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19화 (119/161)

119화.

망설이던 의원이 입을 열었다.

“바다 건너에서 들어온 이국의 약 중에 회명단(回命丹)이라는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약만 있으면 전하의 병세에 차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회명단?”

“예. 보혈 작용이 탁월해서 기력이 쇠해 죽어 가던 사람도 회명단 한 알이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지요.”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하는가!”

처음부터 그 약을 찾았으면 지금쯤 정엽이 눈을 떴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의원을 향해 따지듯 소리친 연주가 바로 진정하듯 한숨을 쉬며 심기를 가라앉혔다.

“……미안하네. 요새 내 마음이 심란하여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게.”

“누군들 그렇지 않겠사옵니까. 하오나 회명단은 이국의 약이라 만드는 방법이 불분명합니다. 알려진 거라곤 회명단이라는 약의 이름뿐이지요.”

“……그런가?”

“예. 하여 설령 이 나라에 회명단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해도 찾는 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의 명운이 촌각을 다투는 마당에, 그 약을 찾느라 동분서주할 여유도 없고요.”

구구절절 옳은 의원의 말에 연주가 입을 다물었다. 한 줄기 희망에 전부를 거는 것도 방법이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역시 나쁘지 않은 처사였다.

무엇보다 정엽의 부상 소식을 온 나라에 퍼뜨릴 게 아닌 이상, 그 귀하다는 회명단을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연주의 실망한 표정을 확인한 의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하께서 지금 이렇게 살아 계신 것만 해도 천운입니다. 보통 이 정도 깊이의 자상이면 장기가 상하지 않았더라도 손을 쓸 새도 없이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보게.”

“오해하지 마십시오. 절대 치료를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마마께서 곧장 지혈이라도 해 주셨기에 전하께서 이만하신 거란 뜻이옵니다.”

“…….”

“마마께서 애쓰시는 것처럼 전하께서도 다시 일어나고자 애쓰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다잡으시옵소서.”

의원은 지금 연주가 얼마나 두렵고 힘겨운 상황에 놓여 있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차도가 없는 환자의 병세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옆에서 병을 돌보는 사람의 마음이 꺾이는 일이었다.

“마마께서 기운을 내셔야 합니다.”

연주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의원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깊게 심호흡한 뒤 화답했다.

“……고맙네. 참, 약재 찌꺼기는 바로바로 태워 없애고 있는 것이 맞겠지?”

“예. 더해서 당부하신 대로 약을 달일 때도 향로를 여러 개 피우고 있습니다. 아마 재궁 밖에서는 향을 진하게 태우는 줄만 알지, 약을 달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알았네. 계속 애써 주게.”

“예.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의원이 자리를 떠나자 연주가 다시 정엽의 머리맡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곤 제가 아플 때 정엽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반듯한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따뜻한 약을 마신 직후라 전보다 혈색이 돌아오긴 했어도, 여전히 창백한 빛을 띠는 정엽의 안색에 마음이 무거웠다.

“회명단. 회명단이라…….”

연주는 그 약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당장 하늘에서 뚝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실없는 생각이 맴도는 와중에도 회명단이 이국에서 온 명약이라던 의원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참, 그게 있었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연주의 뇌리에 잊고 지내던 기억 한 조각이 스쳤다. 그녀에겐 하나뿐인 딸이 홀로서기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친 평해왕이 국내외 명약을 모아 보내 준 약상자가 있던 것이다.

“혹시 아버지가 주신 약 중에 회명단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당시 연주는 아버지의 서신과 온갖 약병이 가득 찬 상자만 확인하고, 거기 담긴 것들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상연향을 개발하는 데 온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라도 장 부관을 보내 약상자를 가져올까?”

그간 연주는 외부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재궁에 있는 모두의 움직임을 최소화해 왔다. 하지만 가능성을 발견한 이상 이렇듯 가만히 앉아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지금이라면…….”

비단 휘장을 걷어 까맣게 어둠이 내린 창밖을 확인한 연주가 고심했다.

“회명단이 약상자에 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밑져야 본전이잖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창가를 서성이던 연주가 입술을 사리물고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순간, 밖에서 무슨 소란이 일었는지 장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오게.”

금세 문이 열리고, 주변을 살핀 장명이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췄다.

“재궁에 몰래 침입한 자가 있어 사로잡았습니다. 한데, 얘길 들어 보니 마마의 시녀라 하더군요.”

“내 시녀……?”

“예. 만약을 위해 마마께서 직접 확인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연주가 거느리는 시녀라곤 가화와 금란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들 중 감히 재궁에 침입해 용무군 군사를 상대할 만큼 무예 실력이 출중한 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연주가 일단 장명을 따라 곁방으로 건너갔다. 그곳에는 뜻밖에도 가화가 용무군 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가화, 네가 어째서 네가 이곳에 있느냐?”

