아우성치는 분신을 다스리기 위해 연주와 잠시 몸을 뗀 그는 잘록한 허리와 납작한 아랫배를 여유로운 손길로 훑었다.
“흡!”
물 흐르듯 내려온 손끝은 자연스럽게 허벅지 안쪽을 파고들었다. 여린 살결을 음미하듯 천천히 어루만지자, 긴장한 연주가 황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렸다.
정엽은 부끄러워하는 연주를 달래듯 그녀를 다시 품속으로 당겼다. 눈처럼 새하얀 몸 곳곳에 쉼 없이 열꽃을 피웠다.
연주는 초야를 치를 때처럼 눈을 꼭 감고 온몸에 퍼지는 야릇한 쾌감에 몸서리쳤다. 그녀가 희열을 이기지 못하고 뒤챌 때마다 풍만한 가슴이 매혹적으로 흔들렸다.
“내 눈, 피하지 마.”
연주가 더는 눈감지 않고, 고개 돌리지 않고 그와 마주 보는 이 순간이 서로의 욕망이 만나는 유일한 지점이었다. 정엽이 재촉하듯 앙증맞은 가슴 끝을 힘껏 빨아당기자, 대답 대신 한껏 달뜬 신음이 돌아왔다.
간신히 눈을 뜬 연주가 흥분과 설렘이 뒤섞인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뜨거운 시선이 짙게 얽힌 순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개의 심장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정엽은 기다렸다는 듯 연주의 풍성한 치맛자락을 허리 위로 걷어 올렸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그의 너른 어깨와 가슴, 단단한 복근을 더듬던 작은 손이 다급하게 변했다.
하지만 허리춤에 단단히 얽힌 매듭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일각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 십 년을 헤아리는 것처럼 더디게 흘렀다.
점점 거칠어지는 연주의 손길에 정엽의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말초로 쏠린 쾌감이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터져 버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더는 안 돼.”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정엽은 연신 꼼지락대는 연주의 손을 잡아채고 문제의 매듭을 거칠게 뜯어냈다. 비단 끊어지는 소리가 꼭 이성이 날아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다급히 보름달 같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아, 정엽…….”
“사랑해.”
“흑!”
탁한 목소리로 뜨겁게 속삭인 정엽이 가느다란 허벅지를 힘껏 잡아당겼다. 깊이 맞닿은 틈 사이로 세상 그 무엇보다 황홀한 열락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