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34화 (134/161)

134화.

“원 녀석도…….”

한참 아들을 다독이던 도사가 연주를 향해 대뜸 무릎을 꿇었다.

“제 못난 아들과 함께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군주께서 우리 부자를 도와줄 귀인이신가 보군요.”

“그런 셈이지.”

“저는 이미 지은 죄가 많아 목숨을 부지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아들은 죄가 없으니 부디 지켜주십시오.”

말을 마친 도사는 정신없이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연주는 홍검에게 눈짓해 그를 말렸다.

“아버지, 그만하세요. 머리에서 피가 나잖아요.”

“그래, 장성한 아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어찌 그런 심약한 말을 하는가.”

“군주마마의 말씀이 옳아요. 여기서 살아서 나가야죠.”

홍검이 울먹이자 마음이 흔들린 도사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감았다.

도관에 갇힌 후,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린 그였다. 하지만 막상 아들의 얼굴을 보니, 무슨 수를 써서든 목숨을 부지하고 싶었다.

연주가 그 마음을 안다는 듯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요점만 묻겠네. 홍검의 말에 따르면 자네가 오석산을 만들 줄 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럼 폐하께서 드시는 단약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건…….”

도사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연주는 엄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그걸 알아야 내가 자네 부자를 도울 수 있네.”

“아버지, 이분은 믿으셔도 됩니다. 우릴 지켜 줄 힘도 있으신 분이니 어서 말씀 올리세요.”

행여 일을 그르칠까 봐 애가 탄 홍검이 부친을 설득했다. 한참 머뭇거리던 도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께 올린 단약은 평범한 공진단입니다. 다만 귀비마마의 명으로 오석산을 조금 섞었지요.”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도사의 대답에 연주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곽 귀비 모자를 처단할 실마리를 잡아 정엽을 도울 수 있게 된 건 다행스럽지만, 오석산에 중독되어 있을 황제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설마 이대로 모든 게 태자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아니겠지?’

최악의 경우 이대로 황위가 태자에게 넘어갈지도 몰랐다. 황제가 된 소기는 가장 먼저 정엽을 참살할 게 뻔했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미래에 등골이 오싹했다. 간신히 정신을 붙잡은 연주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 폐하의 용태는 어떠한가? 오석산에 중독되면 미치광이가 되어 버리지 않는가?”

“저는 폐하를 알현한 적이 없어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곽 귀비와 태자가 단약뿐만 아니라 해독제도 가져갔으니 아직 손쓰지 못할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해독제? 그런 게 있는가?”

눈앞에 한줄기 서광이 비치는듯했다. 연주가 도사의 입을 빤히 응시했다.

“제가 만든 오석산은 다른 자들이 만든 것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한동향(寒凍香)이라는 해독제가 있지요. 한동향을 먹이면 오석산 때문에 이성을 잃거나 혼절한 자라 하더라도 하루면 제정신으로 돌아옵니다.”

“그래?”

“예, 하지만 해독제의 효과는 중독 정도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먹여야 하는 양 또한 그렇고요.”

“결국 곽 귀비 모자가 필요할 때마다 약을 번갈아 사용하며 폐하를 조종하고 있다는 뜻이로군.”

연주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이곳에 단약과 해독제가 있느냐?”

“아닙니다. 단약과 해독제는 완성되는 즉시 태감이 가져가서 이곳에 없습니다. 특히 해독제는 재료가 워낙 귀하고 까다로워서 귀비가 재료를 내어 줄 때가 아니면 만들 수조차 없지요.”

“그런…….”

연주는 생각보다 철두철미한 곽 귀비 모자의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하기엔 일렀다.

“그럼 해독제를 만드는 법이라도 알려 주게.”

“예, 한동향은…….”

끼익-

그 순간, 공주와 떠났던 태감이 돌아왔는지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홍검과 도사가 놀란 얼굴로 닫힌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래서야 더는 도관에 드나들 수도 없겠어.’

이제 해독제를 얻기 위해선 도사를 이곳에서 빼내는 수밖에 없었다. 연주는 도사의 손을 마주 잡고 당부했다.

“조만간 내가 자네를 이곳에서 구해줄 테니 귀비 모자에게 오해를 사지 않도록 평소처럼 행동하게.”

도사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는 아무 일도 없던 척 일어나 연단로를 바라보았다.

“…….”

서둘러 눈물을 훔친 홍검은 연주의 곁에 나란히 섰다. 도사는 처음 연주가 도관을 찾았을 때처럼 연단로를 향해 돌아앉은 채 정체불명의 주문을 중얼거렸다.

마침내 도관 안으로 들어온 태감이 슬며시 연주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군주마마, 단약 만드는 모습은 다 보셨는지요?”

연주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자네 덕분에 잘 봤지만, 내가 단약에 관해선 문외한이라 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군. 그래도 태자 전하와 귀비마마께서 황제 폐하를 위해 아주 귀한 약을 올리고 있다는 것만은 잘 알겠네.”

“두 분 마마의 정성을 알아주시다니, 소인도 무척 기쁘옵니다.”

