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필사의 의지로 휘두른 칼은 살수의 명치를 뚫고 들어갔다.
“하아, 하아…….”
마지막 살수가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것을 확인한 정엽이 배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이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를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연주가 놀랄 테니까. 정엽은 당장 제 몸을 위하기보다 연주 앞에서 멀쩡해 보이는 쪽을 택했다. 그는 피가 솟구치는 복부를 손바닥으로 감싼 채 책장에 몸을 기댔다.
그 바람에 책장이 흔들리며 그 앞을 가리고 있던 비단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란이 벌어지는 내내 눈과 귀를 막고 있던 연주는 주변의 공기가 달라진 것을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다.
선반의 책 더미 너머 홀로 아슬아슬하게 몸을 기대고 서 있는 정엽의 모습이 보였다.
“정엽……?”
놀란 연주가 재빨리 책장을 돌아 나왔다. 지금 그녀의 눈엔 주검이 바닥에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 광경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는 정엽의 모습이 훨씬 참혹해 보였다.
어쩔 줄 모르는 연주를 발견한 정엽이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엉거주춤하게 있던 몸을 애써 곧추세웠다.
“어떻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해요?”
우왕좌왕하던 연주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정엽을 재빨리 부축했다. 그녀는 이내 장대한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함께 주저앉았다.
정엽은 몸이 바닥에 부딪치는 충격에 옅게 신음했다. 그는 연주가 상처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더 보지 못하도록 품에 꼭 끌어안으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많이 다친 거예요?”
예사롭지 않은 정엽의 숨소리에 긴장한 연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연주의 어깨에 턱을 괸 채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디던 정엽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다쳤느냐 물었는데 괜찮다니.
정엽이 이토록 맥을 못 추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연주는 정엽이 필시 크게 다친 거라고 확신하고 서둘러 그의 몸을 더듬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엽의 복부가 젖어 있었다. 축축한 감촉에 놀라 황급히 손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이 온통 끈적한 피로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출혈이 심하잖아요. 어디 좀 봐요, 응?”
다급해진 연주가 정엽의 상처를 살피기 위해 그의 품에서 버둥거렸다. 하지만 정엽은 연주가 밀어낼수록 그녀를 더욱 당겨 안으며 고집스럽게 버텼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는…….”
같은 말만 반복해 중얼거리던 정엽이 한숨처럼 속삭였다.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그걸로 됐어.”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정엽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정엽의 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기 시작하자, 연주의 머릿속은 말 그대로 새하얗게 변했다.
“이건 꿈일 거야.”
꿈이어야 해.
하지만 아무리 되뇌어 봐도 눈앞의 현실은 그대로였다. 황망한 표정으로 정엽을 내려다보던 연주가 소리쳤다.
“장 부관! 장 부관!”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 눈을 부릅뜬 연주가 문밖의 동태를 살폈다.
침입한 살수들이 모두 죽었는지, 또 안가에 몸을 숨긴 살수가 더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던 장명이 연주의 새된 고함을 듣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찾으셨습니…….”
연주에게 향했던 장명의 시선이 그녀의 품에 늘어져 있는 정엽에게로 옮겨 갔다. 함께하는 10년 동안 전장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이겨 낸 주군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지금? 여기서? 왜…….’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장명이 얼어붙었다. 그런 그를 깨운 것은 연주의 추상같은 목소리였다.
“당장 전하를 처소로 모시게!”
뒤늦게 정신이 되돌아온 장명이 연주의 도움을 받아 정엽을 등에 업고 뛰어나갔다. 위기를 감지한 군사들과 하인들이 뒤이어 밖으로 나온 연주 앞으로 재빨리 모여들었다.
연주가 안가의 하인을 향해 물었다.
“안가에 의술을 아는 자가 있느냐?”
“없사옵니다.”
“그럼 향주에 성국부와 연이 닿은 의원이 있느냐?”
“한 사람 있긴 했으나 얼마 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정녕 정엽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인가? 난처함에 이를 악문 연주가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하면 만향방 풍 대인의 저택을 아는 자도 없는 것인가?”
“풍 대인의 저택이라면 소신이 알고 있습니다.”
“자네가?”
대답은 뜻밖에도 용무군 군사에게서 돌아왔다. 의아해하는 연주를 향해 군사가 앞으로 한 발 나아와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전하의 명을 받아 마마께서 이곳에서 만드신 향을 풍 대인에게 전해 준 적이 있사옵니다.”
“그럼 지금 당장 풍 대인을 찾아가서 믿을 만한 의원을 수배해 달라 청하게.”
