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26화 (126/161)

126화.

정신없이 피를 토하다 몸의 중심을 잃은 정엽이 끝내 말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황망한 얼굴로 굳어 있던 연주가 반사적으로 정엽을 향해 튀어 나갔다.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채신이 연주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어딜 가려는 것이냐!”

“……오라버니?”

“전하는 내가 모실 테니 너는 먼저 세자부로 돌아가 기다려라!”

연주는 제게 호통 치는 오라비를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에 아랑곳없이, 채신은 궁문 앞을 지키던 하인들에게 연주를 맡기고는 곧장 정엽에게 달려갔다.

“가셔야 합니다.”

하인들은 경황없는 연주를 억지로 마차로 이끌었다. 연주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이끌며 정엽을 돌아보았다.

정엽은 쓰러진 와중에도 연주를 눈으로 좇다가, 그녀가 점점 멀어지자 힘겹게 손을 뻗었다.

“가지 마…….”

정엽은 그저 같은 말만 중얼거리다가 가물가물한 정신을 놓았다.

* * *

세자부 별당으로 돌아온 연주는 맥없이 침상에 주저앉았다. 떨리는 숨을 가다듬을수록 궁문 앞에서 본 처참한 광경이 자꾸만 되살아났다.

연주는 세상이 무너진 듯 아찔한 기분에 차라리 울고 싶었다.

“바보같이…….”

수도로 소환돼 태자를 만나는 동안, 연주는 정엽이 저를 뒤쫓아 올 거라고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제멋대로긴 해도 무모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이득이 없으면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많이 다친 사람이니까.

정엽이 저를 따라오지 않을 이유가 차고 넘쳐서 그의 행보에 마음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체 왜 따라온 거야. 왜…….”

마음이 쉼 없이 너울거리며 그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정엽의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과거로 역행하던 기억이 향산 별궁에서 이별을 고하던 순간에서 멈췄다.

자신에게 사랑은 지키는 것이라 항변하던 정엽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귓전을 울렸다.

‘그래서였을까?’

연주는 이제 정엽의 사랑을 가볍다고 외면할 수 없었다. 후회로 가슴이 아렸다. 그 무뚝뚝했던 사내가 서툴게 표현한 진심을 부정하고 깎아내리기 바빴던 자신이 눈물 날 만큼 미웠다.

연주는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 앞에서 길게 탄식했다.

“상처가 깊다고 했는데. 오는 내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을 텐데…….”

천리마가 끄는 마차에 실려 오는 것만 해도 고된 여정이었다. 건장한 동궁의 시위들조차 나중에는 피로에 지쳐 말고삐도 제대로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멀쩡한 사람도 견디기 힘든 삼천 리 길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따라왔으니 싸늘한 주검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할 만했다.

“혹시 나쁜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정엽의 단정한 입술에서 쏟아지던 선혈이 섬뜩해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만약 이대로 영영 정엽을 보지 못하게 된다면……?’

그저 가정에 불과한데도 당장 숨 막히는 공포가 밀려들었다. 모골이 송연해진 연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정엽의 상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아가씨, 어디 가시려고요? 세자 저하께서 하신 말씀을 잊으셨어요?”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연주를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금란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제야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던 오라비를 떠올린 연주가 멈칫했다.

제게 늘 다정하기만 했던 사람이 왜 앞을 막아섰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막무가내로 행동할 오라비가 아니니 일단 따르는 것이 옳기는 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던 연주는 초조하게 침실을 서성이며 오라비를 기다렸다. 잠시 후, 별당 문이 열리고 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라버니!”

냉큼 오라비에게 달려간 연주가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렸다.

“어떻게, 그이는 어떻게 됐어요?”

연주는 쿵쾅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채신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이는 어떻게 됐냐니까요!”

오라비의 침묵에 애가 탄 연주가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연주의 태도에 더욱 심경이 복잡해진 채신이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일단 진정하고 앉거라. 그럼 얘기해 주마.”

채신은 당장 뛰쳐나갈 기세인 연주를 억지로 침실 안으로 밀어 넣고 근처의 의자에 눌러 앉혔다.

오라비의 힘에 밀려 엉거주춤 의자에 앉은 연주는 불안한 눈으로 오라비를 재촉했다. 그런 누이의 모습에서 정신을 잃고도 연주만 찾아 대던 정엽이 겹쳐 보인 채신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여기까지 말을 몰고 달려오느라 무리를 하신 모양이다.”

“심각……한 건가요?”

“성치도 않은 몸을 한 달이나 혹사하셨는데 망극한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이지.”

“…….”

