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아, 그런…….”
상연부인이든 승설군주든 재물에 목맬 처지가 아님을 간과했던 공주가 당황해 말끝을 흐렸다.
제 뜻대로 움직일 것처럼 보였던 연주가 이제 와 제 청을 거절하려나 싶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럼 지금 보여 준 재물의 세 배를 내어 주면 어떨까요? 원한다면 열 배까지도 내어 줄 수 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 상연부인은 재물이 아쉬운 사람이 아니옵니다. 그러니 재물 말고 다른 걸 내어 주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다른 거라면……?”
“간단합니다. 상연부인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시지요.”
그렇게 말하는 연주의 눈동자가 이채로 반짝였다.
“……소원?”
공주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대답을 망설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상궁이 불안한 얼굴로 공주에게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거절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벼랑 끝에 핀 꽃처럼 홀로 돋보이고 싶은 공주의 욕심을 꺾을 사람은 이 안에 아무도 없었다.
“좋아요! 대신 상연부인이 내 마음에 꼭 드는 향을 만들어 줘야 소원을 들어줄 거예요!”
“감읍하옵니다. 상연부인에게 공주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됐구나!
숨죽여 대답을 기다리던 연주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공주를 향해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 * *
세자부에서 돌아온 후, 정엽은 줄곧 연왕부에 머무르며 몸을 추슬렀다. 그러나 몸의 상처가 나아가는 동안 마음속은 시시각각 메말라 갔다.
‘전하께는 저를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돌아가서 전하께서 하셔야 할 일을 하세요.’
실상 또다시 거절당한 상황이었지만, 정엽은 여전히 연주를 잊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연왕부에 남은 연주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그의 가슴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가 쪼그라들었다.
‘의지할 곳이 필요해.’
수시로 일어나는 감정의 동요는 해일처럼 거대했다.
하염없이 방황하던 정엽은 연주가 머물렀던 향경당에서 지내며 매일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빈 의자에 앉아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노라면, 이곳에서 생활하던 연주의 잔상이 환영처럼 여기저기서 움직였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선 수틀을 끌어안고 다소곳이 자수를 놓던 모습이, 비단 보료가 깔린 평상 위에선 홀로 기보(棋譜)를 보며 바둑을 두던 모습이, 서재 책상 맞은편에선 울림이 맑은 칠현금을 뜯던 모습이 생생했다.
‘그러고 보면 내 곁에선 늘 「장상사(長想思)」를 연주하곤 했는데…….’
오늘따라 연주가 아끼던 칠현금이 눈에 밟혔다. 정엽은 느릿느릿 악기 앞에 앉아 무딘 손끝으로 현을 퉁겼다.
두웅-
그녀가 현을 뜯을 때와 달리 맥없는 소리가 났다. 단단하게 조여 탄성을 유지해야 할 명주실이 삭고 늘어진 탓이었다.
‘낭군을 바로 옆에 두고 그리움을 노래하는 기분은 어떤 것이었을까.’
정엽은 이제야 자신이 기억하는 연주의 모습 중 저와 붙어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시절만 해도 왜 이 여자는 일하는 사람 옆에서 바둑을 둘까, 왜 축축 늘어지는 노래를 연주할까 의문하며 그녀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정엽이었다.
‘실은 그게 다 외롭다는 표현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숨 쉬듯 자연스럽게 칠현금을 뜯다가 늘 같은 대목에서 음을 틀리는 것도, 바둑알을 엉뚱한 곳에 놓았다며 다 끝난 승부를 무효로 돌리고 처음부터 다시 바둑을 두는 것도…….
“……바보 같긴.”
정엽이 씁쓸하게 자조했다.
이젠 나도 사소한 실수를 핑계 삼아 너와 눈이라도 한번 맞추고 싶은데. 밤새도록 바둑의 승패를 미루며 너와 얼굴을 맞대고 싶은데.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면 너무 늦어 버렸는지도…….”
자포자기한 것처럼 마음에도 없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이 적막하고 넓은 집에 영원히 홀로 남겨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눈앞이 캄캄해진 정엽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정엽은 현실을 외면하듯 두 손으로 눈두덩을 짚었다. 다음 순간, 조심스럽게 향경당을 찾아온 양해가 고개를 조아렸다.
“황태자께서 연왕부로 행차하셨습니다.”
“귀하신 동궁 전하께서 어쩐 일로 오셨다더냐?”
대번에 인상을 찌푸린 정엽이 삐딱하게 대꾸했다. 향경당에 있을 때만큼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예민한 주인이었다. 그를 익히 아는 양해가 더욱 몸을 낮추고 답했다.
“전하의 병문안을 오셨다고 합니다.”
“병문안?”
그럴싸한 핑계에 정엽이 코웃음을 쳤다. 피차 병문안을 다닐 만큼 돈독한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죽길 바라던 사람이 멀쩡히 살아 돌아오니 배알이 뒤틀린 모양이군.”
“전하…….”
“알았으니 청방으로 안내해 차부터 대접해라.”
하지만 양해는 정엽의 명을 받은 뒤에도 선뜻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게…….”
“또 왜 그러느냐?”
“태자께선 이미 경수당에서 전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
주인도 없는 방을 멋대로 차지하고 있다니.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속이란 말인가?
‘아, 혹시 그 일들 때문인가?’
최근 애오국 사신이 갑작스럽게 바다를 건너왔다. 황실에 엄청난 양의 공물을 바치기 위해서였다.
