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35화 (135/161)

135화.

며칠 동안 잿더미가 된 도관을 수색한 동궁 시위들이 어전으로 향했다.

그림자처럼 스며든 그들은 아홉 마리 용이 꿈틀거리는 황금 병풍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도사의 시신은 찾지 못했습니다.”

천자의 옥좌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태자가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는 들고 있던 찻잔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팽개쳤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조각난 찻잔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들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곽 귀비가 날카로운 파열음에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태자…….”

귀비의 부름에도 대꾸 없이, 태자는 분노로 떨리는 숨을 애써 가다듬고 시위에게 명령했다.

“도사가 사라진 사실은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 철저히 함구해라.”

“예.”

“모두 물러나라.”

바짝 긴장한 시위들이 주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시위들이 자취를 감추자, 내내 평온한 척 연기하던 곽 귀비가 한탄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나. 시체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죽은 도사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이냐?”

불에 타 죽었다는 사람이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이토록 깨끗하게 사라질 수가. 귀비의 어리석은 질문에 태자가 코웃음을 쳤다.

“시체가 어떻게 제멋대로 도관을 나갈 수 있겠습니까. 살아 있으니 감쪽같이 사라진 거지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럼 도사가 도관에 불을 지르고 도망이라도 쳤다는 것이냐?”

“여긴 황궁입니다. 도관에 불을 지른들 혼자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데 왜 이런 무모한 짓을 벌였겠습니까? 분명 그자가 궁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운 배후가 있을 겁니다.”

태자의 말에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귀비의 눈이 커졌다.

“설마……!”

“예, 황후일 겁니다.”

느긋하게 옥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태자가 귀비의 추측에 쐐기를 박았다.

지금 궁중에서 곽 귀비와 태자를 상대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황후뿐이었다. 연친왕을 태자로 세우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후궁의 지배자였고, 황제의 적자를 낳은 덕에 궁 안팎의 입지가 단단했기 때문이다.

아들의 태연한 모습에 당황한 귀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렇담 큰일이 아니냐? 황후가 도사를 데리고 있다면 우리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다는 뜻인데!”

“설령 황후가 도사를 회유해 우리의 계획을 알았더라도 당분간은 우리를 공격할 수 없을 겁니다.”

“어찌하여?”

초조해하던 귀비는 아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후우…….”

백치 같은 표정으로 제 입만 보는 귀비를 확인한 태자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지친 듯 말했다.

“우리 손에 아직 부황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황후가 도사를 데리고 있다면 우리 손에 해독제가 있다는 사실도 알 겁니다. 황후가 모든 사실을 밝히려 할 때, 우리도 해독제로 부황을 깨워 황후에게 역공을 펼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지금은 황후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그렇습니다.”

새삼 아들의 영특함을 실감한 곽 귀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탄했다.

“역시 우리 태자는 명민하구나!”

태자는 귀비의 호들갑에 우쭐하지 않고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는 않습니다. 황후가 도사를 데려간 이유야 뻔하니까요. 황후는 해독제를 만들어 부황을 깨우고 도사를 증인으로 세우려 할 겁니다. 하니 당분간 어전의 경계를 더 철저히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귀비는 자신만만하게 화답했다. 정말 어전의 경계를 높여야 할 필요성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해독제의 제조법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짝 긴장한 듯 보이는 아들을 부드럽게 위로했다.

“염려 말아라. 한동향은 재료를 모으는 데만 꼬박 1년이 걸리는 귀한 약이다. 황후는 절대로 해독제를 완성하지 못할 것이야.”

“그래도 여전히 위험성은 존재합니다. 우리 쪽에 남은 단약과 해독제가 얼마 없지 않습니까.”

“네 말뜻은……?”

“황후의 차선은 우리가 더는 부황을 조종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궁지에 몰려 무리수를 두려는 순간을 포착해 판세를 뒤집는 거지요.”

더는 황제를 조종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태자와 귀비가 택할 수 있는 선지는 하나뿐이었다. 황제를 시해하고 성지를 조작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이미 석연찮은 성지로 동궁을 차지한 일 때문에 뒷말이 나돌고 있는데, 황후가 도사의 존재를 내세워 일을 망치려 든다면 그간 일궈 온 것들이 한꺼번에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

“어느 쪽으로 움직이든 황후는 역시 무서운 사람이구나. 제 권력을 위해서라면 황제의 목숨쯤은 며칠이고 팽개쳐 둘 수 있다는 것 아니냐?”

“…….”

“하면 앞으로 어찌할 생각인 게야?”

귀비는 마치 그간의 행동이 모두 황제를 위한 것이었던 양 목소리를 높였다. 태자가 실소하며 말을 이었다.