“그래도 손쓰지 못할 지경은 아니라 하니 마음 놓거라. 호 태의가 아무리 늦어도 한 달이면 전하께서 반드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거라고 장담했으니까.”

호 태의가 확언했다는 말을 듣고야 긴장이 풀린 연주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이의 사소한 반응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던 채신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면 이젠 네 차례다. 묻는 대로 답하거라.”

“……예.”

“향주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전하께선 어쩌다 저리되신 것이야?”

긴장도 잠시, 평소처럼 차분한 오라비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른 연주가 대답했다.

“기우제가 머지않은 때, 황태자가 보낸 살수들이 안가를 습격했습니다. 전하께서 큰 부상을 입으셨고, 저는 의식이 없는 전하를 재궁으로 옮겨 그곳에서 몰래 보살폈지요.”

“……네가 직접 말이냐?”

“예. 혹여 일이 틀어진다면 재궁에서 자작극을 벌여 태자에게 반격할 생각이었습니다. 하나 다행히 기우제 직전에 전하께서 깨어나셔서 기우제를 성공적으로 마치셨지요.”

“그렇담 너는 재궁에서 곧장 수도로 압송된 것이고?”

“그건 아닙니다. 저는 제집에서 태자의 사령에게 붙잡혀 끌려왔어요.”

이 일을 공론화하자면 재궁에서 바로 연주를 압송하는 편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저택에서? 태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신이 되물었다.

“그럼 태자가 너를 불러올린 이유는 무엇이냐?”

“제가 재궁에 머문 사실을 폭로하겠다며 부왕께서 애오국 정벌에 나서도록 설득하라더군요. 이미 성공한 기우제를 트집 잡느니 전쟁으로 조정의 관심을 돌리려는 의도였겠지요.”

“애오국 정벌……. 역시 그렇구나.”

연주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저간의 사정을 이해한 채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바로 정엽에 대한 누이의 태도였다.

고민하던 채신이 이내 마음을 굳히고 말했다.

“한데 연주야, 그렇다면 네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예?”

“못 본 사이에 네가 변한 것 같아 그런다.”

“그게 무슨…….”

“네가 향주로 떠난 이유는 과거의 인연을 완전히 정리하고 홀로서기를 하기 위해서이지 않느냐? 그런데 지금은 마치 예전의 너를 보는 것만 같구나. 전하와 헤어지기 전의 너 말이다.”

채신이 궁문 앞에서 연주를 붙잡은 이유는 그녀가 정엽과 완전히 남남이 되었고, 그들이 다시 얽혀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엽이 궁문 앞에서 토혈하며 쓰러진 일은 궁중은 물론 수도 곳곳으로 퍼져 나갈 게 뻔한데, 그 일의 원인으로 연주가 지목되기까지 한다면 예전의 악몽이 되풀이되고 말 터였다.

“…….”

오라비가 저를 붙잡았던 이유를 뒤늦게 헤아린 연주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머리로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냐며 받아치고 싶은데, 꼭 비밀이라도 들킨 것처럼 간담이 서늘했다.

정엽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 혼란스러워진 연주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럴 리가요. 전하께서 생각지도 못하게 나타나셔서 잠깐 놀랐던 것뿐이에요. 게다가 사람이 눈앞에서 토혈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정녕 그것이 전부냐?”

“네.”

“하면 향주에선 어찌하여 전하를 위해 네 목숨을 걸었느냐? 아무리 전하께서 크게 다치셨다고 해도 재궁으로 따라 들어가는 것은 분명 네 안위를 내팽개친 처사였다.”

“그건…….”

“만일을 위해 자작극을 준비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전하를 위해 계책을 낼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걸 실행하는 건 장 부관에게 맡겨도 충분한 일 아니었더냐?”

채신의 눈에 정엽에게 달려들던 연주의 모습은 단순한 연민 그 이상이었다. 어렵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났으면서 정엽의 일에 이토록 안절부절못하는 누이의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람이 온화하고 따뜻한 심성을 가진 건 장점이라 할 만하지만, 맺고 끊음이 분명하지 못하면 화를 부르기 마련인 것을…….

“네가 재궁에 따라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태자가 그 일을 트집 잡아 너를 수도로 불러올릴 일은 없었을 것이고, 전하께서 너를 뒤따라오실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

“정으로 얽힌 인연은 끈적한 엿가락과 같아. 완벽하게 잘라 버리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붙고 말지. 똑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미궁에 빠지게 될 게다.”

“…….”

“나아갈 것인지 여기 머무를 것인지, 네가 가고 싶은 길의 방향을 다시 돌아보는 편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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