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송구하옵니다.”
거센 발길질에 일순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채신이 묵묵히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이미 감정이 격앙된 정엽은 쉬지 않고 그를 다그쳤다.
“어디 변명이라도 해 봐라. 네 누이는 지금껏 뭘 하고 돌아다닌 것이냐? 네놈은 또 뭘 했고!”
“…….”
“왜 대답이 없느냐?”
“안에서, 안에서 모두 말씀드리겠사옵니다.”
이 와중에도 주변의 눈을 의식한 채신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의연한 벗 앞에서 정엽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정강이를 걷어차여도 일말의 억울함도 없고, 이렇다 할 변명조차 하지 않는 채신의 모습은 오히려 무죄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 모르고 치솟던 주군의 노기가 주춤해진 것을 눈치챈 채신이 경수당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엽과 마주 앉은 그는 곧바로 지금까지 전하지 못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얼마 전 연주가 폐하께서 귀비 모자에게 오석산으로 조종당하고 계신단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뭐?”
“몇 달 전 곽 귀비와 태자가 궁중에 도사를 들인 일을 기억하십니까? 그자가 오석산을 만들어 바치고 있었습니다. 오석산을 단약으로 둔갑시켜 폐하께 바치고, 해독제와 오석산을 번갈아 쓰며 지금껏 정사를 주무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럼 연주가 갑자기 영방궁에 드나든 것도 그 이유 때문이라는 거냐?”
“예. 사연은 복잡하지만, 진상을 파헤치고 도사를 회유할 기회를 잡고자 일부러 민예공주와 접촉한 모양입니다.”
황제의 안위가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제 목숨을 담보로 영방궁에 드나들 생각을 하다니. 정엽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채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뒷말을 이었다.
“사실을 확인한 연주는 곧장 황후마마의 도움을 받아 도사를 빼돌리고 해독제를 준비 중이었지요.”
“그 말은…….”
그러니까 지금, 연주가 또 나를 위하려다 위험에 처했다는 건가?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느냐!”
눈앞이 아득해진 정엽이 절규했다.
지금껏 연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오직 그녀의 바람대로 애써 앞만 보며 달리던 정엽이었다. 한데 그사이에 연주가 저를 위해 사지로 뛰어들었단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일국의 제왕이 약물에 조종당하고 있었단 것도 그렇지만, 자신을 외면하기 바쁘던 연주가 실은 저를 위해 헌신하고 있었단 사실이 정엽을 뒤흔들었다.
이번엔 태자가 연주를 궁지로 모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죽여 없앨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정엽이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장명! 용무군의 모든 군사를 집결시켜라!”
정엽은 곧바로 경수당 한쪽에 놓여 있던 장검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섰다. 이미 그의 눈앞에는 황궁의 정예군과 대치하는 용무군 군사들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극한의 분노와 두려움에 잠식된 정엽의 눈동자는 흡사 미치광이처럼 초점이 없었다.
“전하, 멈추십시오!”
당황한 채신이 정엽이 움켜쥔 장검을 그러쥐며 앞을 막아섰다.
“이대로 군사를 일으키시면 역도가 되시는 겁니다! 태자의 노림수가 어디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연주를 제거하는 것뿐이겠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연주가 죽는다. 그리고 연주가 없으면 내가 죽어.”
태자가 화친 행렬이 떠나기 사흘 전에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명확했다. 평해왕이 반발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채신이 해광성에 소식을 전하고, 다시 평해왕이 답신을 보내올 때쯤이면 연주의 화친 행렬은 이미 위나라로 떠나고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게 태자의 계략이라 하더라도, 정엽은 당장 군사를 일으켜 연주를 위해 싸워야 했다.
일평생 황제를 향해 칼을 겨누게 될 거라며 죄인 취급을 받고 살아온 삶이 아닌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천지개벽을 꿈꾸어 본 적은 없지만, 이제라도 부황의 기대에 부응하는 게 최선이라는 현실이 기막혔다.
“제가! 제가 위나라 사신과 만나 담판을 짓겠습니다. 반드시 이 혼인을 막겠습니다! 그러니 전하……!”
“우습구나.”
실없이 헛웃음을 터뜨리던 정엽이 더는 채신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냉담하게 대꾸했다. 채신은 절박한 얼굴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호소했다.
“연주를 지키는 게 지금 전하께 가장 중요한 일이란 것을 압니다. 제게 딱 이틀만 말미를 주십시오. 반드시 연주가 위나라로 떠나지 못하게 막겠습니다!”
“실패한다면?”
“그땐 제가 앞장서서 검을 들겠습니다. 전하께서 어디로 향하시든 그 곁에서 함께 싸우다 가장 먼저 죽겠습니다!”
“하아…….”
채신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당장 기둥에 머리라도 박을 태세였다. 그는 책사이기 이전에 절친한 벗이었다. 채신의 비장한 얼굴을 흘끗 쳐다본 정엽이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연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던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했다.
