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사실 태자가 향주에 내려보낸 건 살수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정엽이 머물 관사에도, 재궁 주변에도 그의 눈과 귀가 되어 줄 사람을 암암리에 심어 두었다.
예부터 재궁은 금녀의 구역. 제사를 방해한 자는 누구든 살아남지 못하지만, 특히 여인이라면 더욱 그 처벌이 엄했다. 또 제사를 제대로 받들지 못한 황족은 작위를 빼앗기고 수도에서 추방되어 일평생 불명예 속에서 살아야 했다.
“어찌할 텐가?”
태자는 표정이 점점 굳어 가는 연주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에게 다른 속셈이 있음을 간파한 연주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정엽과 정면으로 다툴 용기는 없으니 이번에도 나를 휘둘러 원하는 것을 얻겠다?’
그러나 연주는 결코 태자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없었다.
“뜻대로 하십시오.”
“……뭐라?”
“제가 연친왕 전하와 재궁에 있었다고 밝혀 보시란 말입니다.”
연주는 태자가 자신을 수도로 불러들인 순간부터 그가 이미 재궁에서의 일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떻게 하면 그가 쳐 놓은 덫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만약 태자가 정말로 재궁에서의 일을 폭로할 생각이었다면, 조정은 이미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저를 회유하려 든다는 건, 재궁에서 있었던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함께 드러날 정엽의 피습 사실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정엽이 공격당한 장소가 어디든 그가 크게 다친 것만은 진실이 아닌가. 정적인 태자가 습격의 배후로 지목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는 부왕을 설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태자로서는 전쟁으로 대중의 관심을 돌리고 조정을 장악하는 게 최선이었다.
잘만 하면 그간 정엽이 쌓은 업적을 흔드는 것은 물론, 전쟁을 반대하는 정적들을 몰아내고, 애오국 정벌을 통해 황태자로서의 명성까지 드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하께서 재궁에서 있었던 일을 공개하신다면, 저는 저를 심문하는 종정사의 종실에게 동궁의 사주를 받아 연친왕을 암살하기 위해 재궁에 들었노라 말할 것입니다.”
황족과 왕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종정사는 종친들로 구성되어 상대적으로 태자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반면 태자에게는 이들의 지지가 무척 중요했다. 종친들이 황제나 태자의 결정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대면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조정에 잡음이 끊이지 않는 탓이었다.
연주에게 예상 밖의 반격을 받은 태자가 큰 소리로 웃었다.
“군주, 지금 제정신인가?”
“유감스럽게도 제정신입니다. 그러니 전하의 뜻을 받들 수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연주는 흔들림 없이 맞받아쳤다. 어느새 태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싸늘하게 변한 태자의 표정은 빼어난 언변과 호감이 가는 행동으로 귀족 사회를 주름잡던 예전의 모습과 딴판이었다.
“사람들이 군주의 말을 순순히 믿을 거라고 보나?”
“제 말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태자 전하로부터 옛정을 이용해 연친왕을 암살하라는 사주를 받았다는 얘기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충분할 것입니다.”
“…….”
“소문의 힘은, 누구보다 전하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태자는 과거 연주와 함께 향산 나들이를 다녀온 것을 궁중에 퍼뜨려 그녀를 궁지로 몬 전적이 있었다. 어찌 그날의 교훈을 잊을까.
희미하게 미소 지은 연주가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전하께서는 부왕을 설득하기 위해 저를 동궁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실 줄 압니다.”
“……뭐?”
“저를 굳이 동궁으로 소환하신 건 제 목숨을 빌미로 부왕을 겁박해 전쟁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일 테니까요. 틀립니까?”
“…….”
“하지만 부왕께서 끝까지 뜻을 꺾지 않으신대도, 전하께선 평해왕부의 그 누구도 벌할 수 없으실 겁니다.”
평해왕의 안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아들인 왕세자와 왕자, 그리고 평해왕부를 따르는 모든 이들을 뜻하는 것이다.
아무리 평해왕의 딸이라지만 과연 이것이 한낱 여인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연주의 기개에 잠시 감탄하던 태자가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자신만만하군. 어째서 그리 생각하지?”
“애오국 정벌엔 제 아버지가 꼭 필요하실 테니까요. 장장 20년간 남해의 평화를 지켜 온 공신 없이, 어느 누가 애오국 정벌의 성공을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보니 군주는 아주 똑똑한 여인이로군.”
“명분 없는 전쟁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릴 뿐입니다. 전하의 명성을 위해 애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지 마십시오.”
연주의 일침에 태자가 파안대소했다. 그는 본인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한참을 웃고 난 후 태자의 얼굴에 남은 것은 서슬 푸른 살기였다.
