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재궁을 나온 연주는 곧장 금란이 기다리고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근 두 달 만이었다.
“아가씨! 정말 다시는 뵙지 못하는 줄 알았어요!”
“못 보다니.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왔지 않으냐.”
“멀쩡하시긴요. 얼굴이 반쪽이 되셨는데.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간식을 좀 만들어 올게요!”
주인이 돌아오자마자 눈물을 한 바가지 쏟은 금란이 부산을 떨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정엽을 간호하는 동안 마음 편히 잠들어 본 적 없는 연주는 간식보다 단잠이 고팠다.
“난 좀 쉬어야겠구나.”
“예. 금란에게도 그렇게 말해 두겠습니다.”
“그래.”
저와 마찬가지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가화의 어깨를 두드려 준 연주가 방으로 돌아와 침상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녀는 베갯잇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몸이 고단하니 도리어 잠이 오질 않는구나…….”
한참을 뒤척이다가 간신히 선잠이 들었던 연주는 정신없이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몸은 집으로 돌아왔어도 마음이 온통 정엽에게 가 있으니, 피로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쌓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연주는 꼬박 하루를 이불 속에서 보냈다.
“……지금이 몇 시지?”
뒤숭숭한 꿈에 시달리던 연주가 화들짝 눈을 떴다. 침실 구석에 놓여 있는 물시계는 사시(巳時)의 끝 무렵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우제가 예정된 시각은 사시 다음인 오시의 첫 무렵. 그런데 이쯤이면 화창하다 못해 열기로 타올라야 할 바깥이 어둑어둑했다.
“시계가 고장이 난 걸까? 아니면 정엽이 벌써 기우제를 시작해서……?”
혹시 정엽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서둘러 침상에서 내려온 연주가 정원을 내다볼 수 있도록 크게 트인 사창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에는 커다란 뭉게구름이 가득하지만, 당장 비가 내릴 것처럼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이 정도로는 안 될 텐데. 구름이 더 많이 모여야 비가 내리지…….’
창가에 걸터앉은 연주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한창 기우제가 진행 중일 황산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
“아가씨?”
가화가 부르는 줄도 모르고 산허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연주가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가화로구나.”
“예. 차를 좀 끓여 왔습니다. 한데…….”
“혹시 내가 잠든 사이에 재궁에서 소식이 왔느냐?”
“아니요.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연친왕 전하 걱정뿐이시구나. 실망한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연주를 지켜보던 가화가 그녀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전하께서는 잘 해내실 겁니다.”
“……그렇겠지.”
적당한 온기를 내뿜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연주가 한숨과 함께 읊조렸다. 가화는 연주를 위로하듯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러니 더는 염려 마시고 남은 일은 하늘에 맡기십시오.”
연주는 묘한 울림이 느껴지는 가화의 말을 곱씹어 보다 멋쩍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네게 연친왕 전하께 온 편지를 치워 달라고 부탁했었지. 민망한 일이로구나.”
제 근심이 전염이라도 된 것인지, 그늘진 얼굴로 서 있는 가화를 알아차린 연주가 시선을 피했다.
편지조차 보기 싫어 치워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지금은 다시 해바라기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다니. 연주는 이런 제 모습이 가화에게는 얼마나 이상하고 우습게 보일까 싶었다.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다.”
“습관이 아니라 마음이겠지요. 꽃과 나무가 태양을 따라서 가지를 뻗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 또한 누군가를 향해 자라지 않습니까.”
“태양이라……. 그렇구나.”
그러고 보면 정엽(晶曄)의 이름자에는 모두 태양(日)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황태자가 된 헌왕이 정엽을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것도, 내가 정엽을 끝내 외면하지 못하고 애면글면하는 것도.
‘늘 태양처럼 빛나는 사람이긴 하지. 그 사람이…….’
실없는 생각에 헛웃음을 터뜨린 연주가 어느새 식어 버린 찻잔을 내려놓았다. 미동 없이 곁을 지키던 가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께서 치워 두라고 시키셨던 서신을 모두 가져다 드릴까요?”
“그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연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의 안일함으로 정엽이 큰 위험에 처한 게 고작 며칠 전이었다. 연주는 이제 정엽뿐만 아니라 저 자신에게도 일말의 희망이나 여지를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주 나중에,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돌려 다오.”
“예, 알겠습니다.”
감춰 둔 편지가 어디 가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한순간에 어디로 도망가진 않는다. 연주의 말을 그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가화가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우르릉,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게 무슨 소리지?”
천둥소리에 놀란 연주가 서둘러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먼 하늘가에서부터 시커먼 먹구름이 밀려와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세상에…….”
오래지 않아 한낮의 천지가 밤처럼 어두컴컴하게 변했다. 그 광경을 멍하게 지켜보고 있노라니, 처마 끝에 매달린 청동 풍경이 빙글빙글 돌며 울음을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서늘한 바람이 연주의 뺨을 휩쓸고 지나가고, 메마른 흙바닥이 점점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비인가……?’
