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28화 (128/161)

128화.

“…….”

꽃살문을 등지고 선 연주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정엽의 얼굴을 마주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까 봐. 품에 안겨 울고 말까 봐. 그래서 그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문을 걸어 잠그고 몸을 숨긴 그녀였다.

한데 애걸하는 정엽의 목소리만으로도 가슴에 파란이 일었다. 연주는 아무 죄 없는 앞섶을 부여잡은 채 잠긴 목을 가다듬었다.

“몸도 성치 않은 분께서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어서 연왕부로 돌아가 회복에 전념하세요.”

목소리가 떨리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연주의 거절에도 정엽의 애원이 이어졌다.

“네가 괜찮은지만 보고 갈게. 그럼 되잖아.”

“전하께는 저를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널 위해서 삼천 리를 꼬박 달려왔어. 그런 내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고작 이것뿐이야?”

연이은 거절에 울컥한 정엽이 되물었다. 슬픔이 묻어나는 정엽의 원망에 금세 연주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러지 마, 연주야. 제발. 한 번만…….”

정엽이 다시 문을 부숴 버릴 것처럼 뒤흔들었다. 그 후로도 한참 문고리를 잡아당기던 그는 계속 풀리지 않는 빗장에 낙담해 고개를 떨궜다.

한 손으로 문을 짚은 채 멀거니 서 있던 그는 더 이상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는 꽃살문에 이마를 대고 안절부절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문을 부숴 버려서라도 연주를 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영영 그녀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

한편, 빗장을 움켜쥐고 정엽이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던 연주는 꽃살문의 얇은 비단 위에 드리운 정엽의 그림자를 보며 마음을 삭였다.

정엽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의 망연자실한 그림자가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듯했다.

연주는 그의 커다란 손이 놓인 자리에 가만히 제 손을 올려놓았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정엽의 희미한 온기에 숨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가빴다.

‘잠깐이면 돼. 잠깐이면…….’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다.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은 고통도 언젠가 흐르는 시간처럼 덧없어지리라.

모두에게 이것이 최선이었다. 굳게 마음먹은 연주가 울음을 삼키고 타이르듯 말했다.

“제발 더는 정에 얽매여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지 마세요. 많은 사람들이 전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럼 너는 어떤데. 너도 나를 걱정해?”

“…….”

“너는 내가 피를 토하다 쓰러져도, 너를 그리워하다 죽어도 아무렇지 않아?”

혹여 연주의 마음속에 과거 뜨겁게 타오르던 애정의 불씨가 남아 있지는 않을까. 정엽은 실낱같은 희망을 움켜쥐고 그녀를 다그쳤다.

한참을 망설이던 연주가 대답했다.

“저 역시 전하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서 돌아가세요.”

“정말 날 걱정한다면 이 문부터 열어.”

“저는 당분간 수도에서 지낼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하니 염려 말고 돌아가 몸부터 추스르세요. 그리고 전하께서 하셔야 할 일을 하십시오.”

연주는 우선 정엽이 제게 매달리며 그 자신을 돌보지 않는 일이 없게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목숨을 걸고 저를 뒤쫓아 올 지경인 정엽을 더 자극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반면 정엽은 자신과의 행복보다 대의를 앞세우는 연주가 밉고 답답할 뿐이었다. 다만 소리 소문 없이 떠나지는 않겠다니 그것만큼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네가 왜 이러는지 알아.”

“…….”

“네가 말한 대로 할 테니까. 그 전엔 절대로 여길 떠나면 안 돼. 약속해.”

“네, 그렇게 할게요.”

과연 이 약속은 지켜질 수 있을까.

정엽은 연주의 대답을 듣고도 오랫동안 별당을 떠나지 못하다가, 석양과 함께 발걸음을 돌렸다.

* * *

정엽을 돌려보낸 후, 연주는 한동안 그의 존재를 잊은 양 평온한 날들을 보냈다. 향주로 떠나기 전처럼 집 안을 산책하고, 식물을 돌보고, 온종일 책 속에 파묻혀 지내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채신은 이번에야말로 연주가 완전히 마음을 정리한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채신의 생각과 달리 연주는 틈만 나면 떠오르는 정엽 때문에 홀로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 사람이 어서 몸을 회복해 태자를 끌어내려야 오라버니도 황후마마도 안심하실 텐데…….”

말로는 모두의 평온을 위해서인 척했지만, 실은 그저 정엽이 걱정될 뿐이라는 걸 부득불 외면한 채였다.

“산책이나 나가 볼까?”

연주는 오늘도 일부러 정원으로 나섰다. 국화꽃을 따며 사랑채 쪽을 살피다 보면, 어쩌다 정엽의 소식을 우연히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아가씨, 오늘도 국화를 따시게요?”

“응? 응, 그래.”

