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38화 (138/161)

138화.

“가화야!”

내내 굳어 있던 연주의 표정이 반가운 얼굴 앞에서 풀어졌다.

양손에 각각 전 상궁과 경운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던 가화는 곧장 두 사람의 이마를 세게 맞부딪쳐 제압했다. 그리곤 전 상궁의 손에 들려 있던 두루마리를 빼앗아 연주에게 건넸다.

“여,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이 광경을 보고 잔뜩 겁을 집어먹은 송취가 군사를 부르기 위해 별당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송취가 방문을 연 순간, 그 앞에 버티고 서 있던 금란이 익살스러운 미소와 함께 대뜸 몽둥이를 휘둘렀다.

퍽-!

묵직한 몽둥이는 송취의 머리를 정확하게 때렸다. 한순간에 기절한 송취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귀비마마께서 이 일을 아시면 마마를 가만히 두시지 않을 겁니다!”

가화와 금란의 기습에 당황한 전 상궁이 바락바락 목청을 높였다. 연주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영방궁에서 오늘 일을 알게 된다면 곤란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너다.”

“먼저 소란을 피운 쪽은 마마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네 말은, 귀비께서 나를 죽여 화친을 무산시키기라도 하실 거란 뜻이냐? 그럼 민해공주가 다시 위나라로 떠나게 될 텐데, 귀비께서 퍽이나 그리하시겠구나.”

“그, 그건……!”

연주의 지적에 곤혹스러워하던 전 상궁이 말을 더듬었다.

태자와 귀비가 이번 화친혼에 연주를 등 떠민 건 순전히 민해공주를 타국으로 시집보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귀비는 당연히 별당에서 소란이 벌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리라.

이 사실을 깨달은 전 상궁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하지만 이대로 연주에게 질 수는 없었다.

“그, 그래서. 이 계집들과 도망가 화친을 피하기라도 하실 작정입니까?”

“그럴 리가 있나. 당장 내가 화친을 거부하면 동궁의 의도대로 온 가족이 죄인으로 전락할 것 아니냐?”

“하면…….”

“우선 너희들부터 전부 골방에 가둬야지.”

침착하게 전 상궁에게 응수한 연주가 가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제 주인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여 보인 가화가 전 상궁의 팔을 뒤로 꺾어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네 이년!”

순식간에 제압당한 전 상궁이 눈을 까뒤집으며 발악했다.

“이것 놓아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느 안전이냐니. 연주는 고작 상궁 주제에 같잖은 자존심을 세우는 전 씨가 우스워 실소를 터뜨렸다.

“감히? 그러는 너는 공주인 내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냐?”

“흥, 공주라고? 진짜 황제의 딸도 아닌 주제에……!”

짜악-!

연주는 궁지에 몰리고도 도무지 윗사람을 향한 존중을 모르는 전 상궁의 뺨을 후려쳤다. 나이가 들어 볼품없이 늘어진 상궁의 볼이 금세 붉게 부어올랐다.

놀란 전 상궁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연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아무리 귀비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황실의 노비에 불과하다. 내가 진짜 공주이든 가짜 공주이든 이 자리에서 당장 너를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설마 진짜 나를 죽이기라도 할 셈인가?

좀 전까지 귀비의 권세를 믿고 오만하게 행동하던 전 상궁의 눈에 얼핏 두려움이 비쳤다. 그 속을 훤히 꿰뚫은 연주가 전 상궁을 향해 곱게 웃었다.

“너는 내게 위나라에 풍속과 예법을 가르치러 온 사람이다. 한데 너는 네 본분을 잊고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댔지.”

“…….”

“잊었더냐? 황궁에서 주인의 물건을 훔치는 자들은 모두 손발을 잘라 궁 밖으로 내치는 것이 법도니라.”

“……그, 그런!”

“하지만 오늘은 내가 피를 보고 싶지 않아 너희를 골방에 가두는 정도로 그칠 것이다. 하니 저항 말고 얌전히 따르거라. 앞으로 내 시중은 여기 있는 금란과 가화가 들게 될 테니 염려 말고.”

화사하게 미소 짓던 연주가 눈 깜짝할 새 웃음기를 지우며 싸늘하게 말했다.

“치워라.”

“예.”

연주의 명령에 전 상궁과 궁녀들의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 가화는 침통한 표정의 궁인들을 밖으로 끌고 사라졌다. 상황이 정리되자 금란이 곧장 다가와 호들갑을 떨었다.

“아가씨, 밤새 별일 없으셨어요? 다치신 곳은요?”

“나는 괜찮다. 한데 너희는 어떻게 별당으로 들어온 것이냐? 주변을 군사들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을 텐데.”

“아, 그거요? 별당 뒤편이 세자 저하께서 지내시는 정방의 후원과 맞닿아 있잖아요. 군사들도 감히 정방 주변은 얼씬대지 못하기에 그쪽 담을 훌쩍 넘어 들어왔지요!”

뿌듯한 얼굴로 무용담을 늘어놓은 금란이 연주를 부축해 의자에 앉히고 말을 이었다.

“이제 염려 마세요, 아가씨. 세자 저하께서 화친을 무산시키기 위해 오늘 밤 위나라 사신과 담판을 짓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이 상황도 정리될 거예요.”

“……그래?”