“화친 행렬이 출발하기 전까지다. 그전에 화친을 무산시켜라.”
“예.”
“위나라 왕에게 전해라. 국혼을 포기하지 않으면 본 왕이 위나라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섬멸할 것이라고.”
“……전하.”
“황명 따윈 필요 없다. 내가 지도에서 영원히 위나라를 지우고, 그 땅 위에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 할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짧은 대답으로 제 의지를 표한 채신이 정엽이 들고 있던 장검을 넘겨받았다. 검을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가져다 놓은 그는 뒷걸음질로 내실에서 물러나 바람처럼 사라졌다.
홀로 남은 정엽은 채신이 사라진 문 너머를 바라보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연주를 향한 염려와 그리움에 시시각각 피가 말랐다.
* * *
황실에서 나온 궁인들은 밤새 연주가 도망치거나 들보에 목을 매지 않을까 번을 서 가며 그녀를 감시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연주가 상황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듯 보이자 금세 기세등등해졌다.
다음 날, 전 상궁은 날이 밝기 무섭게 연주에게 위나라의 풍습과 왕실 예법을 정리한 서책 한 권을 던졌다.
“시간이 촉박하니 위나라에 관한 예법과 풍습을 배우는 것은 공주께서 이 책을 직접 읽으시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
“그럼 저희는 공주께서 떠나시기 전 필요한 물건을 챙기겠습니다.”
연주를 윗전으로 생각하기는 하는 건지. 입이 찢어지라 하품한 전 상궁이 제 곁에 서 있는 궁녀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를 받은 궁녀들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 방 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먼 길을 떠날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이라면 평소 즐겨 입던 의복과 장신구, 패물 정도가 고작일 텐데. 궁녀들은 엉뚱하게도 편지를 보관하는 함이나 서책부터 끄집어내 살폈다.
“이게 뭐지?”
혹여 서책 사이에 끼인 쪽지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궁녀는 냉큼 그 자리에서 내용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삐죽이며 어딘가로 휙 던져버리기도 했다.
연주는 이쯤에서 그들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간 풍 대인이나 황후마마와 주고받은 서신을 확인하자마자 태워 버리길 잘했군.’
아무리 저들이 별당을 뒤진들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을 테지만, 엄연히 주인이 있는 방을 멋대로 헤집고 다니는 건 그 자체로 불쾌한 일이었다.
탁자에 앉아 성의 없이 책장을 넘기던 연주는 물건을 다루는 손길이 점점 거칠어지는 궁녀들의 뒤통수를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연주의 따가운 시선을 받은 전 상궁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궁녀들은 신경 쓰지 말고 마마께선 책이나 열심히 보십시오.”
“주변이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글자가 눈에 들어오겠느냐?”
“장차 위나라 왕비로 책봉되실 마마께 피와 살이 될 책입니다. 게으름을 피우시면 마마의 앞날만 고달파질 뿐이지요.”
신경질적인 연주의 태도에 혀를 찬 전 상궁이 쏘아붙였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덧붙이는 말이 가관이었다.
“위나라 국왕과의 혼인이 마음에 드시지 않더라도 지난번처럼 혼사를 무를 수는 없을 테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읽어 두십시오.”
“살아남기 위해서라. 위나라의 국왕이 나를 잡아먹기라도 한다더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인은 마마의 자질이 부족하여 이제는 부군에서 오라버니가 되신 연친왕 전하의 얼굴에 먹칠이라도 하게 될까 봐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뭐라?”
도를 넘은 전 상궁의 모욕에 연주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더는 그녀의 방자함을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연주가 책을 소리 나게 덮은 때였다.
“마마님! 이것 좀 보십시오!”
방 안을 뒤지던 궁녀 경운이 장롱 깊숙이 숨겨진 물건을 꺼내 들고는 다급히 전 상궁을 찾았다.
‘저건……!’
전 상궁과 동시에 고개를 돌린 연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경운에 손에 들린 건 나무로 만든 길쭉한 상자. 그 안에는 얼마 전 정엽이 선물하고 간 서화가 담겨 있었다.
“일개 궁녀 따위가 감히 공주의 물건에 손을 대다니! 죽고 싶으냐? 당장 내려놓고 물러서라!”
다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연주가 경운에게 언성을 높였다. 연주의 호통에 놀라 그대로 얼어붙은 경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연주의 반응을 통해 경운이 찾은 물건이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물건임을 직감한 전 상궁이 소리쳤다.
“상자를 내게 다오!”
“예? 예, 마마님!”
경운은 전 상궁의 호령에 냉큼 상자를 그녀에게 건넸다. 연주는 정엽과의 추억이 깃든 서화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책상을 돌아 나가려 했다.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꺄악!”
갑자기 누군가에게 머리채가 잡혀 고개가 뒤로 꺾인 경운과 전 상궁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