“도사를 잃은 건 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생각을 좀 해 봐야겠어요. 다만, 황후는 그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도사에게 주목하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문득 일부러 도관으로 보내 도사의 감시를 맡겼던 자호를 떠올린 태자가 분주한 시선으로 그를 찾았다.

“자호.”

“예, 전하.”

예상외로 지척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멈칫한 태자가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이번 일과 관련해 짚이는 것이 있느냐?”

“짚이는 것이라 하심은…….”

지금까지 민예공주가 연주와 도관에 왔던 일을 보고하지 않은 자호였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자호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태자가 다시 한번 하문했다.

“도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자가 있다거나, 본 자와 모후 외에 도관에 드나든 자가 있다거나.”

“……전하, 죽여 주시옵소서!”

태자의 살벌한 기세에 짓눌려 안절부절못하던 자호가 결국 무릎 꿇고 엎드려 그간 숨겨 왔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시, 실은 민예공주께서 단약을 만드는 과정이 궁금하시다며 딱 한 번 승설군주와 함께 도관을 찾아오신 적이 있었사옵니다.”

“……뭐라?”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것이냐!”

태자와 귀비가 자호를 향해 동시에 소리쳤다. 한순간의 실수로 목이 날아가게 생긴 자호는 아찔한 정신을 가다듬고 변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맹세코 군주에게 단약에 관한 어떠한 실마리도 흘리지 않았사옵니다. 도사는 일부러 악취가 나는 약재를 잔뜩 끓여서 공주마마를 쫓아내기까지 했사옵니다!”

“……그럼 군주는?”

태자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자호가 답했다.

“구, 군주는 공주마마께서 떠나신 뒤 단약 만드는 과정을 잠시 지켜보다 그냥 돌아갔습니다.”

자호는 이 대목에서 자신이 도관을 비운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겼다.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분위기에 그 사실까지 말하면 정말로 목이 잘려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시 그 계집이 화근이야!”

분노한 귀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발을 굴렀다. 하지만 태자의 반응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군주가 그냥 돌아간 것이 확실하냐?”

“그런 걸 물어서 뭐 하느냐? 당장 군주를 잡아 죽여야지!”

앞뒤 가리지 못하고 무작정 화부터 내는 귀비를 가만히 응시하던 태자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군주를 무슨 죄목으로, 어떻게 죽이란 말입니까?”

“그, 그야…….”

말문이 막힌 귀비가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태자가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지금 군주를 죽이는 건 벌집을 들쑤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황후가 도사를 통해 알아낸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증명하는 꼴이 아닙니까?”

“하지만 군주를 이대로 두었다가 또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그렇다고 번듯한 명분 없이 승설군주를 벌하면 조정에 포진한 평해왕 세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럼 그년을 그냥 두고 보기만 하겠다는 것이냐?”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귀비가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태자는 여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한 건 두 배, 세 배로 갚아 줘야지요.”

“……달리 무슨 묘수가 있느냐?”

“어마마마께서 위나라로 떠날 누이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계신 줄 압니다. 그 문제는 소자가 해결하지요.”

승설군주를 제거할 방도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친 문제를 해결하겠다?

태자의 엉뚱한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귀비가 입을 다물었다. 아들의 꿍꿍이속이 파악되지 않으니, 그녀로선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민해는 네 누이이자 내 딸이 아니냐. 어미로써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다.”

“그래서 소자가 꽃가마에 대신 태워 보낼 여인을 만들어 드리겠다는 것 아닙니까?”

“네 말은…….”

설마 승설군주를 화친 공주로 삼아 위나라로 보내 버리겠다?

뒤늦게 아들의 의중을 파악한 귀비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딸을 지켰다는 생각에 기뻐하기도 잠시, 귀비는 등골을 훑는 오싹함에 얼어붙었다.

‘한데 태자는 내가 민해를 대신할 계집을 물색 중이었다는 걸 어찌 알고 계책을 세웠을꼬?’

지금껏 태자 모르게 딸을 지키기 위한 꼼수를 준비 중이던 귀비였다. 그런데 아들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니. 태자가 어미인 저를 믿지 못하고 제 수족까지 모두 감시해 왔다는 사실에 새삼 소름이 끼쳤다.

“……다 알고 있었느냐?”

“다른 건 몰라도 누이의 일인데 당연히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한 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오국 정벌이 무산되고 병부상서가 파직된 후 조정 신료들을 다루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승설군주를 잘만 이용하면 골치 아픈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소자의 뜻에 따라 주십시오.”

“그야, 당연하지. 내가 네 뜻을 따르지 않으면 누구의 뜻에 따른단 말이냐?”

“어머니만 믿겠습니다.”

“오냐, 그래.”

대체 이 아이의 마음속에는 뭐가 들었단 말인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태자의 계책에 놀라는 한편 두려움을 느낀 귀비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터벅터벅 용상을 내려간 태자는 단약에 취해 있을 황제를 구경하기 위해 침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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