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홍검은 연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연주가 다정하게 화답했다.
“내가 향주에서 지내는 동안 자네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는데,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야지.”
“정말이십니까?”
“밖에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네.”
“예, 부인.”
연주는 금란, 가화, 홍검과 함께 별당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 한쪽에 자리를 잡은 그녀가 홍검에게 반대편 자리를 권했다.
“어서 앉게.”
“예, 감사합니다.”
홍검이 착석한 것을 확인한 연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말해 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저, 그게…….”
“어찌 그리 뜸을 들이는가?”
“부인, 부디 제 아버지를 찾아 주십시오!”
우물쭈물하던 홍검이 대뜸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이마를 조아렸다. 이렇다 할 설명 없이,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부친을 찾게 도와 달라니. 사안의 중요성을 깨달은 연주가 대답했다.
“가족을 찾는다는데 당연히 도와야지. 망설이지 말고 사연을 천천히 얘기해 보게.”
이윽고 연주의 눈짓을 받은 금란이 홍검을 일으켜 그가 의자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홍검은 안도한 얼굴로 제 사정을 풀기 시작했다.
“사실 저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제 아비는 오랫동안 수도의 청루에서 일을 했지요. 그런데 넉 달 전부터 갑자기 아버지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저런.”
“수도로 올라오자마자 아비가 일하던 청루부터 찾아가 보니, 다들 아비의 행방을 모른다며 시치미를 떼더군요.”
“어째서?”
“그건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누구는 아비가 군졸에게 잡혀갔다고 하고, 누구는 손님과 싸움이 붙어 맞아 죽었다고 하니 진실을 알면서도 거짓으로 둘러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곧장 나를 찾아온 것인가?”
“아닙니다. 가화 낭자와 함께 이곳으로 오기 전, 그곳에서 가장 오래 일했다는 기녀를 만나 제 신분을 밝히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말을 할수록 아비에 대한 걱정이 사무쳐 목이 멘 홍검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훌쩍였다. 홍검에게 말없이 손수건을 건네준 연주가 차분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들이 아비를 찾는다는데 어찌 이리 매몰차게 구느냐, 생사만이라도 알 수 있게 해 달라 했더니…….”
“그래, 어찌 되었다던가?”
“그제야 아비가 높으신 분의 부름을 받아 넉 달 전 황궁으로 들어갔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황궁으로?”
“예.”
연주는 홍검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장소가 튀어나오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하나 아무리 상전의 명이라 한들 평범한 백성이 황궁에서 넉 달이나 머물 방법은 없네. 특히 사내라면 더욱 그렇지.”
황궁에 머물 수 있는 사내는 오로지 황족과 환관뿐이다. 물론 연주처럼 황제나 황후의 명령으로 황궁 출입을 허락받은 자들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은 아침에 입궁해 저녁이 되면 모두 궁에서 나가야 했다.
“예, 저도 그 점이 괴이하여 부인을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녀는 분명 제 아비가 황궁의 높은 분께 부름을 받아 입궁했다고 했습니다.”
“확실한가?”
“제게 아비의 소식을 전해 준 기녀는 이 사실을 다른 이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만약 꾸며 낸 이야기라면 그토록 입단속을 시킬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일리 있는 홍검의 의견에 연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홍검의 아비를 누가 불러들였는지는 알 수 없어도, 예사롭지 않은 일에 휘말린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홍검의 아비를 대체 왜 불러들인 거지? 그에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답이 막힌 연주는 이내 홍검의 아비가 수도의 청루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눈에 띄게 표정이 어두워졌다.
연주가 아는 한, 황궁에서 청루와 인연이 있을 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데, 홍검. 자네의 부친은 청루에서 무슨 일을 하였지? 또 그 청루의 이름은 무엇이고?”
“제 부친이 만든 오석산을 신선의 영약이라며 값비싸게 구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해서 오래전부터 패홍루와 연을 맺고 그곳에서 일하셨지요.”
“……자네 지금 뭐라 했는가. 오석산?”
“예, 패홍루에서 오랫동안 오석산을 제조하셨습니다.”
홍검의 말을 들은 연주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그녀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패홍루는 분명 곽 귀비가 황제의 성총을 입기 전에 몸담았던 곳이었다.
다음 순간, 연주의 머릿속에 황후와 비설헌에서 주고받은 대화가 스쳤다.
‘참으로 걱정이다. 어전 태감이 내게 이르길, 폐하께서 지난달부터 탕제조차 드시지 않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약만 복용하고 계시다 하는구나.’
‘단약이요?’
