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연주가 날카롭게 반문했다.
“어찌 이리 사람을 재촉하는가?”
멀끔하고 당당한 태감과 달리 연주는 긴 여정에 시달리느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은보화로 치장하진 못해도, 이런 모양새로 동궁에 들어야 한다는 게 굴욕적으로 느껴졌다.
‘세자부에 들러 의관이라도 정제하고 입궁하겠다 할까?’
잠시 고민하던 연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아는 태자라면, 그간의 악연 때문이라도 어떻게든 망신을 주려 벼르고 있을 게 뻔했다. 동궁 시위들이든 눈앞의 태감이든 그녀의 뜻에 귀를 기울일 리 만무했다.
‘그래. 이제 와 무슨 체면을 차리겠어. 태자 눈에 잘 보여서 또 무엇 하고.’
구겨진 치맛자락을 무심하게 툭툭 털어 낸 연주가 허리와 어깨를 곧게 펴고 말했다.
“앞장서게.”
연주는 예의 우아한 걸음걸이로 태감의 인도를 따라 동궁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동궁 양요전(陽曜殿)은 어전인 상양궁에 견줄 만큼 으리으리했다. 하지만 응접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리 닦달을 하더니…….”
다시 한번 비어 있는 상석을 확인한 연주가 미간을 좁혔다.
‘사람을 시켜 삼천 리 밖에 있던 사람을 불러다 놓고 거드름이라도 피우겠다는 건가?’
속으로 불평하던 연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황태자 소기를 두고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도의를 논하는 것 자체가 잘못인지도 몰랐다.
연주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자신을 둘러싼 풍경을 천천히 훑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금사로 수놓은 황룡이 번쩍이는 비단 병풍이었다.
“이건…….”
기시감에 사로잡힌 연주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어전에 있는 황금 병풍을 본떠 만든 듯한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용의 비늘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아주 섬세하고 정교했다.
하지만 용의 눈동자로 큼직한 핏빛 홍옥을 박아 놓은 탓인지, 병풍 속 황룡은 신성한 동물이라기보다 사특한 욕망에 사로잡힌 괴수처럼 보였다.
꼭 이 전각의 주인인 태자처럼.
‘예부터 처소를 보면 기거하는 사람의 품격을 알 수 있다고 했건만, 옛 현인들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구나.’
병풍을 보며 혀를 차던 연주가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거대하고 화려한 병풍 때문에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동궁의 응접실은 흡사 골동품 가게에 온 것처럼 온갖 장식품이 넘쳐 났다.
상석 좌우에 놓인 장식장에는 알록달록한 보석으로 만들어진 분재와 빨간색, 분홍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등 형형색색의 도자기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내실 한쪽 벽면에 놓인 거대한 원형 장식장에는 색목인의 나라에서 들여왔을 값비싼 자명종 시계가 가득했다.
금이나 은, 칠보를 입히고 깨알 같은 보석을 촘촘히 박아 세공한 시계들은 그 모양이 단 하나도 같지 않았다.
‘황태자의 처소가 아녀자의 규방보다 조잡하구나.’
이쯤 되니 연주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동궁이 아니라 술과 여인을 파는 청루(靑樓)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지나쳐도 너무 지나쳐.”
도를 넘는 휘황찬란함에 오히려 불쾌감을 느낀 연주가 체머리를 떨었다. 그때, 응접실 너머에서 태자가 수정발을 걷고 나왔다.
“오랜만에 황궁에 와 보니 신기한 게 많은 모양이군.”
연주는 제 행동을 비꼬는 목소리를 향해 돌아섰다. 당당한 태도와 달리 시선을 얌전히 내리깐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예를 갖추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일어나라.”
태자는 어느 봄날에 그랬던 것처럼 연주를 손수 일으켜 주기 위해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태자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살짝 몸을 틀어 먼저 일어났다.
짧은 순간 태자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비쳤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지. 차를 내어줄 테니 앉아라.”
눈 깜짝할 새에 표정을 가다듬은 태자가 녹나무 탁자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연주는 가볍게 묵례한 뒤, 태자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착석하고는 태연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어떻게든 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연주를 굽어보던 태자가 실소했다. 그는 연주의 맞은편에 앉은 뒤 입을 열었다.
“한데 행색이 말이 아니군. 본 자가 군주를 위해 기껏 사두마차까지 내려보냈는데 말이야.”
“…….”
“오는 길에 고생이 심했던 건가? 아니면 평소에도 그런 모습으로 지내고 있던 건가?”
태자는 연주를 거리의 빈민 보듯 연민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태자가 진정으로 저를 대우할 요량이었다면 시위들이 하루아침에 사람을 마차에 가둬 끌고 오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옅게 코웃음 친 연주가 고개를 바로 들고 말했다.
“경대부에게나 허락되는 사두마차를 내어 주신 은혜는 감사하지만, 시위들의 말 다루는 실력이 형편없어서 고생을 좀 했사옵니다.”