“공주마마께도 내가 잘 말씀드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연주의 대답을 들은 태감은 도사가 단약의 정체를 잘 숨기고 현명하게 행동한 것이라 짐작했다. 연단로를 살피는 도사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태감이 말했다.

“반 시진 뒤면 궁문이 닫힙니다. 소인이 북문까지 모셔다드릴까요?”

“말만이라도 고맙네. 내가 알아서 갈 테니 자네는 할 일을 하게.”

그렇게 말한 연주는 홍검과 함께 서둘러 도관을 떠났다.

* * *

귀가하는 마차 안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연주는 세자부에 도착하자마자 별당으로 달려갔다.

황후에게 오늘 알게 된 사실을 전하고, 도관에 갇혀 있는 홍검의 부친을 구해야 한다는 서신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신없이 책상 앞에 앉아 문방사우를 챙기려니, 책상 한가운데 기다랗게 누워 있는 나무 상자가 눈에 띄었다.

‘이게 뭐지?’

처음 보는 물건을 이리저리 살피던 연주는 선뜻 상자를 열어보지 못하고 망설였다. 모양과 크기로 보아 이 안에는 서화를 비단에 표구한 족자가 들어 있음직했다.

‘대체 누가 가져다 놓은 거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주인의 귀가 소식을 듣고 손을 씻을 따뜻한 장미수를 내어오던 금란이 알은체를 했다.

“그 상자는 연친왕 전하께서 두고 가신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예, 오늘 오후 나절에 오셔서 마마를 한참 기다리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정엽이 남기고 간 물건이라니.

열어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별수 없는 호기심에 마음이 간지러웠다. 주인의 기색을 살피던 금란이 부추기듯 말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지 않으실 건가요? 연친왕 전하께서 무척 애지중지하시는 물건인지 기다리시는 내내 손에서 놓질 못하시던데요.”

“이 물건을 말이냐?”

“예, 아가씨.”

연주는 이제껏 정엽이 지도나 병장기 외의 물건을 애지중지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결국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진한 청록색 운금(雲錦)으로 만든 족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연주는 두루마리를 동여맨 붉은 끈을 풀어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펼쳤다. 잔잔한 구름무늬가 아름다운 비단 위에는 눈에 익은 그림이 올라앉아 있었다.

“이건…….”

정엽과 재회한 겨울, 막냇동생 윤 때문에 다친 정엽을 간호하느라 연왕부에서 지내며 남긴 시와 그림이었다.

‘용무군 군사에게 야생차를 대접받은 날이로군.’

왕유의 「죽리관」, 울창한 대숲, 고즈넉한 오두막.

정엽의 열정이 느껴지던 거대한 지도, 깜깜한 오솔길, 머리 위의 희미한 별빛과 정엽의 크고 따듯한 손.

시화를 보니 그날 유황관에서 있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연주는 애틋한 눈으로 찬찬히 그림을 훑었다. 한데 족자에는 연주가 남긴 흔적 외에 낯선 손길이 더해져 있었다.

하늘에는 갈고리를 닮은 초승달. 오두막 안에는 달을 바라보는 사내. 그리고 연주가 남긴 싯구 뒤엔 반듯한 필체로 적힌 화답시가 이어져 있던 것이다.

[깊은 숲속에 초승달 떴네.

작은 달이 어찌나 휘영청 밝은지.

나는 멀리 있는 그대를 생각하네.

하루를 보지 못하니, 내 마음은 근심 걱정뿐이라네.]

연주는 정엽이 장옥량의 「산지고(山之高)」를 개작해 적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유유자적하게 자연을 즐기던 사람은 어디 가고, 그리움에 애간장 태우는 사람만 남았구나.’

연주는 정엽의 마음이 투영됐을 그림 속 사내를 안타까운 손길로 어루만졌다.

정엽에게 이런 감성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서화 내용이 제가 남긴 것과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 버렸음에도 이질감이라곤 없어 또 한 번 놀라웠다.

‘이제라도 당신을 제대로 보게 되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연주는 생각 많은 얼굴로 족자를 응시했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던 금란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족자가 마음에 드시나요? 그럼 방 안에 걸어드릴게요.”

“아니다. 그러기엔 무척 귀한 그림이니 햇빛에 바래지 않도록 장롱 깊은 곳에 보관하는 게 좋겠다.”

연주에게는 정엽이 소중한 만큼 그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정엽의 안위.

고달픈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앞으로는 매일 평온할 수 있도록, 남에게 위협당하지 않도록 권력의 정점에 올려놓는 것.

연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지금 당장 황후마마께 서신을 써야 하니 먹을 좀 갈아다오.”

작게 한숨을 쉰 연주가 상자에 족자를 갈무리해 넣으며 명령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주인을 의아하게 보던 금란은 냉큼 먹과 벼루를 끌어당겼다.

머릿속으로 문장을 가다듬던 연주는, 이내 비장한 표정으로 막힘없이 붓을 휘둘렀다.

며칠 후, 도사 광효가 지내던 도관에 시뻘건 불길이 솟아올랐다. 맹렬한 화마는 도관은 물론 도관에서 보관하던 약재까지 모조리 집어삼키고 나서야 사그라들었다.

궁중에는 연단로를 지키던 도사가 화재에 휩쓸려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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