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걸음을 재촉한 두 사람은 비설헌에 도착했다. 비설헌은 늦봄이면 새하얀 배꽃이 만발하는 곳으로, 꽃이 지는 모습이 마치 눈이 날리는 것 같다고 하여 오랫동안 비빈의 사랑을 받아 온 장소였다.
하지만 가을로 접어든 비설헌 앞뜰에는 배꽃 대신 청초한 부용화가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왔구나.”
연주가 비설헌에 모습을 드러내자, 수심 깊은 얼굴로 화단을 바라보던 황후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황후는 저를 향해 예를 갖추는 연주를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인사는 됐다. 어디 상한 데는 없느냐?”
“저는 무탈합니다.”
연주가 밝게 웃으며 화답하자 먹구름이 낀 듯 어두웠던 황후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녀의 손을 마주 잡은 황후가 말했다.
“무사하다니 됐다. 무사하다니 됐어.”
“황후마마…….”
“이러지 말고 어서 앉자꾸나. 먼 길을 달려오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너무 내 생각만 했다.”
“예.”
황후는 연주와 비설헌 안으로 들어가 작은 탁자 앞에 마주 앉았다. 그녀는 궁녀들이 다과를 내어놓거나 말거나 연주의 손을 토닥이며 반가움을 표했다.
“그래도 동궁 덕분에 내 오랜만에 너를 보게 되었구나.”
“이 모든 일이 마마와 재회하기 위함이었나 보옵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참, 마마께서 황자를 보셨다는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고초가 크셨을 텐데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다 네가 마음 써 준 덕분 아니겠느냐. 태교에 좋다는 책이며 출산 후 심신을 달랠 향까지. 네가 보내 준 선물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마마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옵니다.”
연주가 살갑게 답했다.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나니 부쩍 웃음이 는 황후가 말을 이었다.
“따지고 보면 황자를 보게 된 것부터가 다 네 덕이다. 덕교궁에 소유향을 들인 뒤로 폐하께서 자주 걸음을 하셨거든. 그 향만 맡으면 심신이 편해지신다고 말이야.”
“그러셨군요.”
“아마 선황후께서 애용하시던 향이니 폐하께서도 은연중에 기억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향기는 때때로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려 주기도 하니까.”
“그래도 결국 폐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황후마마의 진심이었을 것이옵니다.”
연주는 자기 자신을 선황후의 그늘 아래 두는 것이 익숙한 황후가 안타까웠다. 이런 마음을 황후도 아는지, 연주를 바라보는 눈길이 무척 따스했다.
황후는 문득 지난날이 떠오른 듯 아련한 표정을 짓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가 말을 이었다.
“한데 폐하의 병환은 아직도 차도가 없사옵니까? 동궁의 위세가 아주 기세등등하더군요.”
“폐하께서 병석에 누우신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가니 그럴 수밖에.”
“그럼 폐하께서 자그마치 반년 동안이나 깨어나지 못하고 계신 건가요?”
“아니다. 곽 귀비의 말로는 폐하께서 오래전에 의식을 되찾으셨지만, 국정을 돌보실 만한 여력이 없어 칩거 중이실 뿐이라 하더구나.”
“……곽 귀비가요?”
병중인 황제를 치마폭에 휘감은 총비라. 궁 안에 곽 귀비를 향한 황제의 애정을 모르는 자가 없다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폐하의 용안을 뵈셨습니까?”
“아니. 나도 몇 달째 폐하를 뵙지 못했다. 폐하께서 오로지 귀비만을 찾으며 의지하고 계시거든. 넉 달 전부터는 귀비가 아예 어전으로 거처를 옮겨 밤낮으로 폐하의 시중을 들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상양궁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사실상 태자와 곽 귀비뿐이다.”
“어찌 그런 일이……!”
황후와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연주의 얼굴에 차츰 그늘이 드리웠다. 곽 귀비 모자 외에 아무도 어전에 출입할 수 없다는 건 황제가 그들 수중에 놀아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던 연주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폐하께서 태자와 곽 귀비를 총애하신다고 해도 너무나 이상합니다. 태의는 폐하의 병명이 정확히 뭐라고 합니까?”
“알 수 없다. 곽 귀비가 어전에 들인 최 태의는 폐하의 원기가 무너진 탓에 병명을 특정할 수 없다고만 하더구나.”
“그럼 당장 다른 태의를 들여 폐하의 병세를 살피게 해야지요.”
“폐하께서 최 태의가 아닌 다른 태의는 상양궁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다. 귀비가 폐하의 눈과 귀를 가린 탓이겠지.”
“세상에…….”
분명 무엇인가 있었다. 곽 귀비 모자가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직감한 연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황제가 꼭두각시로 전락해 버린 거라면 정엽과 황후의 앞날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이야기는 지금부터였다.
