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묵묵히 채신의 말을 듣던 연주는 이번에야말로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다정도 병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누이임을 잘 아는 채신은 그녀를 안타깝게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별당을 나섰다.
홀로 남겨진 연주는 우두망찰하다가 혼인 전날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부부라는 건 서로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것이란다. 내가 그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내가 되어 서로의 행복과 슬픔, 고통을 내 것처럼 공유하는 것이지.’
연주는 지금껏 정엽에 대한 저의 마음을 우정이나 연민 정도로 치부해 왔지만, 그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정엽이 고통받을 때마다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아픔이 몰려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늘 정엽만 내려놓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나조차도 그러했구나.’
내가 아직 그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서로 은애하는 마음이 통했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임에도 착잡함이 앞섰다. 정엽을 사랑한다고 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음을, 연주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음흉한 암투가 도사리는 황실로 돌아가는 건 원치 않아.’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정엽이 변했다 한들 그가 대의를 위해 언제든지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황족인 이상 연주는 예전처럼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 다시 북쪽 변경이 소란스러워진다면 나는 예전처럼 정엽이 잘못될까 봐 밤낮으로 마음 졸이며 살아야겠지.’
오라비의 말처럼 이제라도 완전히 정엽을 제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야 했다. 연주가 긴 한숨과 함께 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 * *
한편, 궁문 앞에서 쓰러진 후 곧장 연왕부로 옮겨진 정엽은 사흘 만에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세자부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몸이 회복되실 때까지 말에 오르시는 것은 절대로 금지입니다!”
양해의 고집으로 마차에 몸을 실은 정엽은 세자부에 도착하자마자 거칠게 붉은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낯익은 얼굴의 집사가 문을 열고 나와 인사를 건넸다.
“연친왕 전하 아니십니까. 세자 저하를 뵈러 오셨는지요?”
“군주는 안에 있느냐?”
“아, 군주마마께서는 별당에 계십니다.”
정엽은 집사의 대답을 듣자마자 무작정 대문을 넘어 별당 쪽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집사는 이미 그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차분하게 앞을 막아섰다.
“송구하오나 지금은 군주마마를 뵈실 수 없습니다.”
집사의 말을 끝으로 세자부의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하인들은 별당으로 나 있는 좁은 길목에 짝을 지어 겹겹이 늘어섰다.
“이게 뭣들 하는 짓이냐?”
“소인은 그저 주인의 명을 받들 뿐이옵니다.”
“군주는 내 아내고 네 주인인 세자의 권위 역시 본 왕을 넘어서지 못한다. 항명하려는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집사와 하인들은 정엽의 겁박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 또한 자신이 지키고 있는 별당의 주인이 한때 연왕의 아내였으며, 눈앞의 연왕은 세자가 일생을 건 주군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길을 열어라.”
부상이 깊은 탓에 안색이 여전히 파리하기는 해도, 정엽이 내뿜는 살기만은 당장 사람을 죽이고도 남았다.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 하인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이들은 어쨌거나 세자의 사람. 둘 중 한 사람의 명을 따라야 한다면 당연히 세자의 명이 우선이었다.
“전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대치가 이어질 때였다. 처소인 정방에서 소식을 듣고 나온 채신이 정엽과 하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안으로 들어가서 사정을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군주를 보러 온 것이지 너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다.”
“제가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누이를 만나시려거든 제 얘기부터 들으시지요.”
대체 이토록 필사적으로 내 앞을 막아서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여전히 저를 둘러싼 하인들과 채신의 행동을 곱씹던 정엽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설마 연주가 나를 만나길 원하지 않는 건가?’
채신은 얼굴에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정엽을 확인하곤 집사를 향해 소리쳤다.
“내 처소로 차를 내어주게.”
“예, 저하.”
이윽고 언제 그랬냐는 듯 소란이 말끔히 정리되자, 정엽은 채신의 손에 이끌려 정방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용정차입니다.”
좀 전의 일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허리가 굽은 집사가 찻잔을 내려놓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제 방 안에는 정엽과 채신뿐이었다.
“할 말이 무엇이냐.”
찻잔을 건드리지도 않은 정엽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음미한 채신이 느긋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토혈하고 혼절하신 일로 태자가 궁지에 몰렸습니다. 황궁 안팎에선 전하께서 그토록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신 이유가 다 용손인 전하를 질투하여 못살게 군 태자 때문이라고 믿고 있지요.”
