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33화 (133/161)

133화.

“으음, 그게…….”

연주는 무척 곤란한 부탁이라는 듯 일부러 뜸을 들이며 공주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편히 말해요. 군주가 나를 생각해 주는 만큼 나도 군주를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소녀의 소원은 귀비께서 궁중에 들였다는 도사를 만나 보는 것이옵니다.”

“도사를……?”

군주가 그자를 왜?

공주는 내심 의아했지만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왠지 군주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연주는 공주가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뒷말을 이었다.

“실은, 그 도사가 만든 단약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군가요?”

“여기 이자이옵니다.”

연주가 곁에 서 있던 홍검을 바라보았다. 홍검은 긴장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공주를 향해 예를 갖췄다.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게.”

좀 전에 향합을 건네준 사내임을 확인한 공주가 머리를 갸웃 기울였다. 알면 알수록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한데, 이자는 왜 단약을 구하는 거죠?”

“이자의 부친이 얼마 전 큰 병을 얻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답니다. 한데 백방으로 약을 찾으며 수소문해 보니, 그 도사의 단약이 즉효 약이라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이자는 제 평생의 은인입니다. 하여, 부친을 떠나보내기 전에 할 수 있는 걸 다 해 보고 싶다는 이자를 돕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가족을 위하는 마음은 누구나 같지요. 내 모친과 오라버니 역시 그래서 도사를 궁중에 들이신 걸 테고요. 좋아요.”

“감사하옵니다. 마마.”

홍검의 사연에 큰 감명을 받은 듯 작게 한숨까지 쉰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저를 향해 고개를 숙인 연주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럼 영방궁에서 이럴 게 아니라 당장 도사를 만나러 가지요.”

“……지금 말이옵니까?”

“네.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데 지체할 시간이 어디 있나요?”

말을 마친 공주가 앞장서 서배전의 문을 열었다. 홍검은 공주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올렸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자, 연주는 오히려 당황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불안한 표정을 짓던 연주가 홍검을 따라 공주를 향해 나붓이 예를 갖췄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이렇게 된 김에 하루라도 빨리 홍검의 부친을 구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운 일인지도 몰랐다.

“공주마마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별말을 다 하네요. 어서 가요.”

연주와 홍검은 민예공주와 함께 영방궁 근처에 마련된 도관으로 향했다. 도관 앞은 오고 가는 사람이라곤 하나 없이 이상하리만큼 한산했다.

연주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사방을 주의 깊게 살폈다. 홍검의 부친이 갇혀 있다는 가정하에 주변 경계가 삼엄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는 남의 눈치 따위 보지 않는 성미답게 곧장 대문을 두드렸다.

“당장 이 문을 열어라!”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안에서 젊은 태감 하나가 빼꼼 문을 열고 나왔다. 공주 뒤에 서 있던 연주는 어쩐지 낯익은 태감의 얼굴에 눈을 가늘게 떴다.

반면 태감은 갑자기 찾아온 공주 때문에 놀라 허둥지둥했다.

“고, 공주마마?”

“너는 자호가 아니냐? 동궁의 태감인 네가 왜 여기 있는 게냐?”

“태자 전하의 명으로 도사님이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돕고 있습니다. 한데 공주마마께서 여긴 어쩐 일이시옵니까?”

“승설군주와 도사를 만나러 왔다. 도사는 안에 있느냐?”

“아, 그게…….”

태감은 이 상황이 난처한 듯 말끝을 흐렸다. 사실 태자는 저를 이리로 보내면서 도사가 외부인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린 터였다.

하지만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태자가 가장 아끼는 막내 누이 민예공주.

민예공주는 제멋대로에 고집이 세서, 그녀에게 밉보인 자들은 절대 살아남지 못한다는 풍문이 있었다. 공주를 잘못 건드렸다간 오히려 일이 커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도사께서는 지금 단약을 만드느라 바쁘십니다. 그러니 다음에 다시…….”

“단약을 만들고 있다고? 그럼 더 잘됐구나. 마침 나도 부황께 바치는 단약을 어찌 만드나 궁금하던 차였다. 그러니 어서 문을 열어라.”

눈치 빠른 공주가 그럴싸한 핑계를 지어 냈다. 태감의 얼굴은 금세 흙빛이 되었다. 이를 확인한 공주가 연주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가 떴다.

연주는 그런 공주가 고맙고도 미안해서 말없이 웃어 보였다.

