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늘 듣기 좋은 말로 남의 눈과 귀를 속여 온 태자는 절로 의심이 솟구쳤다.
몇 발자국 앞서가던 정엽이 무심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짧은 순간 고민을 반복하던 태자가 씩 웃었다.
“앞으로 형님께서 조정 일에 신경 쓰실 필요 없도록 정무에 힘써야겠습니다.”
속이 뻔히 보이는 태자의 도발에 정엽이 실소했다.
“날 위한답시고 너무 무리하진 마라. 그러다 부황의 병환이 깊어지기라도 하면 어찌하느냐?”
“……예?”
지금 뭘 알고 하는 소린가?
예기치 못한 정엽의 말에 등골이 오싹했다. 긴장한 태자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부황께서 너를 많이 의지하신다고 들었다. 네가 정무에만 매달리느라 부황을 제대로 모시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그런다.”
“…….”
“뭘 그리 놀라느냐? 원래부터 동궁의 자리는 부황을 보필하라고 있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정엽이 일부러 보필이라는 대목을 강조했다.
‘역시나…….’
태자는 제 추측대로 정엽이 얌전히 요양만 하고 있던 게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애오국 사신이 예고 없이 찾아온 일이며, 병부상서가 탄핵당한 일까지. 그는 모든 사건의 배후로 정엽을 의심하며 병문안을 핑계로 그의 속을 떠보러 나온 참이었다.
‘그렇다면 조만간 받은 만큼 돌려드려야지.’
속으로 이를 갈던 태자가 수더분하게 웃었다.
“보필이라고 하니, 저는 오히려 형님이 걱정입니다.”
“무슨 뜻이냐?”
“연왕부의 안주인 자리가 몇 년째 비어 있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홀로 지내실 작정이십니까?”
태자는 요즈음 연주가 제 막내 누이인 민예공주와 자주 왕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간 영방궁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연주이니 그 또한 정엽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태자는 정엽의 반응을 세심히 살폈다. 정엽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이젠 혼자가 익숙해. 새 왕비를 들일 생각은 없다.”
“그래도 살다 보면 여인의 손길이 필요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혹시 평해왕부가 건방지게 형님의 재혼을 꺼리는 거라면…….”
“평해왕은 황실의 오랜 충신이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럼 하루라도 빨리 새 왕비를 맞으십시오. 새 왕비를 맞는 게 내키지 않으시면 첩이라도 들이시던가요. 요즘은 승설군주도 영방궁을 오가며 잘 지내던데. 형님께선 계속 왕부에 칩거하시니 걱정입니다.”
“생각해 보지.”
연주가 영방궁을 드나든다? 그런 얘기는 처음 듣지만, 정엽은 연주가 아닌 다른 여인을 곁에 둘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저를 떠보려는 태자의 저의를 눈치챈 정엽은 휘적휘적 앞서 걸었다. 태자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혹시 마음에 드는 여인이 없어서 그러십니까? 하면 제가 어머니를 통해 괜찮은 처자를 수소문해 볼까요?”
“…….”
“어느 가문의 딸이라도 평해왕부의 품격에는 못 미치겠지만, 뭐 어떻습니까.”
“…….”
“형님, 말씀을 좀 해 보십시오.”
그렇게 태자 홀로 귀가 따갑게 떠들고 있을 때였다.
“전하! 태자 전하!”
등 뒤에서 갑자기 동궁 태감이 달려왔다. 양해와 함께 온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 주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태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귀비마마께서 급히 전하를 찾으십니다.”
“어마마마께서?”
“아무래도 위나라가 국혼을 청한 일을 아신 모양입니다.”
“쯧!”
태자는 대번에 이맛살을 구기며 혀를 찼다. 화친을 위한 위나라 국왕의 혼인 상대는 이미 곽 귀비의 딸이자 그의 누이 중 하나인 민해공주로 결정이 난 상황이었다.
제 딸을 머나먼 타국으로 보낸다는데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할 어미가 어디 있을까.
태자도 이를 알아 당분간 귀비 앞에선 국혼에 대해 입도 뻥긋 못 하게 궁인을 단속해 온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혼 얘기가 기어코 모친의 귀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그렇게 입단속을 하라고 신신당부했건만. 대체 어느 놈이…….”
“가 봐야 하는 것 아니냐?”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따로 배웅하진 않으마.”
“예. 저도 형님께서 회복하신 모습을 뵀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좀 전까지 집요하게 여인을 권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태자는 다급하게 대숲을 벗어났다. 홀로 남은 정엽은 양해에게 돌아가라 손짓하곤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섰다.
새파란 하늘, 초록빛 대나무, 뾰족한 우듬지에 걸린 새하얀 깃털 구름을 보고 있노라니,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댓잎이 부대끼며 청량한 소리를 냈다.
쏴아아-. 쏴아-.
비어버린 듯, 채워진 듯. 자연과 한 몸으로 동화된 순간, 문득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정엽은 성큼성큼 유황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유황관 안으로 들어선 정엽은 곧장 책상 앞에 앉아 서랍을 당겼다. 거기엔 꾸깃꾸깃한 종이 뭉치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정엽은 그것을 꺼내 조심스럽게 펼치곤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자글자글한 종이 위에는 연주가 쓴 왕유의 「죽리관」과 그 시에 어울리는 시화가 그려져 있었다.
