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정엽은 대답을 재촉하는 것처럼 몽롱한 눈으로 연주를 올려다보았다.
“정엽…….”
혼란스러워하던 연주는 며칠 새 많은 일이 있었음을 상기했다. 정엽은 의식을 잃고 누워만 있었으니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습격 이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내 걱정이나 하고 있다니.’
그간 마음 졸여 온 날들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연주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정엽은 잠깐 깨어 있는 것조차 힘에 부친 듯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면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체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예요. 당신이야말로 엉망진창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 연주가 떨리는 음성으로 정엽을 타박했다. 정엽은 잔소리보다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이 더 신경 쓰이는 듯, 힘겹게 손을 뻗어 그녀의 오른뺨을 감싸 쥐었다.
“……왜 울어.”
정엽이 연주의 붉어진 눈가를 엄지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연주는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처럼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동안 차갑게 식어 있던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사무치게 반가웠다.
‘아픈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주책없이 눈물이 난담.’
연주는 요동치는 가슴을 어렵사리 진정시켰다. 그러곤 비몽사몽간에도 저를 달래려 애쓰는 정엽에게 화답하듯 그의 큼직한 손바닥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제 뺨을 맡겼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괜찮으니까 염려 말고 한숨 푹 자요.”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정하게 속삭인 연주가 예쁘게 웃었다. 정엽은 그녀의 미소와 괜찮다는 말 한마디에 마음을 놓은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정신이 들긴 했어도 아직 회복은 멀었는지, 정엽은 순식간에 다시 잠들었다. 연주는 오랫동안 참아 왔던 울음을 숨죽여 터뜨렸다.
* * *
다음 날 새벽, 눈이 퉁퉁 부은 연주가 여명이 드리우기 전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재궁 앞을 지키고 있던 장명이 그녀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옵니까?”
“아닐세. 전하께서 좀 전에 깨어나셨네.”
“정말이십니까?”
장명은 뛸 듯이 기뻐하며 당장 안으로 뛰어들어 가려고 했다. 연주는 그의 팔을 잡아 세우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잠드셨으니 지금은 깨우지 않는 것이 좋겠네.”
“아, 예. 알겠습니다. 하면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아니. 전하께서 깨어나셨으니 나는 이만 재궁을 떠나겠네.”
“예? 어찌하여…….”
“이젠 내가 할 일이 없지 않은가. 또 내가 계속 이곳에 있어 봐야 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만 늘게 될 걸세.”
병중에도 저를 염려하는 정엽의 모습을 상기한 연주가 조곤조곤 제 의사를 피력했다. 난감한 듯 눈을 굴리던 장명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전하께서 내일 무사히 기우제를 지내러 가시는 모습까지 확인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재궁은 본래 여인이 머물 수 없는 곳이지 않은가. 이곳에 더 있다가는 무슨 난처한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네. 그러니 떠날 수 있을 때 조용히 떠나야지.”
장명은 어떻게든 연주가 남도록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말에 틀린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 정엽에게 동의를 구하듯 그가 누워 있는 쪽을 응시하던 장명이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그럼 소신이 직접 저택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자네는 전하의 곁을 지켜야지. 나는 가화와 함께 돌아갈 테니 그 아이를 불러주게.”
“아무리 그래도 소신이…….”
“전하께서 깨어나시긴 했지만 아직 거동이 불편하신 상황일세. 기우제가 끝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고 의원과 함께 전하를 잘 보필해 주게.”
“……예, 알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보인 장명이 가화를 부르기 위해 사라졌다.
연주는 재궁의 뜨락을 서성이며 아직도 뜨거운 눈가를 식혔다. 다행히 재궁의 새벽 공기는 겨울처럼 차갑고 스산해서 이승의 것 같지 않았다.
* * *
연주는 재궁에 들 때처럼 동이 트기 전 그곳을 떠났다. 이 사실을 모른 채 까무룩 잠들었던 정엽은 해가 중천에 걸리고서야 겨우 눈을 떴다.
“……연주야. 채연주?”
머리맡이 허전한 것을 깨달은 정엽이 천천히 낯선 공간을 살폈다.
“여기가 어디지……?”
몸을 뒤척이는 것조차 힘에 부쳐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정엽은 욱신거리는 상처를 끌어안고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분명 여기 연주가 있었는데. 꿈을 꾼 건가?’
안가에서 피습을 당한 뒤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엽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한편, 방 안에서 나는 인기척을 듣고 부리나케 의원을 불러온 장명이 반색했다.
“전하!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그러나 부하 곁에 있는 낯선 얼굴을 발견한 정엽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저자는 누구냐?”
“아, 송구합니다, 전하. 말씀 올리는 것이 늦었사옵니다. 이자는 군주마마께서 풍 대인을 통해 수배한 의원입니다.”
“……연주가?”
정엽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의원의 행색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잠자코 그의 경계심을 받아 내던 의원이 순순히 입을 열었다.