‘그래. 귀비가 궁 밖에서 연단술에 뛰어난 도사를 수소문해 비밀리에 입궁시켰다. 태자가 영방궁과 가까운 곳에 도관을 마련해 주고, 도사로 하여금 매일 폐하께서 드실 단약을 만들어 바치고 있지.’
지금까지 여러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통해 순식간에 그럴듯한 가설을 세운 연주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곽 귀비가 입궁시켰다던 도사가 홍검의 아비란 말인가? 그렇다면 폐하께서 드신다는 단약의 정체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연주가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지긋이 내리눌렀다. 비록 가설일 뿐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지난 일을 돌이켜 보니 모든 의문이 해소됐다.
‘그래서 태자가 그토록 여유로운 거였어. 거리낌 없이 전쟁을 주장하고, 대화국의 강산이 제 것이라 호언장담한 게 다 그것 때문이었어. 오석산으로 폐하를 조종하고 있으니까!’
연주는 비록 오석산에 중독된 당시의 기억은 없지만, 자신이 마치 광인처럼 굴었다는 사실만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황제라면 그간 그가 벌인 기행 역시 모두 설명됐다.
곽 귀비가 어전으로 거처를 옮겨 황제를 보살피고 있는 이유도, 태자와 곽 귀비 외에 타인이 어전에 접근하기 어려운 것도 모두 다 같은 이유일 가능성이 컸다.
‘폐하께서 중독되어 계신 거야. 분명해!’
시시각각 변하는 연주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피던 홍검이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짚이는 구석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렇네. 하지만 아직은 모든 게 심증일 뿐이라 당장 전부를 말해 줄 수는 없어. 내가 자네의 아비로 예상되는 사람과 접촉할 방법을 찾아보겠네.”
“그럼 제 아비가 살아 있다는 뜻입니까?”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 그럴 걸세.”
수도로 올라와 아비가 황궁으로 불려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뒤, 내내 아비가 궁중에서 비명횡사한 것이 아닐까 염려한 홍검이었다.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연신 연주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 인사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네. 우선은 내가 짐작하는 그 사람이 자네의 부친인지부터 확인해 봐야겠어. 한데…….”
“왜 그러십니까?”
“내가 그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나는 자네 부친의 얼굴을 모르니…….”
연주가 말끝을 흐리자 조급해진 홍검이 사색이 되어 말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알았네. 그렇담 자네는 당분간 세자부에서 지내는 것이 좋겠어.”
“아닙니다. 도와주시기까지 하는데 폐를 끼칠 순 없지요.”
“자네가 패홍루에서 부친의 행방을 캐묻는 모습을 누군가 지켜봤다면, 자네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서 그러네. 하니 불편하더라도 내 말에 따라 주게.”
연주의 말을 듣고서야 예상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부닥쳤음을 깨달은 홍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라도 빨리 아비를 찾지 않으면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담 부인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하면 금란아, 표 집사에게 일러서 홍검이 세자부에서 지내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가씨.”
연주의 명을 받은 금란이 한 발 물러나 홍검이 예를 갖추기를 기다렸다.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던 홍검은 금란의 눈짓을 받고 어영부영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부친의 일로 마음이 편치는 않겠지만, 향주에서 올라오느라 여독이 쌓였을 테니 나중을 위해서라도 기력을 회복해 두게.”
“예, 명심하겠습니다.”
비장하게 대답한 홍검이 금란과 함께 자리를 떴다. 연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식은 차로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
옆에 있던 가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짐작하고 계신 바가 무엇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홍검의 아비가 아무래도 태자와 곽 귀비의 수중에 있는 것 같구나.”
“아가씨와 곽 귀비 모자 사이의 악연에 대해선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한데 홍검의 아비가 그자들에게 붙잡혀 있다면 큰일이 아닙니까?”
당장 홍검 부자의 안위도 걱정이지만, 곽 귀비 모자가 홍검의 아비를 비밀리에 입궁을 시킬 정도라면 연주가 아무리 애써도 그를 만나기 쉽지 않을 터였다.
“아무리 어려워도 방법을 찾아야지. 그래야 황제 폐하도 구하고 연친왕 전하도 도울 수 있을 게다.”
“황제 폐하와 연친왕 전하요……?”
“어쩌면 이 일에 모두의 목숨이 걸려 있을지도 몰라. 오라버니께는 내가 때가 되면 직접 말씀드릴 테니 이 얘기는 당분간 가화 너만 알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가화는 연주가 어떻게 황제를 구한다는 것인지, 또 어떻게 연친왕을 돕는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판단만큼은 온전히 신뢰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잘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