연주는 안도할 겨를도 없이 허리춤의 옥패를 끌러 군사에게 넘겨주었다.
옥패 앞면에는 이것의 소지자를 황제와 같이 대하라는 뜻의 ‘여짐친림(如朕親臨)’이란 네 글자가 선명했다. 이를 확인한 군사가 연주를 향해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고 날래게 사라졌다.
“남은 사람들은 주변을 정리하고 전하께서 계신 처소를 중심으로 경호를 강화하게!”
하인과 군사들은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도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흩어졌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연주가 곧이어 빠른 걸음으로 정엽의 처소로 향했다.
“가서 뜨거운 물과 깨끗한 무명천을 가져오게.”
낯선 방 안으로 들어가니 정엽은 침상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연주는 안절부절못하는 장명을 내보내고 망설임 없이 정엽의 웃옷을 헤쳤다. 그러고는 장명이 찾아온 깨끗한 무명천으로 상처가 난 자리를 강하게 압박했다.
새하얗던 무명천은 금세 붉게 물들고, 연주는 그때마다 새 무명천을 겹겹이 덧대어 환부를 지혈하며 의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사람이 영영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어느새 양손이 모두 정엽의 피로 얼룩진 연주는 무심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정엽의 얼굴에 가슴 저릿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연주는 삿된 생각을 떨쳐 내듯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아니야. 정신 차려. 아직 살아 있잖아. 뭐가 됐든 지금 이 사람은 내가 지켜야 해.’
설령 죽음의 사자가 정엽의 혼백을 노린다 한들, 그자의 목을 비틀어서라도 정엽을 지켜야 했다. 자기 자신을 엄하게 다그친 연주가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선생, 의원을 데려왔습니다.”
그사이, 옥패를 전달받은 풍 대인이 의원을 대동하고 안가를 찾았다.
“어서 오세요, 풍 대인.”
상처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풍 대인과 짧은 인사를 나눈 연주가 의원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신중하게 정엽의 상태를 살핀 의원이 말했다.
“다행히 장기는 상하지 않은 듯합니다. 하지만 상처가 깊어 출혈이 심한 것이 문제로군요.”
“반드시 살려야 하네. 이 사람을 살리지 못하면 자네는 물론이고 딸린 식솔들도 무사치 못할 게야.”
의원은 환자의 상태를 보든, 제게 으름장을 놓는 여인의 태도를 보든 심상치 않은 사건에 휘말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연한 얼굴로 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침통을 연 의원은 차분하게 혈 자리를 찾아 침을 놓았다. 그는 혈행이 느려져 출혈이 잦아들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의원은 능숙하게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었지만, 지켜보는 연주는 그 짧은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어찌 이리 오래 걸리는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엽의 호흡을 지켜보던 의원은 이윽고 본격적으로 환부를 소독하고 내상을 살핀 뒤, 상처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생살이 불에 달군 바늘에 꿰이는 고통은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정엽이 간헐적으로 몸부림치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환자를 좀 잡아 주시겠습니까?”
의원의 요청에 장명이 먼저 나서 정엽의 다리를 붙들었다. 연주는 정엽의 머리를 품에 꼭 감싸 안은 채 귓가에 연신 부드럽게 속삭였다.
“쉬잇, 괜찮아요. 다 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 응?”
정엽은 연주의 따스한 목소리에 반응한 듯 움직임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연주는 가쁜 숨을 내쉬는 정엽을 격려하듯 품 안의 그를 정성껏 보듬었다.
이윽고 봉합한 상처를 깨끗한 무명천으로 단단히 동여매고서 치료를 마친 의원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당장 큰 고비는 넘겼지만, 내상이 깊어 의식을 되찾을 때까지 잘 지켜봐야 합니다. 곧장 회복을 도울 탕제를 지어 올리겠습니다.”
“수고했네. 잘 부탁하네.”
한숨 돌린 연주가 지친 얼굴로 답했다. 장명은 힘 빠진 연주의 목소리를 의식한 듯 호언장담했다.
“필요한 약재가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온 나라를 다 뒤져서라도 구해 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장명은 의원과 함께 처소 밖으로 나갔다. 상황이 얼추 정리되자, 연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습니다, 풍 대인.”
연주는 풍 대인을 향해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려 했다. 풍 대인이 그런 그녀를 극구 만류하며 말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옥패는 다시 가져가십시오.”
연주는 풍 대인이 내미는 옥패를 받아 들고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소식을 듣고 여러모로 놀라셨을 줄 압니다. 하지만 풍 대인에게 해를 끼치고자 한 것은 아니었어요. 부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