“혼인 전에 내게 보냈던 편지들하고는 필체가 조금 다르네.”
연주가 과거에 부친 편지들은 이제 하도 읽어서 눈을 감으면 그 필체며 내용이 선명히 떠오를 지경이었다.
“그래도 또 하나 찾았으니까.”
연주를 추억할 또 다른 흔적을 찾아 다행이라고. 그러니 오늘은 조금은 기뻐하자고.
정엽은 보석에 앉은 먼지를 닦아 내듯 손으로 종이를 다림질하기 시작했다.
“족자로 만들어 보관하면 더 오래 볼 수 있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잠시, 연주가 영방궁에 드나들고 있다던 태자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소식의 진위가 신경 쓰여 그림을 매만지던 손길이 느려졌다.
“대체 혼자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연주는 곽 귀비 모자와 악연이 깊었다. 영방궁에 드나들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정엽은 마치 곁에 없는 연주와 대화하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림을 응시했다.
그립고, 원망스럽고, 사랑스러운 그녀는 언제나처럼 말이 없었다.
* * *
한편, 연주는 영방궁을 자주 오가며 민예공주의 취향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공주를 만난 지 정확히 한 달째 되던 날, 고심을 거듭해 만든 향을 가지고 입궁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상연부인이 드디어 향을 완성하여 제게 보내왔어요.”
연주가 함께 입궁한 홍검을 향해 눈짓했다. 홍검은 미리 당부 받은 대로 공주 옆에 서 있는 중년의 상궁에게 흑단나무 상자를 건넸다.
“……?”
이제나저제나 향을 받아 볼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공주는 꾸밈없는 상자의 겉모습을 확인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이 밋밋한 상자에 든 게 정말 내게 바치는 향이란 말이야?’
그러나 반신반의하며 상자를 연 공주의 얼굴은 금세 환해졌다.
“이렇게 고운 향합은 난생처음 봐요!”
먹빛 우단(羽緞)으로 마감된 상자 안에는 소담하게 핀 작약을 형상화한 진홍색 유리 향합 담겨있었다.
섬세하게 표현된 꽃잎에는 얇은 금테가 둘러져 있고, 그 위에는 이슬을 형상화한 장미석영이 박혀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장인의 숨결이 느껴졌다.
평소 작약을 사랑하는 공주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상연부인은 만든 향뿐만 아니라 향을 담는 향합까지 독특하기로 유명하던데. 과연 소문대로네요.”
“그래도 중요한 건 역시 향이 아니겠사옵니까. 어서 확인해 보시지요.”
“알았어요!”
공주는 들뜬 얼굴로 조심스럽게 향합을 열었다. 가장 먼저 새콤달콤한 과일 향이 코끝을 스치고, 그 뒤로 풍부한 작약 내음이 물씬 풍겼다.
마치 겹겹의 꽃잎마다 싱싱한 과즙을 머금은 작약 꽃다발을 한 아름 끌어안은 기분이었다. 진하디진한 작약 향기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작약꽃을 모아 담은 듯 다채로웠다.
흥분한 공주가 말했다.
“내가 작약을 좋아해서 평소 써 보지 않은 작약 향이 없는데, 이런 향은 처음 맡아 봐요! 대체 어떻게 만든 건가요?”
“상연부인이 전한 바로는 향주 자사가 해마다 황실에 진상하는 서른세 가지 작약에 사과 향을 더해 만든 것이라 합니다.”
“사과 향……?”
“그렇습니다.”
연주의 설명을 들은 민예공주가 재차 향을 깊이 들이마셔 보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듯 새로운 향기는 거부감 없이 다가오면서도, 흔치 않은 사과 향 덕분에 무척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실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면서도 상연부인이 어떤 향을 만들어 낼지 궁금했어요. 한데 흔하디흔한 작약으로 이렇게 독특한 향을 만들어 낼 줄은 미처 몰랐네요.”
“상연부인에게 공주마마의 말씀을 전했더니,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은 공주께서 제일 사랑하시는 향이 아니겠느냐고 하더군요.”
“어머나, 상연부인이 그런 말을…….”
“하여 존귀한 황실 여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향주 작약에 평안을 기원하는 과일인 사과의 향을 더했다고 합니다. 이 향이 모쪼록 공주마마께 행복을 안겨드렸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연주는 정말로 상연부인이 따로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천연덕스럽게 새로 만든 향의 의미를 전했다.
공주는 연주의 연기가 싫지 않은 듯, 상기된 표정으로 화답했다.
“향도 향이지만 나를 생각해 주는 상연부인의 마음이 더 귀하네요. 그럼 이 향의 이름은 무엇이라 하던가요?”
“아원향(衙媛香)이라고 하였습니다.”
“‘궁중 미인의 향’이라. 향뿐만 아니라 이름까지 좋네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향합을 손에서 좀처럼 내려놓지 못하던 공주는, 이러다 귀한 향이 금세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향합을 닫고 다시 상자에 봉했다.
“상궁, 이것을 누구도 탐내지 못하게 내 침상 머리맡에 가져다 두도록 해.”
“예, 마마.”
명을 받은 상궁이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사사건건 간섭하길 좋아하는 상궁이 없어지자, 공주는 해맑게 웃으며 연주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럼 이제 내가 보답할 차례네요. 말해 봐요. 군주의 소원이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