연주는 마치 태어나 처음 비를 보는 아이처럼 창문 너머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다가, 이내 줄기차게 쏟아지며 손끝을 기분 좋게 때렸다.
장대비처럼 따갑지도, 부슬비처럼 가늘지도 않은 빗줄기는 오랜 가뭄으로 지친 모두를 위로하듯 길게 이어졌다.
“와아아!”
“비다! 비! 비가 온다!”
언덕 위 작은 마을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사람들이 일제히 사립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와 환호했다.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그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는 좁은 골목길에서 점차 넓은 길목으로 퍼져 향주 전체를 뒤덮어 나갔다.
“연친왕 전하 만세!”
“용손 전하 만세!”
연주는 저택 담장을 타고 넘어오는 백성들의 감격한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울컥했다. 정엽이 기우제를 무사히 해냈다는 안도감과 그간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뭉클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가슴 위에 두 손을 모은 연주가 눈을 감고 이름 모를 세상의 모든 신을 향해 고마움을 전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도는 아주 잠시에 그쳤다.
쾅, 쾅, 쾅-!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청객이 거칠게 대문을 두드렸다.
연이어 들려오는 적개심 가득한 소음에 연주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예기치 않은 소란에 겁을 먹은 금란이 울먹이며 침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 밖에 누가 찾아왔는데 어쩌지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금란을 침착하게 다독인 연주가 되물었다.
“누구인지 확인은 했느냐?”
“예. 닫힌 문 너머로 누구냐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높으신 분의 명을 가져왔다며 문을 열라고 윽박지르기만 하지 정체를 밝히지 않아요.”
“그래?”
“소인이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태감은 아니고 건장한 장정들이었습니다.”
지금 이 집에 머무는 사람은 장정들의 힘을 당해 내기 어려운 여인들뿐. 섣불리 문을 열어 주었다가는 무슨 변고가 생길지 모르니 금란으로서는 함부로 문을 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면 아가씨, 제가 나가 볼까요?”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가화가 명령을 기다리듯 연주를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연주가 금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들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보았느냐?”
“문틈으로 본 것이라 확실하진 않지만, 청룡이 새겨진 도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청룡 무늬가 새겨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면 태자가 보낸 것이겠구나.”
청룡은 대대로 제국의 후계자가 기거하는 동쪽을 상징하는 신수였다.
‘정엽이 기우제에 성공하자마자 태자의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다니…….’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피할 수 없는 일인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내가 직접 나가 보마.”
연주가 시녀들을 이끌고 대문 앞 회랑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그녀가 눈짓을 보내자, 가화가 대문의 빗장을 풀고 손님을 맞았다.
끼이익-.
저택의 문이 열리기 무섭게, 금란의 말처럼 가슴팍에 청룡이 번쩍거리는 비색 도포를 걸친 장정들이 우르르 밀고 들어왔다. 청룡이 수놓아진 비색 관복은 황태자를 따르는 동궁의 시위들을 상징했다.
“승설군주는 황명을 받들라!”
그런데 황태자의 명이 아닌 황명이라?
아직 제위에 오르지 못한 황태자의 뜻이 황제의 명령으로 둔갑한 것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던 연주가 실소했다. 그녀가 합당한 예를 갖추지 않자, 전령의 우두머리 격인 젊은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승설군주는 명을 받들라!”
“언제부터 동궁의 시위들이 황제 폐하의 명을 전하기 시작했는가?”
“지금 이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고 계시는 건 폐하가 아니라 태자 전하시오. 그러니 태자 전하의 뜻이 곧 황명이 아니겠소?”
지금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아직 멀쩡히 황제가 살아 숨 쉬고 있는데 황태자의 명이 황명과 같다니?
연주가 재차 따지려 하자 사내가 다시 한번 그녀를 다그쳤다.
“황태자의 명이든 황제의 명이든 군주가 거스를 수 있는 명이 아니니 당장 예를 갖추라!”
“알았네. 그리 원한다면 내 받들어 주지.”
저들의 논리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나라 황태자의 명을 일개 왕부의 군주가 거부할 수 없는 건 사실이었다. 사내를 향해 사나운 눈빛을 보내던 연주가 마지못해 무릎을 꿇었다.
사령은 그제야 가져온 두루마리를 펼치고 내용을 낭독했다.
“승설군주는 당장 동궁으로 들라!”
짧은 문장을 단숨에 읽어 내린 사령은 함께 온 사내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군주를 모셔라!”
“예!”
“아, 아가씨!”
동궁 시위들이 순식간에 연주의 주변을 에워쌌다. 뒤에서 놀란 금란의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착하게 몸을 일으킨 연주가 사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께서 내리신 명이 이게 전부요? 나를 찾으시는 연유를 알고 싶소.”
“전하께서 부르시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군주는 순순히 따르면 될 뿐이오. 얘들아! 가자!”
연주를 향해 불손하게 대꾸한 사령이 다른 시위들을 재촉했다. 명을 받은 그들은 점점 거리를 좁혀 오더니, 당장이라도 연주를 포승줄로 묶어 끌고 갈 것처럼 위협적인 눈빛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