“그러고 보니 중양절(重陽節)이 얼마 안 남았네요. 소인도 같이 가요.”

아무것도 모르는 금란은 연주가 정원을 서성거리는 게 중양절을 준비하느라 그런 줄 알고 바구니까지 챙겨 따라나섰다. 연주와 함께 국화 화단에 도착한 금란은 능숙하게 꽃을 꺾으며 조잘거렸다.

“올해는 특히 국화 향기가 진해서 술로 빚으면 향이 정말 일품일 거예요. 세자 저하께서도 좋아하시겠네요. 그렇죠?”

“그래,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가화가 국화떡을 참 좋아했는데……. 지금쯤 향주에서 무얼 하고 있으려나?”

온 정신이 정원 너머 사랑채로 쏠려 있던 연주는 그제야 가화에게 무사하다는 소식조차 전하지 못한 것을 상기했다. 연주의 얼굴에 금세 그림자가 드리웠다.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정엽의 안위도 중요하지만, 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애써 준 가화를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니! 자기 자신을 책망하던 연주가 한숨지었다.

‘실은 주변을 살필 여유조차 없을 만큼 머릿속이 온통 정엽으로 가득 차 버린 걸까?’

수도에서 향주까지는 파발을 통하면 열흘, 전서구를 통하면 하루면 닿을 거리였다. 이제라도 가화에게 전서구를 날려야겠다고 생각한 연주가 국화 따기를 그만두고 별당 쪽으로 돌아섰다.

“아가씨, 벌써 들어가세요?”

“그래, 오늘은 바람이 차구나.”

“예, 그럼 바구니는 이리 주세요. 소인이 들게요.”

“고맙구나.”

금란에게 꽃바구니를 내어준 연주가 서둘러 걸었다. 그때 등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아가씨!”

다급한 목소리에 놀란 연주가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별당 입구 앞에 가화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가화야!”

연주가 반가움에 두 팔을 크게 벌려 보이자, 가화가 연주에게 달려와 발치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너무 늦어 송구합니다.”

“그런 말이 어디 있느냐. 그렇지 않아도 네게 소식을 보내려던 참이었다.”

손수 가화를 일으켜 세운 연주가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가화는 무엇이 그리도 미안한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가씨보다 먼저 수도에 닿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혹 소인 때문에 고초를 겪으시진 않았는지요?”

“고초라니. 그런 말 말거라. 네 덕분에 오라버니께서 내가 동궁에 들 것을 알고 미리 움직여 주셨다.”

“다행입니다. 만약을 위해 전서구를 세 마리나 띄웠는데 세자 저하께 무사히 잘 닿은 모양이군요.”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구나.”

연주는 이제라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듯 가화의 두 손을 꼭 그러쥐었다. 연주의 인사에 눈시울이 붉어진 가화가 젖은 눈꼬리를 훔쳤다.

“참, 내 정신 좀 봐. 아가씨를 꼭 뵙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함께 왔습니다.”

“나를……?”

“예, 아가씨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입니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연주는 가화가 지금에서야 수도에 도착한 이유가 함께 온 사람과 관계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홍검! 이리로 들어오게!”

한데 홍검이라니?

연주는 가화의 입에서 튀어나온 의외의 이름에 그녀를 따라 별당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대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홍검이 서 있었다.

“홍검!”

부름에도 대답이 없자 가화가 재차 홍검을 불렀다. 그러나 정작 홍검은 별당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풍 대인을 따라 어지간한 권세가의 대저택을 드나들어 본 홍검이지만, 세자부의 위용은 웬만한 권세가 그 이상이었다.

“어서 이리 오지 않고 뭘 하는가!”

난생처음 접해 보는 휘황찬란함에 주눅이 들어 있던 홍검은 제 어깨를 잡아끄는 가화를 따라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연주를 향해 엉거주춤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상연부인……. 아니, 군주마마를 뵙습니다.”

“어서 일어나게.”

“감사합니다. 부인, 아니 마마.”

연주는 이 상황이 낯설어 몸 둘 곳을 모르는 홍검을 향해 멋쩍게 웃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자네를 속일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하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예전에 부르던 대로 나를 선생이나 부인으로 불러도 좋네. 너무 어려워 말게.”

“감사합니다.”

만향방의 조향사 상연부인이 평해왕의 하나뿐인 딸이라니.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이 상황이 꿈만 같은 홍검이 가화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가화는 뭘 망설이냐는 듯 눈짓으로 홍검을 재촉할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분주하게 오가는 시선을 알아차린 연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도 가화와 함께 수도로 올라왔다고?”

“예, 가화 낭자가 수도로 간다기에 저도 중요한 볼일이 있어 함께 왔습니다.”

“한데 가화의 말로는 자네에게 내 도움이 필요하다던데……?”

“소인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 그렇습니다. 선생께서 도와만 주신다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