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그 순간 날래게 공중제비를 돌아 장정의 머리 위를 뛰어넘은 가화가 연주를 지키듯 앞을 막아섰다. 그녀는 몸을 낮춰 공격 태세를 갖추고는 소매 속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군주, 지금 황명에 불복하는 것인가?”
사령은 가화의 존재가 대단치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댔다.
어차피 여자 셋이서 훈련을 받은 장정 여럿을 쓰러뜨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분노를 삭이느라 이를 악물고 있던 연주가 가화에게 말했다.
“칼을 거두어라.”
“하지만……!”
주인의 명령에도 쉬이 칼을 물리지 못하던 가화는 연주가 단호히 고개를 저어 보이자 마지못해 칼을 거뒀다.
“그렇다면 소인이 아가씨와 함께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잠시,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연주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가화를 달랬다.
“내가 죄인으로 동궁에 불려 가는 것이 아니지 않으냐?”
“아가씨……!”
저들이 죄인이라 부르지 않았으니 그걸로 괜찮다는 말씀이신가?
명을 전하러 온 사람들의 태도가 이미 죄인을 압송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가화는 태연하기만 한 연주의 모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연주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가화의 손을 그러쥔 채 또박또박 말했다.
“나와 동행할 사람은 금란 하나로 충분해. 그러니 너는 수도에 있는 내 오라비에게 연락을 넣어 다오. 내가 태자 전하의 명을 받아 오랜만에 수도로 올라가게 되었으니, 곧 밝은 얼굴로 만나자고.”
혼란스러워하던 가화는 나름의 계책이 있는 듯한 연주의 모습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가 더 잇지 않은 말끝에는 자신이 곁에 붙어 있는 것보다, 주변에 이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 두는 편이 그녀를 지키는 데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 속뜻을 알아챈 가화가 결연히 고개를 숙였다. 연주는 그런 가화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금란과 함께 당당히 저택을 나섰다.
* * *
그 시각, 기우제를 성공적으로 마친 정엽은 가마를 타고 황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탄 가마를 발견한 백성들은 하나같이 알아서 길을 열고 젖은 흙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비를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 전하 덕분입니다!”
빗속에서도 경의를 표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장명이 가마 쪽으로 다가와 정엽에게 말을 건넸다.
“이로써 만천하에 전하께서 용손이시라는 사실이 다시금 증명되었군요. 전하, 기쁘시지요?”
“비가 내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저 운이 좋았던 거겠지.”
사방이 트인 가마 안에서 비가 쏟아지는 풍경을 지켜보던 정엽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장명은 처음부터 주군의 반응 따위는 중요치 않았던 듯,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연신 싱글벙글하였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그냥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전하께서 진정 하늘의 선택을 받은 용손이셨기에 비가 내린 겁니다.”
“그 용손이란 말 좀 그만할 수 없느냐?”
“에이, 너무 부끄러워 마십시오. 사람들은 모두 전하를 용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 비와 구름을 부리는 자가 흔합니까?”
“좀 조용히…….”
“그러니 전하,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대체 어떻게 비를 부르신 겁니까? 마음속으로 ‘비야, 내려라!’ 하면 비가 오는 겁니까?”
이래서야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겠군.
들뜬 장명은 꼭 열 살짜리 어린애처럼 굴었다. 헛웃음을 터뜨린 정엽이 여전히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정엽이 기우제를 지내며 떠올린 건 단 하나, 바로 연주가 비를 맞으며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따지자면 그녀를 웃음 짓게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비를 부른 셈이었다.
“비밀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떠들었다가는 들뜬 부하가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곁들여 말을 옮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해야 할 일을 잘 마쳤으니 바로 연주를 보러 갈 수 있겠군.’
잠시 후 산 아래 재궁에 다다른 정엽이 빠른 걸음으로 재실로 향하며 명령했다.
“환복 시중은 필요 없으니 내 말 현표를 재궁 앞에 대기시켜라.”
“전하, 아직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셨습니다. 말보다는 마차를 타고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천천히 가면 될 일 아니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서 시킨 일이나 똑바로 해라.”
정엽은 장명의 걱정을 숫제 잔소리 취급 했다. 그는 재실로 들어서자마자 스스로 9류 면류관과 구장복을 벗어 던졌다. 내내 정수리를 짓누르던 책임감과 어깨 위에 겹겹이 쌓인 부담감에서 해방되니 한결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가는 길에 연주에게 무얼 사다 주면 좋을까. 용수당 한 봉지면 충분할까? 아니, 그건 너무 약소한 것 같은데…….’
정엽은 옷을 갈아입으며 연주에게 줄 보답을 고민했다. 하지만 생각나는 것마다 작고 보잘것없어서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가는 길에 눈에 띄는 것으로 하자. 용수당은 당연히 빠지면 안 되고, 뭐든 예쁘고 향기로운 것이라면 좋아하겠지.”