연주는 생각지 못한 희소식에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당장 이틀 뒤면 화친 행렬이 수도를 떠날 텐데, 과연 그 안에 위나라 사신이 본국의 왕과 교감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심란함을 감추지 못하던 연주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화친 행렬이 움직이기 전에 일이 매듭지어지면 가장 좋겠지만, 설령 뜻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국경을 넘기 전에 화친이 무산되면 돼.’

괜찮아. 괜찮을 거야.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연주가 스스로 다독이듯 정엽의 그림을 품에 안았다.

오라비가 알면 무척 서운해하겠지만, 연주는 이 순간 위나라 사신과 담판을 지어야 하는 오라비보다 저 때문에 속을 끓이고 있을 정엽이 더 안타깝고 그리웠다.

* * *

그날 밤. 채신은 위나라의 사신이 머무는 모영관(慕榮館)을 찾아갔다. 사신은 갑작스러운 만남에도 천연덕스럽게 그를 환대했다.

“이 늦은 시간에 왕세자께서 모영관을 직접 찾아오시다니 별일입니다.”

세자를 손수 모영관 안으로 안내한 사신이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하지만 채신은 사신과 마주 앉아 차나 마실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접견을 요청했는데 매번 바쁘다며 거절하기에 가장 한가할 것 같은 때로 골라 왔네.”

“저런,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미 태자로부터 연친왕과 평해왕부의 세자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주의를 들은 터였다. 채신을 일부러 피해왔던 사신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재차 차를 권했다.

“드십시오.”

채신은 제 몫의 찻잔을 쥐는 대신 상대방 쪽으로 밀어냈다. 긴히 할 얘기가 있다는 뜻이었다. 채신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던 사신은 차를 한 모금 홀짝인 뒤 심드렁하게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말씀해 보십시오. 저를 만나고자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위나라의 국왕을 설득해 곧 있을 화친혼을 없던 일로 만들게.”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양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지.”

“이번 화친혼은 세자의 바람대로 양국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추진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화친혼이야말로 양국의 평화를 위한 일이지요. 이 밤중에 헛소리나 지껄이자고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능글맞은 어투였지만 사신의 말에 뼈가 있었다. 채신이 지지 않고 일침을 가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는 며칠 전 갑자기 바뀐 화친 공주의 정체를 알고 있지 않은가?”

“그야…….”

설핏 난처한 표정을 짓던 사신이 말끝을 흐렸다.

일국의 국모가 처녀가 아닌 건 치명적인 흠이나, 태자는 이를 눈감아 주면 향후 10년간 위나라에서 대화국에 바치는 조공의 양을 절반으로 줄여 주겠다고 약속했다. 위나라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란 뜻이었다.

더군다나 본국에서도 이 제안을 무척 반기는 분위기라, 이제 와 화친을 무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연친왕과 화정공주는 부부의 연이 끊어진 지 오래라고 들었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는 혼인을 왜 물러야 합니까?”

“태자는 변덕이 심한 자일세. 정말로 지켜질지 알 수 없는 약속에 기대어 실리를 잃어서야 되겠는가?”

이 자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사신은 암암리에 위나라 왕과 태자 사이에 오간 밀약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채신 앞에서 적잖이 당황했다. 채신이 태연히 뒷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짜 공주보다는 진짜 공주가 낫지 않겠는가? 또, 만약 이 혼인이 전쟁을 위한 불씨로 이용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지금 전쟁이라고 하셨습니까?”

사신은 믿기 어려운 얘기를 들은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한숨을 내쉰 채신이 입을 열었다.

“태자는 조정을 장악하고 백성의 신망을 얻기 위해 전쟁을 벌일 구실을 찾고 있네. 만일 태자에게 정말로 위나라와 우호 관계를 이어 갈 의지가 남아 있었다면, 왜 내 누이가 하루아침에 화친 공주로 둔갑 되었겠는가?”

“그야…….”

“게다가 태자가 위나라 국왕에게 한 약속은 무사히 동궁을 지킨 뒤에나 유효한 것임을 잊지 말게.”

채신이 밀약의 맹점을 정확히 지적하자, 긴장한 사신이 몸을 바로 세웠다.

‘설마 연친왕이 태자를 밀어내려는 것인가?’

채신은 사신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 안다는 듯 여유롭게 말했다.

“조만간 태자는 동궁의 자리를 내놓게 될 걸세. 태자가 동궁을 차지한 과정에 여전히 의혹을 제기하는 자들이 많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는가?”

“그렇다면…….”

“만약 지금의 태자가 동궁의 지위를 잃으면 가장 유력한 황위 계승자는 북방에서 맹위를 떨친 연친왕 전하일세. 연친왕 전하께선 적장자이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앞다투어 불사왕이라 칭송할 만큼 사랑받고 계시지.”

이 말이 사실일까? 정말로 태자가 권력에서 멀어지고 연친왕이 대화국의 새 황제가 되는 것일까?

태자가 승리할 일말의 가능성과 자그마치 10년 동안이나 조공을 면제해 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신이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연친왕이 왕비와 헤어진 지도 벌써 4년…….”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가?”

답답하다는 듯 사신을 나무란 채신이 마주 앉은 탁자를 위협적으로 내리치곤 살벌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본 자를 여기로 보낸 연친왕 전하께서 말씀하셨네.”

“…….”

“만약 위나라 국왕이 국혼을 포기하지 않으면 위나라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섬멸할 것이라고. 당신께서 지도에서 영원히 위나라를 지우고, 그 땅 위에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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