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풍 대인은 겁을 내지도, 몸을 사리지도 않고 평상시처럼 그녀를 대했다.
“사실 처음부터 선생과 세자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고는 생각했습니다. 향주에 처음 오실 때도 왕자와 함께 오셨었으니까요. 하여, 내심 왕세자 저하의 누이가 아닐까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왕세자께선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사람과 두루 교류하는 분이시지만, 여인에게 쉽게 곁을 내어 줄 만큼 허술한 인사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또 선생 역시 평범한 조향사라기엔 타고난 기품이 돋보이는 분이었고요.”
“……처음부터 대인의 눈을 속이는 건 무리였나 봅니다.”
“그저 남들보다 사람 보는 안목이 조금 있는 것으로 해 두지요. 한데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연친왕 전하께서 병석에 누우신 마당에 기우제를 예정대로 진행하는 건 어렵지 않겠습니까?”
풍 대인의 염려에 덩달아 얼굴에 그늘이 졌던 연주가 심지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법을 찾아야지요. 꼭 찾아낼 겁니다.”
지금껏 연주가 뜻을 세워 이루지 못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아는 풍 대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친왕과는 남이 된 지 오래라고 했지만 이만하면 천생배필 아닌가.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혹시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풍 대인.”
“별말씀을요. 선생이 우리 만향방에 가져다준 이익에 비하면 약소한 일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아직 제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많아서요.”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지금 선생께서 하실 일은 연친왕 전하를 돌보는 것이 아닙니까?”
연주의 배웅을 마다한 풍 대인이 홀로 방을 나섰다. 방문 앞까지 따라 나온 연주는 떠나는 그를 향해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 * *
그날 밤, 연주는 뜬눈으로 정엽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정엽은 그간 충분히 자지 못했던 잠을 몰아 자기라도 할 생각인지, 도무지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하룻밤 만에 정신을 차리는 건 어려웠던 걸까.’
연주는 어느덧 푸르스름하게 밝아 오는 창가를 확인하곤 긴장으로 저린 손끝을 모아 쥐었다. 오늘은 바로 정엽이 재계를 위해 재궁에 들어야 하는 날이었다.
사실상 재계가 기우제의 첫 단추인 만큼, 정엽이 재궁에 제때 들어가지 못하면 이번 기우제는 운이 좋아 어쩌다 비가 내린다 해도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살수에게 습격당한 일이 외부로 알려지면 태자는 반드시 정엽이 안가에서 숨어 지내던 걸 문제 삼을 거야.’
무엇이 두려워 안가에 숨었느냐, 안가에서 대체 무엇을 했느냐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어 정엽을 궁지에 몰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밤새 이 난관을 극복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연주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장 부관, 밖에 있으면 들어오게. 긴히 할 말이 있네.”
“예.”
짧은 대답과 함께 안으로 들어온 장명이 연주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일어나라는 말 대신 곧장 본론을 꺼냈다.
“시간이 없네. 지금 당장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전하를 재궁으로 옮길 방법을 찾게.”
“……이 상태로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하오나…….”
장명이 난처한 듯 말끝을 흐렸다. 연주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네. 또 재궁은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하게 금지된 곳 아닌가. 전하께서 안전하게 병세를 회복할 장소로 제격일 걸세.”
“하면 마마께선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전하를 돌볼 의원과 함께 용무군 군사로 위장해 재궁으로 들어갈 생각이네. 그럼 전하를 돌보는 데는 큰 문제가 없겠지.”
“재계 기간이 제법 길긴 하지만 그 안에 전하께서 깨어나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땐 마지막 승부수를 띄워야지.”
“……예?”
마지막 승부수라니. 사경을 헤매는 병자를 멀쩡하게 꾸며 재궁으로 옮기는 것만으로도 위험천만한 일인데, 무슨 승부수가 더 남았단 말인가?
당황한 장명이 연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마주 선 연주가 또박또박 말했다.
“세상에 전하의 부상을 숨길 수 없다면, 습격은 안가가 아니라 재궁에서 벌어진 일이 되어야 하네. 그래야 전하께서 태자를 상대로 후일을 도모하실 수 있지 않겠는가?”
“설마…….”
지금 이분이 내가 아는 연왕비, 아니 군주마마가 맞는가?
잠시 우두망찰하던 장명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만에 하나 전하께서 깨어나시지 못한다 해도 마마의 말씀대로 태자에게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되지요. 언제든지 재궁에 자객이 든 것처럼 꾸밀 수 있도록 준비해 놓겠습니다.”
“부탁하네.”
“별말씀을요. 소신은 그저 마마와 같이 전하의 앞날을 생각할 뿐입니다.”
연주를 향해 무릎을 꿇고 극진한 예를 바친 장명이 처소를 나섰다.
