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한편, 아직 제게 닥쳐올 불운을 모르는 연주는 풍 대인이 온 나라에 퍼져 있는 인맥을 동원해 구해 준 한동향 재료를 살피고 있었다.
“봄의 백모란 꽃술, 여름의 흰 연꽃 꽃술, 가을의 하얀 부용화 꽃술, 겨울의 백매화 꽃술…….”
그리고 우수(雨水)에 내린 빗물, 백로(白露)에 내린 이슬, 상강(霜降)에 내린 서리, 소설(小雪)에 내린 눈까지.
상자에 담긴 재료를 모두 확인한 연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주 곁에서 상자의 내용물을 함께 살피던 가화가 기뻐하며 말했다.
“처음 한동향의 재료를 전해 들었을 때는 이런 것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했는데. 역시 풍 대인은 못 구하는 물건이 없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어쩌면 하늘이 우리 모두를 버리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 자, 이제 이것들을 어서 도사에게 전해 주어라.”
“예, 아가씨.”
희미한 미소와 함께 상자의 뚜껑을 덮은 연주가 가화에게 덧붙였다.
“참, 표 집사가 홍검 부자에게 집을 내어 주었다고 들었다. 정작 표 집사의 식솔들이 불편하게 지내고 있을지도 모르니 집안을 잘 둘러보고 부족한 물건이 있으면 넉넉하게 채워 주거라.”
“염려 마십시오.”
웃으며 대답한 가화가 야무지게 짐을 꾸려 별당을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문밖에서 요란한 인기척이 들렸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연주가 가화의 등을 떠밀었다.
“아무래도 앞문은 안 되겠다.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별당 뒤편으로 떠나거라.”
“예? 예…….”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가화는 연주의 뜻대로 별당 뒤로 난 창문을 뛰어내렸다. 가화가 담장 너머로 사라진 것까지 확인한 연주는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제야 별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별당 대문 앞에는 세자부 하인들이 황실 태감과 상궁의 진입을 막기 위해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별당 안으로는 한 발자국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황명을 받고 나온 사람들이다. 일개 하인 따위가 어찌 우리 앞을 막아선단 말인가!”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무슨 사달이 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연주가 여러 사람이 뒤엉켜 아수라장으로 변한 대문을 향해 소리쳤다.
“대낮부터 이게 다 무슨 소란이냐!”
“승설군주는 성지를 받드시오!”
황명에 이어 이번엔 성지라?
연주는 태감의 말에 코웃음 쳤다. 아무래도 도사를 빼돌린 일에 제가 연관됐음을 눈치챈 태자가 또 엉뚱한 일을 벌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 일도 황제가 정신을 차리고 나면 모두 태자의 죄가 될 터. 해독제가 완성되는 날까진 태자의 만행을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을 테니 어디 들어나 보잔 심정이 앞섰다.
연주는 하인들이 서로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있는 대문 가로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가씨, 나오시면 안 됩니다.”
“황제 폐하께서 내게 성지를 내리셨다지 않으냐. 모두 물러나라.”
필사적으로 버티던 하인들이 연주의 말 한마디에 양옆으로 갈라졌다. 연주는 성지를 받기 위해 태감 앞에 몸을 낮췄다.
이윽고 샛노란 성지를 펼친 태감이 우렁찬 목소리로 황명을 낭독했다.
“승설군주를 화정(和程) 공주로 봉해 위나라 국왕과의 화친혼을 명하니, 공주는 대화국 황실로부터 받은 은혜를 마음에 새겨 두 나라의 친선을 위해 힘쓰라!”
나를 공주에 책봉한다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경악한 연주가 석상처럼 얼어붙었다. 하지만 태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화친의 절차에 대해 떠들어 댔다.
“화친 행렬은 당장 사흘 뒤 출발입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공주 책봉 예식은 따로 없고, 귀비마마께서 공주를 위해 위나라의 풍속과 왕실의 예법을 가르칠 궁인들을 내려보내셨으니 잘 배워 두십시오.”
태감의 말이 끝나자, 그의 뒤편에 서 있던 상궁과 궁녀 둘이 연주에게 다가와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소인, 앞으로 화정공주마마의 교육을 담당할 전 상궁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장차 마마의 시중을 들게 될 아이들이지요.”
상궁이 손짓하자 한 발 앞으로 나온 궁녀들이 연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궁녀 경운이라 하옵니다.”
“소인은 송취라 하옵고, 경운과 자매이옵니다.”
궁녀들이 자기소개를 마치자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전 상궁이 으름장 놓듯 말했다.
“앞으로 소인이 마마께 많은 것을 가르치게 될 것이옵니다.”
“…….”
“한데 황실의 공주께서 계신 곳이 이리 소란스러워서야……. 쯧! 뭣들 하느냐!”
상궁의 호통에 경운과 송취가 재빨리 별당 앞뜰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대문 밖으로 몰아냈다. 두 궁녀가 간신히 대문의 빗장을 지르자, 뒤이어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었는지 모를 군사들이 별당의 담장을 따라 번쩍이는 창검을 세웠다.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던 것처럼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속절없이 별당에 갇히게 된 연주는 저를 잡아먹을 듯 맹렬한 눈빛을 쏘아대는 상궁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애꿎은 입술만 짓이기는 것뿐이라, 이내 연주의 속이 절망으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 * *
그날 오후, 경수당.
