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지금 협박을 하시는 겁니까?”
채신의 섬뜩한 이야기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사신이 발끈했다.
“전하의 말씀을 해석하는 건 자네의 몫이네. 하지만 자네가 더 잘 알걸세. 연친왕 전하께서 북방의 백융을 어찌 쓸어 버리셨는지 말이야.”
“…….”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네.”
이쯤에서 연친왕이 여전히 화정공주, 아니 연왕비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신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대로 화친을 진행했다간, 언젠가 반드시 위나라 강산이 불사왕의 말발굽에 짓밟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오싹한 한기와 함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하의 뜻을 잘 알았습니다.”
“화친 행렬이 위나라로 출발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두르시게.”
조언을 마친 채신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사신은 채신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보고들은 바를 본국에 전하기 위해 정신없이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정엽은 홀로 유황관에 들어앉아 묵묵히 무기를 살폈다.
오 척에 달하는 검날을 비스듬히 겨눠 보던 정엽은 녹슬지 않도록 발라 두었던 정향 기름을 마른 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아 냈다.
그러곤 상한 부분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후, 검이 잘 들도록 새 수건을 꺼내 검날을 흠 없이 손질했다.
우울하면서도 비장해 보이는 주군을 문밖에서 숨죽인 채 지켜보던 장명은, 정엽이 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자 긴장한 얼굴로 유황관에 들어섰다.
“세자께서 위나라의 사신을 만나 화친을 막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이리 안절부절못하고 계십니까?”
질문을 듣고도 한참 대꾸 없던 정엽이 살피던 검을 내려놓고 말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의 일인데, 미리 준비해서 나쁠 게 무어냐.”
“세자께서는 군주마마의 오라비이고 전하의 충직한 신하입니다. 한번쯤 그분을 믿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번쯤 믿어 보라니. 장명의 말만 들으면 지금껏 정엽이 채신을 철저히 불신해 온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 상황에 벗이자 충신인 그를 믿지 못한다면 누굴 믿겠는가.
“지금 내가 세자를 못 미더워 하는 것처럼 보이느냐?”
“그런 뜻이 아니라…….”
주군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오해를 사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당황한 장명이 다급하게 변명거리를 찾았다.
하지만 정엽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오해 마라. 나는 채신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소기를 믿지 못하는 것뿐이다.”
교활한 자들은 항상 정도에서 벗어난 불시의 일격을 즐겼다. 일부러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어 적을 궁지로 몰아넣고, 자멸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소기의 목을 치는 것보다 연주의 목숨을 구하는 게 최우선인 정엽으로서는 매 순간이 전쟁이었다.
태자의 돌발행동을 염려하는 주군의 마음을 헤아린 장명이 고개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지금 당장 군사들을 모아 언제라도 거병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정엽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명은 빠르게 유황관 밖으로 사라졌다.
“후…….”
이윽고 잘 정돈된 검을 검집에 갈무리한 정엽은 날숨을 가늘게 뱉었다. 평온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의 가슴 속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제 꼬박 하루가 지났으니, 내일모레면 연주의 화친 행렬이 세자부를 떠나리라.
제게 오던 곱디고운 모습으로 다른 사내에게 향할 연주를 상상한 정엽이 턱이 아리도록 어금니를 물었다. 위나라와의 국혼은 연주가 선택한 일이 아닌 걸 알면서도, 뱃속 깊은 곳에서 불덩이가 치솟고 신물이 위장을 뒤집었다.
문득 혼인날 스치듯 보았던 연주의 아리따운 자태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슬을 머금은 장미처럼 청아한 얼굴, 불면 날아갈까 쥐면 바스러질까 염려스럽던 작고 가는 손, 세상의 홍등을 한데 모아 밝혀 놓은 듯한 붉은 혼례복. 그리고…….
잠시 옛일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명치가 뻐근하고 말초에 묵직한 열기가 뻗쳤다.
“더는 누구에게도 뺏길 수 없어.”
다시는 내 사람을 앗기지 않으리라. 거듭 다짐한 정엽이 검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하지만 이런 마음가짐과 별개로, 정엽은 그날 밤 이상할 만큼 불길한 예감에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동이 트기 직전, 아주 불행한 소식을 받아 들었다.
“전하, 태자가 갑자기 일정을 앞당기는 바람에 화친 행렬이 벌써 세자부를 떠났다고 합니다!”
* * *
위나라 사신이 날려 보낸 전서구가 간신히 위나라 수도에 닿은 새벽, 갑자기 연주의 별당으로 한 무리의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이 군사들은 골방에 갇혀 있던 전 상궁과 궁인들을 풀어 주고, 운신이 자유로워진 그들에게 화친 행렬을 빠르게 준비하고 출발시키라는 태자의 밀명을 전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시간이 없다. 서둘러라.”