한시라도 빨리 연주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섣부르게 선물을 결정한 정엽이 비를 막아 줄 외투를 걸치고 재실 문을 열어젖혔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용무군 군사 하나가 뛰어들어 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냐.”
“지금 재궁 밖에서 군주마마의 시녀가 전하를 뵙게 해 달라고 사정하고 있습니다.”
“군주의 시녀가……?”
의아한 표정을 짓던 정엽의 입꼬리에 슬그머니 미소가 걸렸다.
‘연주가 비가 내린 것을 보고 축하 인사라도 전하려고 사람을 보낸 건가? 아니면 집으로 초대라도 하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부르지 않아도 어련히 보러 갈 텐데…….’
혼자서 온갖 추측을 하던 정엽은 이내 들뜬 걸음으로 뜨락에 내려섰다. 그런데 궁문 앞에는 낯선 얼굴의 시녀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단박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정엽의 표정이 굳었다.
“네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느냐?”
“전하! 군주마마를 구해 주시옵소서!”
“구해 달라?”
시녀는 제 주인에게 닥친 위기를 대변하듯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대신 대뜸 무릎부터 꿇었다. 절박한 시녀의 행동에 정엽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야 네 주인을 구하든 말든 할 것이 아니냐!”
“황태자가 황명이라며 사람을 보내 군주마마를 수도로 끌고 갔습니다!”
“황태자가?”
정엽은 ‘황태자’라는 단어에 극렬히 반응했다. 그는 눈앞에 있는 가화가 황태자라도 되는 것처럼 살기등등한 눈빛을 뿜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는구나!’
향주에서 연주와 함께하는 내내, 태자가 연주를 이용해 저를 압박할 가능성을 염려해 온 그였다. 태자의 뜻에 굴복하는 것보다, 연주가 다칠까 봐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다.
초조해진 정엽은 때마침 재궁 앞에 도착한 애마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아직 이런 사정을 모르는 장명은 예사롭지 않은 정엽의 기세에 당황해 우선 말고삐부터 붙들고 늘어졌다.
“말은 살살 타고 가시기로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왜 이러세요, 대체!”
“당장 수도로 가야 하니 비켜라!”
지금? 갑자기?
정엽의 말을 듣고 기겁한 장명이 그를 설득하기 위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전하, 향주에서 수도까지 거리가 삼천 리입니다! 아무리 빨리 가도 한 달 반이 걸리는 거린데 성치도 않은 몸으로 어찌 말을 타고 가시려 하십니까? 저희가 마차로 모실 테니 제발 내려오십시오!”
“비켜!”
정엽은 통사정하는 부하를 뿌리치고 힘차게 말의 배를 걷어찼다. 고삐를 바투 움켜쥔 그는 번개처럼 재궁을 빠져나갔다.
“전하!”
등 뒤에서 장명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빠르게 질주하는 정엽을 붙잡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연주야, 채연주……!’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연주의 모습만이 가득했다. 그녀가 종유궁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일부터, 오석산에 중독돼 사경을 헤매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의 귓가에는 아이를 찾아야 한다며 만신창이가 되어 울부짖던 연주의 원망이 맴돌았다.
이번에야말로 영영 연주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정엽을 잠식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최대한 빨리 수도에 도착하는 것뿐이었다.
* * *
연주는 네 마리 말이 끄는 사두마차에 갇혀 동궁의 시위들과 함께 수도로 향했다. 시위들은 긴급한 소식을 전할 때처럼 역참마다 말을 바꿔 타며 쉴 새 없이 수도로 내달렸다.
마부는 사람이 아닌 짐짝을 옮기듯 거칠게 말을 몰았다. 연주는 심하게 흔들리는 마차 때문에 종일 지독한 멀미에 시달렸다. 잠시 휴식을 취할 때조차 바다를 표류하는 조각배에 몸을 실은 듯 속이 울렁거렸다.
“아휴, 이를 어째……. 아가씨, 오늘은 기필코 민가를 찾으라고 할게요. 조금만 참으세요. 네?”
“됐다. 시간을 아낀답시고 말 위에서 자는 사람들이지 않으냐.”
“그래도 이틀에 한 번이라도 편히 주무시면 좀 나을 거예요. 제가 저놈들 손이라도 물어뜯으면 말이 통하겠지요!”
그러나 금란의 기지로 늦은 밤 허름한 민가나 여관에서 눈을 붙여도 상태는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이 빙빙 돌아서 연주는 한시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창살로 가로막힌 창문 너머로 먼 산과 하늘가를 바라보는 것뿐. 연주는 그렇게 꼬박 한 달을 시달린 뒤에야 수도에 닿았다.
“소인이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드디어 마차의 문이 열렸다. 희게 질린 연주가 비척비척 지상으로 내려섰다. 머리를 드니 거대한 위용을 뽐내는 황궁의 북문이 보였다.
‘결국 또 이곳으로 돌아왔구나.’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풍경을 마주한 연주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 있으려니, 이무기 자수가 선명한 녹색 예복을 입은 태감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태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속히 동궁으로 드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