“다시 한번 말해 봐라. 뭐라고?”
살얼음처럼 서늘한 정엽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낮게 울렸다. 그렇지 않아도 연주의 일이라면 신경을 곤두세우기 일쑤인 주인인지라, 소식을 전하는 양해 역시 이런 반응을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이번 일 만큼은 전과 달랐다. 되묻는 목소리가 평온하게 느껴질 만큼 무섭게 돌변한 정엽의 얼굴을 확인한 양해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답했다.
“조금 전, 군주께서 황실의 공주로 책봉돼 위나라 국왕과 혼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
“승설군주께서 화정공주로 봉해지시어 사흘 뒤면 위나라로 떠나신다고…….”
흡사 미치광이를 연상케 하는 주인의 눈빛에, 양해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더는 주인을 마주 보고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콰앙-!
정엽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가 좀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나가떨어지며 육중한 소리를 냈다.
“전하!”
묻지 않아도 주인의 목적지가 어디일지 뻔했다. 양해는 어느새 경수당 앞마당을 가로지르고 있는 정엽의 앞을 막아서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지금 세자부에 가신들 군주마마를 만나실 수 없습니다. 이미 태자가 보낸 군사들이 별당을 에워싸고 있어요!”
“비켜라!”
“차라리 세자 저하를 불러 상의하십시오. 소인이 당장 왕세자를 모셔 오겠습니다!”
양해는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필사적으로 정엽의 다리에 매달렸다.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만은 막아보려는 그의 애원이 처절했다.
“군주마마를 위해서라도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지금 전하께서 세자부로 달려가시면 되레 군주마마의 처지만 더 곤란해지시지 않겠습니까!”
터질 것 같은 분노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정엽은 양해의 읍소에 실낱같은 이성을 간신히 붙들었다. 길게 숨을 뱉은 정엽이 한 글자, 한 글자 짓씹었다.
“한 식경 안에 채신을 끌고 와라. 그렇지 않으면 내 앞을 막는 자가 누구든……! 숨통을 끊어 놓겠다.”
흥분으로 끊어지는 말마디에서 피비린내 나는 광기가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정엽이 향할 곳이 비단 세자부 별당으로 그치지 않을지도 몰랐다.
눈앞에 온 황궁이 쑥대밭이 되는 살풍경이 펼쳐졌다. 몇 번이고 바닥에 이마를 찧어 대던 양해가 허둥지둥 태감들을 이끌고 왕부를 떠났다.
“제기랄……!”
식지 않는 화기가 죄다 심장으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숨통이 오그라드는 듯한 초조함이 정엽을 덮쳤다.
정엽은 찬 바람 부는 경수당 앞마당을 쉼 없이 서성였다. 당혹감과 분노로 마비됐던 사고는 차츰 한 가지 의문으로 흘러갔다.
‘왜 하필 지금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태자가 병문안을 핑계로 왕부를 다녀간 뒤, 정엽은 곧장 태자가 장악한 호부를 빼앗을 계획을 세웠다.
이부나 병부만큼 중요한 곳이 아니라 가볍게 보기 쉽지만, 호부는 나라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전쟁을 치르든 남몰래 국고를 탕진하든 반드시 태자가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부처였다.
‘혹시 병부상서에 이어 호부상서를 끌어내리려던 내 계획이 들통난 건가?’
마당을 서성이며 고민을 이어가던 정엽은 지금까지 이 일에 관여한 인물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역시나 계획이 밖으로 새 나갈 만한 요인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연주가 영방궁을 드나들고 있다던 태자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세자의 엄포도 엄포지만, 연주와의 약속을 지킨다는 이유로 전만큼 그녀의 행보에 신경 쓰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채신이 제게 의도적으로 누이에 관한 정보를 차단하고 있기도 하지만, 정쟁으로부터 연주를 보호하는 일은 현재 정엽에게 황위보다 더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서화를 선물한다는 핑계로 별당을 찾았던 날, 밤을 새워서라도 연주의 얼굴을 보고 왔어야 했는데…….”
연주의 외면에 너무 쉽게 세자부를 떠났던 지난날이 후회스러웠다. 오래 자책하던 정엽이 한숨을 삼켰다. 외부와 단절된 채 홀로 불안에 떨고 있을 연주를 생각하니, 발 딛고 선 이곳이 바로 지옥이었다.
“지금쯤 얼마나…….”
벌겋게 달궈진 쇳덩이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애간장이 녹았다. 안절부절못하던 정엽은 얼마 후 굳은 얼굴로 나타난 채신을 발견하자마자 그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정말로 연주를 위한다면 제발 내버려 두라고 했더냐? 대업에 집중하라고?”
“…….”
“내게는 매번 냉정해져라, 정신 차려야 한다 충고하더니. 너야말로 얼이 빠졌구나! 상황을 어찌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