내내 죽을상을 하고 있다가 화색이 돌아온 궁인들은 가장 먼저 연주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가화와 금란을 별당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고는 연주를 억지로 단장시켜 머리에 붉은 면사를 씌운 뒤, 그녀의 사지를 붙들고 꽃가마에 강제로 밀어 넣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가마를 내려라!”
연주는 굳게 잠긴 가마 문을 두드리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발 빠른 가마꾼들은 위풍당당하게 행렬을 호송하는 군사들의 기세에 힘입어 반나절 만에 조양 땅을 벗어났다.
온종일 가마에서 탈출하려 애쓰다 지친 연주가 흔들리는 꽃가마에 어지러운 머리를 기댔다.
‘설마 오라버니께서 사신을 설득하러 간 일이 잘못된 걸까?’
날벼락 같은 국혼 명령을 받고도 매 순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연주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행렬을 멈추라는 사령의 목소리는 뒤따라오지 않았다.
연주는 점차 불안에 휩싸였다.
‘아니. 어쩌면 이대로 모르는 곳에 끌려가 죽임을 당할지도 몰라. 이 행렬이 정말로 위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잖아.’
흠천감에서 정한 길일과 길시를 무시하고 이렇듯 억지로 끌고 가는 걸 보면, 무탈하게 위나라 왕궁에 도착하는 것조차 장담하기 어려워 보였다.
어느덧 연주의 눈앞에 홀로 깊은 산속에 버려져 흉포한 길짐승의 먹이로 전락하는 제 모습이 그려졌다.
‘내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다니…….’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허망함에 눈물이 차올랐다. 곱게 화장한 얼굴이 갈피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줄기를 따라 엉망으로 번졌다.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오로지 정엽을 위해 공주에게 접근해 곽 귀비 모자의 계략을 알아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해독제를 완성해 황제를 깨웠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또 다시 태자의 계략에 휘말려 죽음의 문턱으로 가고 있다니.
지금껏 무수한 고난과 위기를 헤쳐온 연주지만, 도무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설령 위나라 왕비가 되기 전에 죽더라도 위나라 왕의 여자가 되어 혼백조차 대화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게 아닌가. 정엽을 멀리서나마 볼 수조차 없을 것 아닌가.
매번 저를 이렇듯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걸 보면, 곽 귀비와 태자는 절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악연으로 엮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화를 내고 서럽게 울어 보아도 밤은 찾아왔다. 시린 겨울을 밀어내던 햇살이 사라지고, 꽃가마 지붕 위에 앉아 있던 난새 역시 차디찬 달빛에 휩싸여 자취를 감췄다. 이제 가마는 험준한 산길에 들어선 듯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요동쳤다.
“이럴 수는 없어…….”
홀로 울다가, 웃다가, 끝내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망연자실하게 늘어졌다. 연주는 지친 얼굴로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 황후와 시양공주, 만향방 사람들과 연왕부 사람들, 그리고 정엽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 사람에게 끝내 얼굴 한 번 보여 주지 않고 떠나는구나.”
문득 제발 한 번만 얼굴을 보여 달라던 정엽의 애원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얼굴 한 번 보여 주는 게 뭐 그리 어려워서…….”
정엽을 밀어내고자 매몰차게만 굴었던 순간들이 후회스러웠다. 곱씹을수록 자책이 깊어져 퉁퉁 부은 눈시울이 다시금 뜨거워졌다.
‘그래도 내 죽음으로 당신이 평안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건지도…….’
정엽의 행복을 바라며 그간 몇 번이고 온몸을 내던진 연주였다. 제 발로 연왕부를 떠나기 전에도, 정엽이 다시 수도 조양으로 돌아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새삼스럽게 울며불며 죽음을 맞이할 일이 아니었다. 오늘의 희생을 계기로 정엽이 태자를 끌어내리고 권력의 정점에 올라설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 이생에 사랑 하나만은, 소정엽의 마음 하나만은 얻었으니 됐어.’
그렇게라도 마음을 다잡고 나자 슬픔이 조금 누그러졌다. 다만 회한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이 순간 정엽이 사무치게 그리운 탓이었다.
실은 당신이 나를 따라와 주어 기뻤다고. 실은 당신을 돌려보내고 나서 무척 슬펐다고 말하지 못한 일이 마음에 걸렸다.
“바보같이…….”
연주는 정엽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진심을 꺼내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가마 밖에서 군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병장기가 부딪히는 둔탁하고 날카로운 소리와 누군가의 다급한 고함이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비적이다!”
“비적 떼가 나타났다!”
가마를 에워싸고 있던 궁녀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연주가 탄 가마 역시 와류에 휩쓸린 꽃잎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다 어딘지 모를 곳에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으악!”
“사, 살려 주세요!”
가마 밖에서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튀는 소리, 무참히 살육당하는 자들의 끔찍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연주는 무서운 직감에 얼어붙었다.
‘태자가 나를 죽이러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