“참으로 걱정이다. 어전 태감이 내게 이르길, 폐하께서 지난달부터 탕제조차 드시지 않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약만 복용하고 계시다 하는구나.”
“단약이요?”
“그래. 귀비가 궁 밖에서 연단술에 뛰어난 도사를 수소문해 비밀리에 입궁시켰다. 태자가 영방궁과 가까운 곳에 도관을 마련해 주고, 도사로 하여금 매일 폐하께서 드실 단약을 만들어 바치고 있지.”
예부터 불로불사를 꿈꾸며 연단술에 심취한 제왕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황제가 여색에 빠진 걸로 모자라, 국정을 등한시하기까지 한다면 나라가 기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황상께선 그러실 분이 아닌데…….’
연주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던 황제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황제는 냉정하고 변덕스럽긴 해도, 국정을 소홀히 한 적은 없었다. 의심이 많아 남의 손에 자신의 결정을 맡기는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엇일까. 곽 귀비 모자가 무슨 수로 황제 폐하를 미혹하는 것일까…….’
연주는 심란함을 감추지 못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황후가 화제를 돌렸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런 무거운 얘기는 잠시 덮어 두자꾸나. 정엽이 기우제를 지내러 향주로 갔는데, 만나 보았느냐?”
“…….”
“연주야.”
“예? 아, 예, 마마.”
황후의 부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화답하는 황후의 목소리에 기쁨이 묻어났다. 더 말은 하지 않지만 내심 두 사람 사이에 다시 훈풍이 불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연주는 이런 황후의 태도에서 그녀가 정엽의 피습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판단했다.
‘황후마마께 안가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말씀드려야 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연주가 한숨을 삼켰다. 어차피 정엽은 기우제에 성공했고, 앞으로 향주에서 건강을 회복해 위풍당당하게 수도로 돌아올 일만 남은 상태였다. 황후에게 근심을 보탤 필요가 없었다.
이런 연주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황후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수도로 돌아왔으니 당분간은 다시 세자부에서 지내겠구나. 시양이 무척 좋아하겠어. 자주 입궁하여 얼굴을 비쳐 주려무나.”
“예, 그리하겠사옵니다.”
“하면 이만 일어나 보거라. 마음 같아서는 너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만, 지금쯤 왕세자의 속이 까맣게 탔을 것 같아 더는 붙잡을 수 없겠다.”
“소녀가 조만간 덕교궁으로 찾아뵙겠사옵니다.”
“오냐. 살펴 가거라.”
자리에서 일어난 연주가 예를 갖췄다. 황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비설헌 입구 앞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비설헌을 나온 연주는 오라비가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고민했다. 평소대로라면 황자들과 함께 기린전에서 수학하고 있을 사람이지만, 오랜만에 누이가 수도에 왔으니 오늘만은 세자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 북문으로 가자.”
고민 끝에 연주가 북쪽으로 발길을 돌린 순간이었다.
“연주야!”
먼발치에서 저를 부르며 달려오는 오라비가 보였다. 가까스로 엇갈림을 피한 채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누이를 부둥켜안았다.
“괜찮은 것이냐? 동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채신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침착하기로는 으뜸가는 오라비가 이리 조급하게 행동하다니. 황후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저를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 연주가 환하게 웃으며 오라비의 등을 토닥였다.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 안심하셔도 돼요.”
“다행이구나. 난 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채신이 고개를 끄덕이고 연주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질문 세례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태자가 너를 쉽게 놓아주지 않을 줄 알았다. 황후마마께서 도와주셔도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빠져나온 것이냐?”
“깊은 얘기는 세자부에 돌아가서 하도록 해요.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잖아요.”
“아, 그렇지. 그래, 어서 돌아가자꾸나.”
채신은 누이의 손을 꼭 잡고 북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연주는 이로써 저를 둘러싼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여겼다.
‘집에 돌아가는 대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오랜만에 늘어지게 낮잠을 자야지.’
연주는 가벼운 마음으로 궁문을 나섰다. 그 순간, 발밑의 지축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흑마 한 마리가 보였다. 한데 맹렬하게 질주하는 말의 외양이 어쩐지 눈에 익었다. 연주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오래지 않아, 연주는 저를 향해 달려오는 사람이 정엽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길……!’
눈 깜짝할 새에 북문 앞에 다다른 정엽이 연주를 발견하자마자 고삐를 힘껏 잡아당겨 흥분한 말을 멈춰 세웠다.
무시무시하게 달려오던 기세와 달리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그는 우는 듯 찡그리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와중에도 정엽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연주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분명 안도의 미소였다.
“정엽……?”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 연주는 정엽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쁜 숨을 내쉬던 그가 마침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쿨럭쿨럭! 큭……!”
그러나 하얗게 마른 입술에서 쏟아지는 건 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붉디붉은 선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