* * *
의원과 함께 용무군 군사로 위장한 연주는 의식이 없는 정엽을 데리고 동이 트기 전 재궁에 입성했다. 하지만 재궁에 들어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연주는 숨 돌릴 새도 없이 의원과 함께 밤낮없이 정엽의 치료에 매달렸다. 그러나 5일이 지나도록 그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정엽, 눈 좀 떠 봐요. 응?”
이제 기우제까지 남은 시간은 단 이틀. 마음이 조급해진 연주가 정엽의 육신이든 혼백이든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의 커다란 손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파리하기만 한 정엽의 안색을 보노라면, 연주는 별수 없이 그를 전쟁터에 보낼 때마다 시달렸던 악몽이 떠올랐다. 꿈속의 그는 매번 얼음으로 가득 찬 관에 누워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간 이보다 더 위험한 일들을 숱하게 겪었을 사람이니 절대 잘못될 리 없어.”
그래. 그럴 리 없어. 천하의 소정엽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온종일 수없이 되뇌며 버텨 왔지만, 지금껏 정엽이 이렇듯 맥없이 오래 누워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연주는 도무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괜찮다고 했잖아요. 괜찮다고 했잖아…….”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한 정엽을 바라보던 연주가 애써 울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영서각에 단둘이 남게 된 그 순간부터 정엽은 피를 물처럼 쏟아 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네가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니. 정엽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러 돌이켜 보니 그 말이 꼭 생애 마지막 말처럼 불길하게 들렸다.
“손이 왜 이렇게 차요…….”
연주는 오늘따라 차가운 정엽의 손이 마음에 걸려 연신 그의 손을 비비고, 주무르고, 끌어안으며 분주하게 온기를 더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극도의 불안은 어느새 자책으로 이어졌다.
‘처음부터 내가 정엽을 따라서 안가로 간 게 잘못이었을까.’
그럼 설령 안가에서 습격이 있었다 해도 지금처럼 다쳐 재궁에 몸을 숨기는 일은 없었을 텐데. 연주의 머릿속에 수많은 가정과 의문이 소란스럽게 끓어올랐다.
상념이 쌓일수록 선명해지는 사실은 이 사태의 중심에 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중요한 순간에 정엽이 저를 지키려 나서지 않았더라면, 지금 같은 상황에 놓일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차라리 더 매몰차게 굴걸. 친구처럼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하지 말걸…….’
처음부터 여지를 남기지 않았더라면 정엽도 좀 더 일찍 마음 정리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연주는 벗어나려 할수록 점점 깊어지는 죄책감 속에서 길을 잃어 갔다.
* * *
“흠흠, 탕제를 좀 달여 왔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날이 저물어, 그녀와 함께 재궁에 온 의원이 정엽의 저녁 탕제를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죽처럼 걸쭉한 탕제는 그것이 다스릴 병의 깊이를 나타내듯 쓴 내가 진동했다.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의원은 늘 하던 대로 탕약을 내려놓고 정엽의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연주의 도움을 받아 정엽을 제 몸에 기대게 한 의원이 당부했다.
“약이 식기 전에 다 드시게 해야 합니다. 아시지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 의원이 눈짓으로 약사발을 가리켰다. 그것을 들고 잠시 망설이던 연주가 뜨거운 탕약을 날숨으로 식혀 정엽에게 한 술 한 술 조심스럽게 떠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 보아도 정엽의 입에 들어가는 게 반, 흘러내리는 게 반이라 해도 좋을 만큼 버리는 약이 더 많았다.
“다 먹어야 하는데…….”
연주는 속상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항상 바다같이, 태산같이 거대하고 듬직해 보이기만 하던 남자가 약 한 술 제대로 넘기지 못할 만큼 무기력해져 있다니.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른 연주가 간신히 약사발을 비우고 그를 다시 눕혔다. 그녀는 의원이 정엽의 옷자락을 들춰 상처를 살피는 동안 노심초사하며 입술을 짓이겼다. 연주는 의원이 정엽의 곁에서 물러나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전하께서 깨어나시려면 아직 멀었는가?”
“아무래도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회복이 더디신 듯합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는가?”
“계속 약을 쓰며 기다려 보는 수밖에요.”
“하…….”
사람들 앞에서 늘 담담해 보이려 노력하던 연주도 오늘만큼은 착잡함을 숨기지 못했다.
물론 연주는 기우제 당일까지 정엽이 깨어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다. 용무군 군사 중 몇을 자객으로 분장시켜 피습을 꾸미는 게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 방책은 당장의 상황을 무마할 수는 있어도, 자칫 훗날 분란의 빌미가 될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기도 했다.
“내게 전하를 일어나시게 할 만병통치약이라도 있었으면 좋겠군.”
“송구합니다. 다 소인의 의술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래도 풍문에 따르면 그런 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게 뭔가?”
오늘따라 뜸을 들이는 의원의 태도에 갑갑함을 느낀 연주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