어찌할 바 모르던 태감은 강경한 공주의 태도에 밀려 슬쩍 문 곁으로 비켜섰다. 승설군주는 몰라도 민예공주는 태자의 친누이이니 외부인이라고 하기도 애매하지 않은가.

“고맙네, 공공.”

공주를 대신해 인사를 건넨 연주가 홍검과 공주의 뒤를 따랐다.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도관의 문턱을 넘은 공주는 금세 신이 난 얼굴로 도관 이곳저곳을 살폈다.

거대한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전각엔 온갖 약재가 담긴 상자가 벽면을 따라 빙 늘어서 있고, 중앙에는 큼지막한 연단로가 펄펄 끓고 있었다.

그 앞에는 새하얀 명주옷을 걸친 사내가 등을 보인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신상(神像)처럼 미동도 없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네가 부황의 단약을 만드는 도사냐?”

“…….”

“네가 도사냐고 물었다!”

드문드문 서리가 내린 머리카락을 가느다란 나무 비녀로 틀어 올린 사내는 공주의 신경질적인 질문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소인이 도사 광효이옵니다.”

드디어 자신의 정체를 밝힌 사내가 천천히 모두를 향해 돌아섰다.

다음 순간, 연주의 뒤편에 서 있는 홍검을 발견한 도사의 눈이 커지고, 도사의 얼굴을 확인한 홍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

울컥한 홍검은 저도 모르게 도사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이를 눈치챈 연주가 홍검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

“…….”

홍검은 젖은 눈으로 연주를 돌아보았다. 연주는 그런 홍검을 차분하게 응시했다.

연주 덕에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른 홍검이 고개를 떨구고 이를 악물었다. 홍검의 반응을 통해 도사가 정말로 그의 부친임을 확신한 연주가 입을 열었다.

“나는 평해왕부의 승설군주이고, 여기 계신 분은 황태자 전하의 막내 누이이신 민예공주이시네.”

“몰라 뵈어 송구합니다. 공주마마와 군주마마를 뵙습니다.”

연주의 언행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도사가 넙죽 두 사람에게 절을 올렸다. 공주는 그제야 기분이 풀린 듯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연주는 이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을 태감을 의식해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공주마마께서 폐하께서 드시는 단약의 제조 과정을 궁금해하시어 이렇게 찾아왔네. 우리에게 단약 만드는 과정을 보여 줄 수 있겠나?”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마침 새 단약을 만들려던 참이니 편하게 보십시오.”

공손하게 대답한 도사가 벽면의 수납장과 연단로 사이를 오가며 솥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재를 털어 넣었다.

펄펄 끓는 솥에선 금세 고약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도사의 행동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공주는 이내 형용할 수 없는 악취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악취는 더 심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견디다 못한 공주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안절부절못했다.

괴로워하는 공주를 눈치챈 연주가 말했다.

“공주마마, 고운 비단옷에 약 냄새가 밸까 염려되니 먼저 처소로 돌아가 계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하지만…….”

“염려 마십시오. 제가 단약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가 차후 마마께 모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공주가 연주의 배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단약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하긴 해도, 어차피 도관을 찾은 목적은 연주가 도사를 만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럼 나중에 입궁해서 꼭 내게 설명해 줘요. 나도 부황이 무척 걱정되거든요.”

“네. 그리하지요.”

공주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인 연주가 문밖에 서 있던 태감을 향해 소리쳤다.

“공주를 처소로 모시게.”

“예? 제가요?”

“그래, 자네 말일세. 설마 공주마마께서 혼자 영방궁으로 돌아가시게 하란 말인가?”

나는 태자 전하의 명으로 도관을 지켜야 하는데?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황한 태감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군주가 남들 눈을 피해 도사에게 단약을 부탁하려는 모양이네.’

연주와 태감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공주는 이곳에 오기 전 연주가 한 말을 떠올리곤 성큼성큼 대문으로 향했다.

“그럼 나 혼자 가마! 이대로 동궁으로 가서 태자 오라버니께 다 이를 거야! 자호가 나를 홀대했다고!”

“예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태감이 찜찜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도사가 일부러 악취를 풍겨 공주를 쫓아낸 걸 보면, 승설군주 역시 도관에 오래 머물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태감이 공주를 뒤따르며 말했다.

“공주마마,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도사는 게으름 피우지 말고 성심을 다해 단약을 만드시오!”

“예.”

그렇게 공주와 태감이 도관을 떠나자, 홍검이 도사에 품에 와락 안겼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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