“저런, 본 자가 특별히 군주를 귀하게 모시라고 신신당부했거늘.”
“아무래도 태자 전하의 권세를 등에 업은 자들이라 사리를 분별할 필요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글쎄, 향주에서는 전하의 명령을 가리켜 감히 황명이라고 지칭하지 않겠습니까?”
“그랬나?”
“예. 다른 사람들이 듣고 오해를 할까 봐 제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연주는 웃는 얼굴로 뼈 있는 말을 던졌다. 지금 그녀는 태자에게 아직 옥좌에 오르지 못한 몸으로 황명을 운운할 자격이 있느냐 되묻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자는 뭐가 그리 유쾌한지 매끄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본 자가 맡은 책임이 크다 보니 시위들도 내 명을 제왕의 것처럼 엄중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군.”
“아무리 그래도 도가 지나친 충심이지 않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언제 병상을 털고 일어나실지 모르는 것을요.”
“어찌 됐건 지금 대화국의 강산을 책임지고 있는 건 바로 이 몸이 아니겠는가. 그는 훗날에도 변치 않을 사실이고 말이야.”
연주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태자의 발언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태자의 지위는 권세가 따르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황제의 의중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게다가 황태자 소기는 황제의 뜻을 세심히 살피며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쓰던 사내가 아닌가.
‘왜 이렇게 자신만만한 거지?’
연주는 태자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사이 차를 가져온 궁녀가 두 사람 앞에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응접실을 나갔다.
태자는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먼저 찻잔을 들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훈김에선 진한 차향이 물씬 풍겼다.
“몽정차(蒙頂茶)의 향기는 언제 맡아도 참 좋아. 부황을 대신해 국정을 돌보는 요즘, 본 자의 유일한 낙이 이 몽정차를 마시는 일일 정도다.”
“…….”
“예전에 세자부에서 무이암 차를 대접받은 것에 대한 답례이니 군주도 어서 맛보도록 해라.”
몽정차는 몽산 꼭대기에서 생산되는 명차로, 대대로 황실에만 진상되던 역사 깊은 공차(貢茶)였다. 태자는 한가롭게 차를 음미하며 연주에게 어서 차를 들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연주는 과거 태자로 인해 오석산에 중독된 경험이 있었다. 그녀는 찻잔의 뚜껑을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제자리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향만 맡아도 귀한 차임을 알겠습니다. 차는 마신 것으로 하지요.”
“직접 맛볼 생각은 없는 건가?”
“이렇게 귀한 차를 입에 댔다간 쓸데없이 입맛이 까다로워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군주만 좋다면 본 자가 언제든지 보내 주지. 사양하지 않아도 좋다.”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지요. 그러니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갑자기 저를 부르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할 말은 않고 국본의 지위를 과시하기 바쁜 태자의 행동에 질린 연주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태자는 연주를 놀리듯 낮게 읊조렸다.
“급한 성미는 여전하군.”
연주는 의도적으로 종유궁에서의 일을 상기시키려는 태자의 언행에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즉각적인 반응에 피식 웃은 태자가 말을 이었다.
“본 자는 조만간 애오국(隘墺國) 정벌에 나설 생각이다. 하니 군주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애오국 정벌에 제가 무슨 도움을…….”
“그대의 부친이 이 전쟁을 극구 반대하고 있거든. 하여 군주가 평해왕을 설득해 줬으면 한다.”
애오국은 대륙 남단의 섬나라로, 과거 연안의 민가를 약탈하고 백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하여 대화국과는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평해왕이 남해를 평정한 뒤, 애오국은 해상 교역을 통해 대화국과 친선을 다져 나가고 있었다. 그런 애오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겠다니.
이 상황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연주가 차분하게 응수했다.
“외람되오나 전하께서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근래 애오국 출신의 해적들이 잊을 만하면 남쪽 백성을 유린한다고 들었다. 하여 아예 애오국을 정복해 다시는 고통받는 백성이 없게 만들 생각이다.”
“애오국 출신의 해적이 문제라면 먼저 애오국에 사절을 보내 정식으로 항의하는 것이 순서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한통속일 텐데 뭐 하러 그런 수고를 자처하지? 또 저들 모르게 전쟁을 일으켜야 승산이 높아지지 않겠는가?”
연주는 전쟁을 아이들 놀이 정도로 생각하는 태자의 관점에 할 말을 잃었다.
오랜 세월 감정이 좋지 않았던 양국이지만 전쟁은 엄청난 물자와 인명이 오가는 중대사였다. 최소한의 명분과 준비 없이 함부로 진행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어찌 이리 가볍게 결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게다가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천자의 권한…….”
“그대도 평해왕이나 왕세자와 똑같은 소릴 하는군. 하지만 군주만은 그 생각을 바꾸는 게 좋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군주가 평해왕을 설득하지 않는다면, 본 자는 기우제를 앞두고 형님이 그대와 함께 재궁에서 밤을 보냈노라고 만천하에 밝힐 생각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