“소인은 이가 정군이라고 하옵니다. 군주마마의 명으로 재궁에 군사로 위장하고 들어와 전하를 보살피고 있었사옵니다.”
“재궁이라고……?”
그제야 자신이 눈을 뜬 방의 정체를 알게 된 정엽이 혼란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는 미처 몰랐으나, 깨어나자마자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는 정엽 덕에 간담이 서늘해진 의원이 머뭇대며 말했다.
“일단 맥부터 짚겠습니다.”
“그래.”
모든 게 미심쩍다는 듯 장명과 이 의원을 번갈아 바라보던 정엽이 마지못해 손목을 내어 주었다. 긴장한 얼굴로 신중하게 맥을 짚어 보던 의원이 입을 열었다.
“군주께서 구하신 회명단이 효험이 있었던 모양이옵니다. 맥이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깊은 만큼 절대로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오랫동안 보양에도 신경 쓰셔야 하고요.”
“……군주가, 무엇을 구해?”
정엽이 통 알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의원을 향해 서늘하게 되물었다. 연주가 무슨 약을 구해 왔는지는 몰라도, 그녀를 고생시켰을 거란 사실만은 불 보듯 뻔했다.
주군에게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이해시킬 필요성을 느낀 장명이 말했다.
“전하, 소신이 차근차근 모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의원, 자네는 나가 보게.”
“예.”
이 의원을 내보내고 문을 닫은 장명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성질 급한 정엽은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다그치듯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오늘로 7일째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내일이 기우제입니다, 전하.”
“내일?”
재궁에 온 줄도 몰랐지만, 시간이 이토록 오래 지난 것 역시 예상 밖이었다. 정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자, 장명이 안도한 표정으로 화답했다.
“그래도 기우제 전에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하면 군주가 나를 재궁으로 옮기라 명령한 것이냐?”
“예. 만약 전하께서 기우제 당일까지 깨어나지 못하시면 재궁에서 피습을 당하신 것처럼 일을 꾸미려 했었지요.”
“재궁에서 피습이라.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엽은 상상을 뛰어넘는 연주의 기지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럼 회명단은 또 무엇이냐?”
“군주마마를 모시는 가화라는 시녀가 가져온 것입니다. 듣기로 이국에서 건너온 약인데, 평해왕께서 마마께 선물하셨다더군요. 군주마마께서 직접 전하께 약을 먹여 주셨는데, 기억나십니까?”
좀 전까지만 해도 연주가 제 곁에 있던 것이 꿈이라고 여기던 정엽이었다. 놀란 정엽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럼 지금 재궁에 연주가 있다는 뜻이냐?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지?”
“오늘 새벽까지 전하의 곁을 지키시다 전하께서 깨어나신 것을 확인하고 시녀와 함께 떠나셨습니다.”
“시녀와 둘이? 제정신이냐!”
재궁은 여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발각돼 사로잡히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흥분한 정엽이 금방이라도 침상을 박차고 일어날 것처럼 이불을 걷었다.
장명이 그런 정엽을 뜯어말리며 하소연했다.
“군주마마를 모시는 시녀의 무예 실력이 아주 출중했습니다! 또 재궁에 들어올 때처럼 용무군 군사로 위장하고 나가셨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용무군 군사?”
“예. 게다가 어둠을 틈타 떠나셨으니 누군가의 눈에 띄지도 않았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더는 심려치 마십시오!”
정엽은 그제야 간밤에 본 연주의 모습이 평소와 같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 냈다. 이제 보니 그게 다 남장을 하고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저간의 상황을 모두 이해한 정엽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치하하는 주군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장명이 말을 이었다.
“군주마마께서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전하를 간호하는 내내 제대로 주무시지도, 드시지도 못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던지요.”
“…….”
“군주마마께서 당신의 명을 전하께 나눠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내 침착하시다가 전하께서 깨어나신 것을 보고 얼마나 우시던지……!”
장명은 감동적인 전래 동화를 풀어 내듯 한바탕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댔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 부하를 삐뚜름하게 노려보던 정엽이 실소를 터뜨렸다.
“알았으니 그만해라. 아직 기우제가 남아 있지 않으냐.”
연주가 저를 위해 애써 준 이야기를 듣다 보면 별수 없이 낯이 간지러웠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져 입가에 절로 푸근한 미소가 감돌았다.
주군의 즐거운 기색을 눈치챈 장명이 너스레를 떨 듯 화답했다.
“예. 기우제가 끝난 뒤에도 긴장을 놓으셔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 기우제를 무사히 지낸 것을 알면 태자가 아주 분해할 테니까요.”
“그렇겠지.”
정엽은 오래 연주를 걱정시킨 만큼 반드시 기우제를 성공시켜 그녀를 기쁘게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환히 웃는 연주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어린애처럼 들뜨는 마음을 다잡았다.
장명의 말대로, 아직 위협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