“군주의 말이 모두 옳다. 인정하지. 하지만 그대가 종정사에서 심문을 받는 것도 동궁에서 멀쩡히 살아 나갔을 때나 가능한 얘기이지 않은가?”
태자는 연주를 죽이는 일이 아주 작은 벌레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듯 차갑게 조소했다. 하지만 태자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마저 모두 예상했던 연주의 반응은 초연했다.
“제가 전하의 부름을 받아 입궁한 사실을 오라비가 알고 있습니다.”
“…….”
“명민한 제 오라비라면 이 사실을 황후마마께 전했을 테니, 지금쯤이면 황후마마께서도 제가 동궁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겠지요.”
“…….”
“향주를 떠나기 전, 제가 수도의 남문을 넘은 뒤 한 시진 안에 세자부로 돌아오지 않으면 동궁의 손에 죽임을 당한 줄 알라고 당부해 두었습니다.”
한참 말이 없던 태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 오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였다.
“그러니 혹시 죽음으로 제 입을 막으실 생각이시라면 지금 당장 저를 죽이셔야 할 겁니다.”
사실 연주는 오라비에게 태자의 부름을 받아 수도로 올라간다는 사실만을 전했을 뿐이지만, 어차피 태자는 이를 알 리 없었다.
“믿지 못하시겠거든 저를 데려온 시위들에게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향주를 떠나기 전, 제가 시녀를 시켜 오라비에게 소식을 전하게 한 것은 그들도 보았으니까요.”
빈틈없는 계책에 분을 이기지 못한 태자가 이를 갈았다. 연주가 제 오라비에게 정말 그런 말을 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두마차까지 내려보내 그녀를 수도로 소환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이미 동궁의 명을 받고 수도로 향하는 연주의 모습을 모두가 보았을 것이고, 입궁하여 양요전에 드는 것을 본 궁인들도 많을 터였다. 만일 연주에게 변고가 생기면 가장 먼저 곤경에 빠지는 건 저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태자는 연주 또한 이 사실을 알아 제게 겁 없이 맞서는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연주의 예상대로, 그에게는 당장 그녀를 구슬릴 방도가 없었다.
“…….”
“…….”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자는 당장이라도 연주를 찢어 죽일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러나 연주는 가을 호수처럼 평온한 낯으로 그림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순간, 연주를 동궁으로 안내했던 태감이 허둥지둥 달려들어 왔다.
“전하! 급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아직 군주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이게 무슨 무례냐!”
태자가 불같이 화를 내자 안절부절못하던 태감이 바닥에 넙죽 엎드려 소식을 전했다.
“황후마마께서 급히 군주마마를 찾으신다며, 덕교궁의 허 상궁이 찾아왔습니다.”
저 계집의 말이 진정 허풍이 아니었단 말인가?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음을 직감한 태자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고작 계집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소맷부리에 감춰진 손을 꽉 말아 쥔 태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행동을 동궁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이나 배웅쯤으로 해석한 연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면 소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
“전하?”
“…….”
끝내 연주를 동궁에 붙잡아 둘 방도를 찾지 못한 태자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붓이 예를 갖춘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양요전을 나섰다.
연주가 동궁에서 나오자마자 바깥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허 상궁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탈하셨지요?”
“덕분에 잘 지냈네.”
“황후마마께선 비설헌(飛雪軒)에서 마마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인을 따르시지요.”
연주와 짧은 인사를 나눈 허 상궁이 자미성 후원 동쪽을 향해 잰걸음을 놀렸다. 지나가던 궁인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수군거렸다.
“어라? 승설군주는 태자 전하를 알현하러 동궁에 든 것이 아니었어?”
“얘, 황후마마께서 승설군주를 얼마나 아끼시니? 오랜만에 입궁했으니 황후마마를 뵈려는 거겠지.”
“하지만…….”
태자와 황후는 그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지 않으냐고 반문하려던 궁녀가 허 상궁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입을 다물었다. 말없이 궁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연주가 작게 웃었다.
“궁 안에서 말이 많은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한데 허 상궁…….”
“예, 말씀하십시오.”
“황후마마께서는 어찌 덕교궁이 아니라 비설헌에 나와 계신 것인가?”
“군주의 입궁 소식을 듣고 동궁과 가까운 비설헌으로 직접 나오신 것입니다.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태자는 이미 한번 연주에게 몹쓸 짓을 벌인 적이 있었다. 게다가 황제를 대신해 권력을 장악한 지금, 태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었다.
연주는 허 상궁이 더 말하지 않아도 황후가 저를 크게 걱정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서둘러야겠군.”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