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연주의 조급한 속마음을 드러내듯 찻잔이 금세 바닥을 보였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화가 주전자를 들어 찻물을 채웠다.
“너도 홍검과 삼천 리 길을 달려오느라 고생했을 테니 가서 쉬려무나.”
“소인은 아가씨 곁에 있으면 하나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디 함께 있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말만으로도 고맙구나.”
희미하게 웃어 보인 연주가 가화의 손등 토닥여 주고는, 다시 차를 음미하며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황후마마께서는 폐하의 단약을 만드는 도사가 영방궁 근처에 지은 도관에서 머물고 있다고 했는데…….’
곽 귀비 모자의 의심을 피하면서 도사에게 접근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받아 든 기분이었다. 연주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답을 찾는 일에 골몰했다.
그리고 가화가 채워 준 찻잔이 다시 한번 바닥을 드러낼 때쯤, 세자부 하인이 찾아와 별당의 문을 두드렸다.
“군주마마, 황궁에서 서찰이 왔습니다.”
시양공주가 보낸 서찰인가?
연주는 공주가 제 입궁을 재촉하느라 서신을 보냈을 거라 짐작하고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소성궁에서 온 것이냐?”
“아닙니다. 영방궁에서 온 것입니다.”
영방궁은 다름 아닌 곽 귀비의 처소였다. 놀란 연주가 직접 꽃살문을 열고 나가 하인이 건네는 서신을 받았다.
‘대체 영방궁에서 무슨 일로 나를 찾는단 말인가?’
애써 불안을 감춘 연주가 서둘러 서찰의 겉봉을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이틀 뒤 영방궁으로 오세요.]
연주는 최소한의 격식조차 갖추지 않은 서신을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태자나 곽 귀비나 예의라고는 모르는 사람들이구나. 한데…….”
분명 곽 귀비는 어전에서 폐하를 간호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왜 날 영방궁으로 부르는 거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던 연주가 손에 들린 서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폐하의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함일까? 그렇다면 구태여 나를 부르는 이유는 또 뭐지?’
연주는 미처 읽지 못한 문장이라도 찾아내려는 듯 하얀 종이 위에 남은 먹의 흔적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 순간, 기묘한 느낌의 필체가 그녀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곽 귀비의 필적을 본 적은 없지만, 획순이 제멋대로인 것도 모자라 글자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글씨는 도저히 성인 여성이 쓴 것으론 보이지 않았다.
“설마…….”
영방궁은 곽 귀비의 처소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딸들이 함께 기거하는 곳이기도 했다.
연주는 자신을 찾는 사람이 곽 귀비인지, 아니면 그녀의 세 딸 중 하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이 서신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를 부르는 이유는 여전히 미궁 속이니…….’
입궁 전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연주가 돌아서 가화에게 명령했다.
“이틀 뒤 입궁해야겠으니 가을 예복과 장신구를 찾아 준비해 다오.”
“예, 알겠습니다.”
묵묵히 연주의 곁을 지키던 가화가 별당에서 물러났다.
* * *
이틀 후, 연주는 황궁 지리에 밝은 금란과 황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북문을 지나 곽 귀비의 처소로 향하려니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 발로 호랑이 굴을 찾아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후, 그래도 가야 해. 정신 차리자.’
애써 마음을 다잡은 연주가 바삐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영방궁 앞에 다다르자 낯선 궁녀가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궁녀는 연주를 영방궁의 중심인 주전(主殿)이 아닌 곁채에 해당하는 서배전(西配殿)으로 안내했다.
“드시지요.”
서배전 앞에 멈춰 선 궁녀가 휘장을 걷었다. 궁전 안으로 들어서자 곽 귀비의 막내딸 민예공주가 상석에서 연주를 맞이했다.
‘역시 곽 귀비가 아니라 공주가 나를 부른 거였구나.’
서신의 필체로 미루어 보아 어쩌면 저를 부른 사람이 곽 귀비가 아닐 수 있다고 예상했던 연주가 조금 편한 마음으로 예를 갖췄다.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상궁, 군주를 부축해 주게.”
연주의 인사를 받은 민예공주가 제 곁에 서 있던 상궁에게 분부했다. 연주는 마치 황후처럼 아랫사람을 부리는 민예공주의 행동에서 사람들 앞에 돋보이길 좋아하는 그녀의 성향을 읽었다.
“감사합니다.”
공주를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한 연주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짐짓 도도한 척 미소조차 짓지 않던 열두 살 소녀의 입꼬리가 만족감으로 씰룩거렸다.
“자리에 앉으세요.”
민예공주가 우아한 손짓으로 의자를 권했다. 연주는 공주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아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내 어머니께서 군주를 부르신 줄 알고 많이 놀랐겠네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내가 꼭 군주를 만나고 싶었거든요.”