“사람들의 생각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전하께선 아무 상관이 없는지 몰라도, 저와 연주에게는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무슨 뜻이지?”
“태자를 끌어내려야 저와 연주를 비롯한 채씨 일가 모두가 평안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채신은 그동안 정엽이 목숨을 걸고 수도로 올라온 일과 관련해 연주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도록 부단히 애를 썼다. 연주가 다시 정엽과 얽혀 주목받으면, 그녀는 또다시 정쟁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문제에 있어선 연주와 정엽이 거리를 두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정엽 역시 이 점을 모르지 않았다. 단지 모른 척할 뿐이었다.
채신은 마치 그간의 인연을 정리하듯 찻물이 얼마 남지 않은 찻잔을 탁자 위에 뒤집어 내려놓았다.
“지금이야말로 태자를 공격하기 좋은 시기입니다. 한데 왜 다른 곳에 정신을 쏟으시는 겁니까?”
“…….”
“대업을 먼저 생각하셔야 합니다. 태자는 이번 일을 계기로 필사적으로 전하께 덤벼 올 거예요. 제 누이를 겁박해 애오국 정벌을 추진하고 그간 전하께서 쌓은 업적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다 엎어졌으니 얼마나 속이 뒤집히겠습니까?”
“…….”
“대업 하나만 생각하기에도 벅찬 때입니다. 전하께서 이리 정신을 못 차리시면 다 죽습니다.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제 누이도 죽겠지요. 그러니 제발…….”
“태자는 반드시 쓸어버릴 거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꼭 연주를 만나야겠어.”
정엽은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태자의 욕심에, 아니, 권력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정엽의 머릿속엔 온통 연주뿐이었다. 당장 연주의 얼굴을 제 두 눈에 담고 그녀를 품에 안아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면 정말이지 죽을 것만 같았다.
태자를 끌어내리는 것은 연주를 보고 나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전하.”
채신은 제 누이를 향한 갈급함으로 어쩔 줄 모르는 정엽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앞길을 막는 하인들을 가차 없이 도륙할 것처럼 무시무시한 분노를 표출할 때는 언제고,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스스로 약자가 되기를 자처하다니.
채신은 오만하기 그지없던 황제의 적장자가, 백전백승의 불사왕이 이토록 안달복달하는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주군인 정엽 못지않게 누이인 연주의 안락한 인생 역시 소중했다.
“전하께서 이리 나오시면 연주만 더 곤란해집니다. 연주가 왜 아무런 연고도 없는 향주로 갔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 모르겠다.”
정엽은 지금도 연주와의 이별을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꼭 그리 먼 곳으로 도망치듯 떠나야 했을까.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모두 버리고 떠날 만큼 내가 미웠던 걸까.
그러나 이 순간에도 과거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정엽과 달리 채신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태자는 연주가 전하의 약점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온갖 핑계를 대며 다시 연주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것 아닙니까. 정말로 제 누이를 위한다면 제발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이 상황이 힘들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제는 연주도 전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연주가 또다시 저를 밀어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정엽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채신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이제는 연주도 전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연주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건 네 생각이냐, 아니면 연주의 생각이냐?”
채신은 연주에게 마음을 다잡으라고 당부하긴 했으나 정작 그녀의 의사를 제대로 물은 적은 없었다.
채신이 침묵을 택하자, 정엽이 이를 갈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연주의 뜻을 네가 대신 전할 필요 없다. 내가 직접 연주에게 들을 거니까. 그러니 다시는 이런 일로 내 앞을 막지 마라.”
채신의 처소인 정방에서 나온 정엽은 그 길로 연주가 있을 별당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연주는 이미 방문을 걸어 잠근 지 오래였다.
“연주야.”
마음이 급해진 정엽은 마구잡이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얇은 비단을 바른 꽃살문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그때마다 단단하게 질린 빗장이 덜그럭거리며 정엽의 앞을 막아섰다.
정엽은 연주가 또다시 말도 안 되는 이별을 종용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어떻게든 연주의 마음을 돌려 보고자 문을 두드리며 사정했다.
“잠깐이면 돼. 그냥 네 얼굴을 보러 온 거야. 태자가 너를 불렀다면서. 난 그냥 네 걱정이 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