“아가씨!”

연주의 목소리를 들은 가화가 번쩍 고개를 들고 격렬하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풀어 줘라.”

연주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사로잡은 여인이 그녀의 시녀임을 확신한 장명이 말했다. 가화의 양팔을 결박하고 있던 군사가 상관의 명령에 순순히 물러났다.

“어서 일어나거라.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여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들어온 게야?”

“풍 대인께 들었습니다. 연친왕 전하께서 크게 다치셨다지요. 아가씨께서도 위험에 처하셨을지 모르는데 소인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연주는 오라비가 왜 가화를 제게 내주었는지 이제야 제대로 이해하곤 한숨을 쉬었다. 가화의 고향이 향주인 것도 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무공을 갖춘 가화를 곁에 두게 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오라비의 당부가 있었다고 한들 여인 혼자서 재궁으로 숨어들 생각을 하다니. 연주는 저를 위해 거침없이 위험을 무릅쓴 가화의 마음이 고마워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아니다. 무사하다니 됐다. 오늘의 일을 내 절대로 잊지 않으마.”

“……아가씨.”

연주는 울먹이는 가화를 다독였다. 그런데 가회의 등을 쓸어 주는 손길에 정체 모를 딱딱한 물체가 걸렸다. 몸을 떼고 자세히 보니 가화는 몸에 검은 천으로 물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등에 메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아, 혹시 몰라 저택에서 챙겨 온 것입니다. 마마께서 지금쯤 이것을 찾고 계시지 않을까 해서요.”

가화가 가슴께에 단단히 묶은 매듭을 풀고선 가져온 것을 연주에게 건넸다. 바로 좀 전까지 연주가 장명에게 시켜 가져오려던 약상자였다.

“이건……!”

놀란 눈으로 가화와 약상자를 번갈아 보던 연주가 서둘러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내용물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연주의 행동에 장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군주마마, 왜 그러십니까?”

“…….”

“마마, 그 상자가 대체 무엇이기에…….”

연주는 장명의 물음에도 대꾸 없이 위아래로 열다섯 개씩, 서른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약병에 붙은 이름을 일일이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약상자 가장 구석에서 익숙한 이름의 약병이 눈에 띄었다.

‘여기 있다. 회명단!’

금세 표정이 밝아진 연주가 장명을 향해 소리쳤다.

“전하를 구할 방법을 찾은 것 같네. 어서 의원을 부르게!”

* * *

정엽이 있는 내실로 자리를 옮긴 연주는 부름을 받고 헐레벌떡 달려온 의원에게 약병을 내밀었다.

“이 약이 회명단이 맞는지 확인해 주게.”

“지금 회명단이라고 하셨습니까?”

고작 한 시진 사이에 이 약을 어디서 구했을까. 반신반의하던 의원이 병 안에 든 약을 꺼내 확인했다.

원체 알려진 것이 없는 약이니 확인한들 회명단이 맞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풍기는 냄새로 미루어 보아 사람이 먹었을 때 위험하거나 왕이 복용 중인 탕약과 상극인 약재는 없는 듯했다.

“전하께 올려도 큰 문제는 없겠습니다.”

의원의 소견을 들은 연주는 곧장 회명단을 정엽에게 먹였다. 그러곤 지금껏 그래 왔듯 그의 곁을 지키며 한시라도 빨리 그가 깨어나길 기도했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나, 정엽은 모두가 잠든 밤중에 눈을 떴다.

“……정엽? 정신이 들어요?”

정엽과 눈이 마주쳤다는 놀라움도 잠시,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린 연주가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그러나 주변의 촛불 때문에 눈이 부신 것인지, 아니면 뒤늦게 상처의 고통이 몰려오는 것인지,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힘겹게 마른 침을 삼킬 뿐이었다.

“목이 마른가요? 아니면 다친 데 말고 다른 곳이 아파요? 아, 의원을 불러올까요?”

정엽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던 연주가 무엇이든 말해 보라는 듯 이것저것 물었다. 그러곤 정엽의 대답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의 입 모양을 유심히 살폈다.

긴 기다림 끝에 정엽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주야.”

“네. 뭐든 얘기해요.”

“왜, 안 자고 있어?”

물이든 약이든 정엽이 당장 필요한 걸 말할 거라 생각하고 촉각을 곤두세우던 연주가 되돌아온 엉뚱한 질문에 우두망찰했다.

6일 만에 정신을 차렸으면서 한다는 말이 고작 ‘왜 안 자고 있어?’라니. 연주는 정엽이 무슨 생각으로 제게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또 자객이 올까 봐 무서운 건가……?”

“…….”

“아니면…… 어디가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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