“저를 부르신 분이 공주마마이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공주마마를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연주는 공주에게 장단을 맞추며 매끄럽게 대답했다. 그녀는 상석에 앉아 윗전의 권력을 만끽하는 공주의 모습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역시 내 스승의 필체를 연습한 보람이 있었네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배시시 웃어 보인 공주가 상궁을 채근했다.
“어서 다과를 내오게.”
“예, 마마.”
상궁이 손뼉을 치자 스무 명쯤 되는 궁녀들이 우르르 쟁반을 받치고 들어와 연주 앞에 나란히 섰다.
자세히 보니 다섯 명은 서로 다른 모양의 찻잔을 하나씩 받쳐 들고 있고, 나머지 열다섯 명은 각양각색의 간식 접시를 받쳐 들고 있었다.
황궁 생활에 익숙하기는 하지만 이런 광경은 또 처음이었다. 연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공주를 돌아보았다.
“군주가 원하는 것을 고르세요.”
공주는 관용을 베푸는 것처럼 여유롭게 손짓했다. 연주는 기를 쓰고 어른 흉내를 내는 공주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일단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궁녀가 든 차와 다과 한 가지를 골랐다.
“그걸로 충분하겠어요?”
“하나같이 공주마마의 은혜가 담긴 것들이니 저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한데, 무슨 일로 소녀를 찾으셨는지요?”
“아, 그건……. 상궁, 다른 궁녀들을 모두 물리게.”
대수롭지 않은 질문에 민예공주가 상궁 하나만을 남기고 주변인을 모두 물렸다. 그런 뒤 상궁을 향해 눈짓했다.
공주의 신호를 받은 상궁은 상석 근처에 놓여 있던 상자를 가지고 내려와 연주의 앞에 뚜껑을 열어 보였다.
너비가 한 자쯤 되는 묵직한 자개 상자 안에는 양질의 보석으로 세공된 다양한 패물이 가득했다.
“이게 다 무엇이옵니까?”
이 상황을 선뜻 이해하지 못한 연주가 공주에게 물었다. 공주는 상기된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군주가 나를 위해 향을 만들어 주면 내어줄 보답입니다.”
“지금 향이라 하셨습니까……?”
“군주가 향주에서 유명한 상연부인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오직 나만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귀한 향을 만들어 주세요.”
태자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민예공주라면 연주가 상연부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귀한 향이 대체 뭐란 말인가?
당황한 연주가 자개함 안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공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단, 나를 위해 만든 향은 아무에게도 알려 주면 안 됩니다. 특히 다른 공주들과 귀족 영애들에게는요!”
스스럼없이 조건을 덧붙인 공주의 얼굴은 자신의 요구가 절대로 거절당할 리 없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예공주가 저를 찾은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한 연주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건 기회야……!’
처음부터 저를 찾은 사람이 곽 귀비가 아닌 그녀의 딸 중 하나라면, 공주를 구슬려 도사와 접촉할 계기를 만들어 볼 생각이던 연주였다.
한데 저를 찾은 사람이 곽 귀비의 막내딸, 민예공주라니.
그녀는 모두의 귀여움을 독차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안하무인으로 유명했다. 형제자매들은 물론이고 또래 무리에서 돋보이려는 욕심 때문에 사치가 일상이라는 소문도 자자했다.
‘자고로 오만한 사람을 다루려면 애를 태우는 게 최고지.’
연주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송구하오나, 공주마마께서 뭔가 오해하고 계신 듯하옵니다. 소녀는 상연부인이 아니에요.”
“……아니라고?”
공주는 연주의 뻔한 거짓말에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공주가 어떤 표정을 짓건, 연주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상연부인과 가까운 사이이기는 합니다. 아마 제가 청을 넣으면 상연부인도 흔쾌히 공주마마를 위한 향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 말은?”
“제가 공주마마를 위해 상연부인에게 특별히 청을 넣어 보겠다는 뜻입니다. 상연부인은 요즘 일을 쉬며 누구의 주문도 받지 않고 있거든요.”
아, 군주는 자신이 상연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구나! 한발 늦게 연주의 속뜻을 알아차린 공주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동시에 공주는 연주와 둘만의 비밀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공주 또한 연주가 상연부인이라는 사실이 되도록이면 널리 퍼지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다른 언니들이나 귀족 영애들에게까지 이 소식이 퍼지면 그들도 득달같이 향을 주문할 테고, 그러면 연주가 계속 저만을 위한 향을 만들 수 없게 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생각을 마친 공주가 밝은 목소리로 화답했다.
“그래, 하면 군주가 상연부인에게 청을 넣어 주세요. 그 패물도 그냥 모두 가져가서 나 대신 상연부인에게 전해 주고요.”
“공주마마의 말씀에 따르겠사옵니다. 하온데…….”
“왜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상연부인은 이미 수중에 재물이 넘쳐서, 과연 이런 패물 정도로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