태자를 알현한 사신은 그 자리에서 애오국 국왕의 친서를 전했다. 대화국 남해 연안에서 벌어진 해적들의 약탈에 대해 사과의 뜻을 전한다는 내용이었다.
덕분에 태자가 그토록 애쓰던 애오국 정벌은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됐다. 뿐인가. 며칠 전에는 태자를 옹호하며 전쟁을 주장하던 병부상서가 엄청난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파직당했다.
이로써 태자는 자신의 지지기반 중 핵심이었던 병부(兵部)를 잃었다.
물론 일련 사건의 배경에는 정엽과 채신이 있었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좋군.’
남들은 미려하다고 추앙하는 아우의 얼굴이지만, 정엽은 생각만으로도 불쾌했다. 그는 체머리를 떨다 경수당으로 건너갔다.
도착해보니, 태자는 그곳이 제 처소라도 되는 양 상석을 차지하고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문간에 선 정엽은 예를 갖출 생각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아우의 행태를 지켜보았다.
“아, 형님. 언제 오셨습니까?”
태자는 뒤늦게 정엽의 시선을 감지한 양 천연덕스럽게 알은체했다.
“내 집에서 대접받을 생각은 마라.”
당장 비키라고 윽박지르지는 못해도 태자에게 순순히 윗사람 대접을 해 줄 생각은 없었다. 정엽은 태자의 오른편에 거리낌 없이 착석했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저는 오늘 태자가 아니라 아우로서 형님의 병문안을 온 것이니까요.”
“그렇담 다행이군.”
“이렇듯 거동하시는 걸 보니 많이 나아지신 것 같아 기쁩니다. 한데 어딜 다녀오십니까?”
정엽이 대놓고 무시하는데도 태자는 사람 좋은 얼굴로 능청을 떨었다.
“처소에만 틀어박혀 있기 답답해서 잠시 산책을 좀 했다.”
정엽은 좀 전까지 향경당에 있었단 사실을 일부러 숨겼다. 태자 역시 연주가 제 약점이란 걸 잘 알고 있을 거란 채신의 말 때문이었다.
향경당 이야기를 꺼냈다간 음흉한 태자가 또 어떻게 연주를 건드릴지 알 수 없었다.
“산책이라. 좋지요. 몸이 불편하다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
“혹시 형님께서 산책하신 곳이 그 유명한 대숲입니까? 저도 오래전부터 그 대숲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이참에 제게 구경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태자가 탐욕스럽게 눈을 빛냈다. 정엽은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또 무슨 냄새를 맡은 것인가?’
외부에는 비밀에 부쳐 왔지만, 대숲 안에는 연왕부 사병인 용무군의 군영이 있었다.
정엽은 그간 타인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대나무가 미친 듯이 생장하는 여름에만 대숲과 군영을 조금씩 넓혀 왔는데, 안 그래도 약삭빠른 태자가 무언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주인이 궁지에 몰렸다고 판단한 양해가 불안한 눈으로 그의 기색을 살폈다. 정엽은 무슨 생각인지 태연하게 답했다.
“있는 거라곤 대나무뿐인 곳을 왜 그렇게 궁금해하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리 원한다면 보여 주마.”
“감사합니다. 형님.”
정엽은 담담한 얼굴로 아우를 대숲으로 안내했다.
미로처럼 얽힌 오솔길에 들어선 그는 일부러 복잡한 길만 골라 가며 태자에게 연무장을 숨겼다.
울창한 대숲을 주의 깊게 둘러보던 태자는 정엽의 말마따나 온통 대나무뿐인 풍경을 확인하고는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잊을 만하면 왕부의 건물을 헐고 대숲을 넓히기에 틀림없이 뭔가를 숨겨 뒀으리라 생각했는데……. 잘못짚은 건가?’
이 안에 분명 대규모 군영이나 무기고, 비밀 회합 공간 따위가 있을 거라 예상한 태자였다.
‘하기야. 설령 대숲에 뭘 숨겨 두었다고 한들 내게 순순히 들킬 위인이 아니시지. 우리 형님께서는.’
태자는 정엽이 대숲에 무엇을 숨겼는지 알 순 없어도, 언젠가 이곳에 불을 질러 모조리 태워 버리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걸 잃고 망연자실한 정엽의 모습을 상상하니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대나무를 이만큼 가꾸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텐데. 바쁘신 와중에도 무척 정성을 들이신 모양입니다.”
“지금은 연왕부의 일부분이긴 하다만, 이곳은 대대로 황가의 소유였던 곳 아니냐. 세월이 키운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둔 것뿐이다.”
“그래도 형님께서 이곳을 무척 애지중지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합니다. 후원의 정자까지 모두 허물고 대숲을 넓히셨다지요.”
“별걸 다 알고 있군.”
대숲을 살피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뜻인가? 태자의 집요함에 혀를 내두르던 정엽이 한숨을 삼켰다.
“제가 형님을 동경하는 마음이 지극해서 말이지요. 한데 대숲은 왜 이렇게 넓게 만드신 겁니까?”
“쉬고 싶어서.”
“쉬고…… 싶어서요?”
“이 안에 있다 보면 세상과 멀어진 기분이 들거든.”
정엽은 마치 속세를 등진 사람처럼 초연하게 굴었다. 태자는 낯선 정엽의 태도가 거슬려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저 말이 진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