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그날 밤 정엽은 영서각이 아닌 다른 곳으로 짐을 옮기고 홀로 잠들었다. 그는 다음 날 하인을 보내 깨끗이 치웠던 조향 도구를 모두 돌려주고 거짓말처럼 영서각에 발길을 끊었다.
혼자 남겨진 연주는 낮이면 향료와 조향 도구를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밤이면 교향서를 필사하며 정엽의 빈자리를 외면했다. 반면, 정엽은 밤마다 영서각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매일 연주 몰래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는 사이 정엽이 재궁으로 떠나는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날도 밤늦게까지 영서각을 지켜보고 있던 정엽은 연주의 부탁으로 밤에 마실 차를 준비해 주고 나오던 하인과 마주쳤다.
“전하, 어찌 이곳에 계신 것이옵니까? 혹 군주마마께 전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것인지요?”
“아무것도 아니다.”
싱거운 정엽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하인이 영서각을 떠났다. 정엽은 새삼 자신이 일개 하인이 보기에도 이상해 보이는 행동을 매일 밤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조소했다.
‘적군의 군대도, 아버지도 두려워하지 않던 내가 이게 무슨 꼴인지.’
저 여자는 나를 늘 우습게 만드는구나.
정엽은 자조하면서도 연주의 그림자가 드리운 사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벌써 자는 건가?”
하지만 연주는 혼자서 지내는 생활에 완벽히 적응했는지, 오늘은 해시가 되기도 전에 침소의 불을 껐다. 그녀의 그림자조차 훔쳐볼 수 없게 된 정엽은 아쉬움에 길게 탄식하며 깜깜해진 창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내일이면 이 생활도 끝이로군.”
좀처럼 발길을 돌리지 못하던 정엽이 호위를 위해 세워 둔 용무군 군사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영서각 앞마당을 나섰다.
그 순간.
피유웅-!
안가 동쪽 담장에서 침입을 알리는 명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채연주!”
신호를 들은 정엽은 즉시 연주가 있는 영서각을 향해 바람처럼 내달렸다. 하지만 벌컥 합문을 열고 들어서자, 잠든 줄 알았던 연주가 기다렸다는 듯 정엽을 맞이했다.
“떠나야 하나요?”
그렇게 묻는 연주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침착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는 손에 언젠가 정엽이 침상 한 귀퉁이에 숨겨 뒀던 장검을 들고 있었다.
“아니.”
연주가 명적 소리를 듣고 깨어나 당황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던 정엽은 결연한 얼굴로 검까지 찾아 들려 주는 그녀의 야무진 행동에 허탈하게 웃었다.
두려움이라곤 없는 초연한 눈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적의 침입마저 아주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졌다. 합문을 굳게 닫고 연주에게 성큼성큼 다가선 정엽이 말했다.
“저들이 안가까지 침입했다는 건 이곳에서 반드시 모든 걸 끝내겠다는 뜻이야. 물러설 곳은 없어.”
연주가 건네준 검을 챙겨 든 정엽이 그녀를 내실 한쪽에 늘어서 있는 책장 너머로 이끌었다. 살수들이 내실을 향해 마구잡이로 화살을 쏘아 댈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함께 잠시 몸을 숨긴 그는 서책 위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늘어뜨린 비단 사이로 바깥 동정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애써 담담한 척하고 있지만, 이런 숨 막히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연주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억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걱정 마.”
작은 행동에서 연주의 불안감을 읽은 정엽이 낮게 속삭였다.
그 한마디가 뭐라고. 연주는 높낮이 없는 평온한 목소리에 긴장감이 다소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가늘게 날숨을 뱉은 연주가 물었다.
“안가에 침입한 자들이 몇 명이나 될까요?”
“많아야 서른 남짓일 거야.”
돌아오는 정엽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들렸지만,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사실 정엽은 사방의 담장에 배치해 둔 용무군에게 습격 인원이 서른 명을 넘기면 한꺼번에 명적 두 대를 쏘아 올리라 명해 두었다.
안가의 인원으로 상대할 수 있는 적수는 최대 서른 명 정도이기에, 그 이상의 인원이 침입하면 모두의 안전을 위해 안가를 버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런 내밀한 사정은 몰라도 안가에 있는 무력을 가진 사람이 용무군 군사 열에 하인 다섯, 정엽 하나로 도합 열여섯뿐이라는 건 아는 연주가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가 수적으로 한참 열세인 것 아니냐 물으려던 연주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살수들이 집 안으로 침입한 마당에 쓸데없는 말을 얹는 건 정엽의 사기만 떨어뜨릴 뿐이었다.
용무군 군사들은 정엽과 함께 전쟁터를 누벼 온 용감무쌍한 자들이고, 정엽은 그런 용무군 군사 스무 명을 혼자서도 거뜬히 상대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정엽에게 다 생각이 있겠지.’
입술을 짓이기던 연주가 한숨을 삼켰다.
작은 머리로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하는 건지. 연주의 어두운 얼굴을 흘끗 내려다본 정엽이 점차 영서각 주변으로 몰려드는 인기척을 감지하고 입을 열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이제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네.”
연주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합문 밖에서 창칼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를 시작으로 소란이 벌어졌다. 다행히 살수 중 궁수가 섞여 있진 않은 모양이었다. 벼린 칼이 육신을 베고 찌르는 소리와 뼈가 부러지는 소리, 단말마의 비명이 사방에서 뒤엉키기 시작했다.
연주는 사람이 죽어 나가는 끔찍한 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치다, 정엽이 시킨 대로 냉큼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눈을 꼭 감았다.
그런 연주의 모습을 확인한 정엽이 그녀의 위치가 들키지 않도록 슬그머니 책장 뒤편에서 나와 내실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
천천히 검의 손잡이를 움켜쥔 그는 도약을 준비하는 맹수처럼 전신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다음 순간, 영서각의 합문이 부서지며 검은 그림자 둘이 한꺼번에 날아들어 왔다.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든 정엽은 근육이 두껍게 엉긴 긴 팔로 허공에 크게 반원을 그렸다.
“으악!”
군더더기 없는 일격에, 살수 둘의 머리가 화살에 꿰인 까마귀처럼 볼품없이 굴러떨어졌다.
눈앞에서 이 광경을 본 살수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단 일합에 두 사람의 목이 날아가는 건 검날에 초인적인 힘이 실리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살수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잠시 주춤거리다, 이내 괴성을 지르며 한꺼번에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엔 한 번에 여덟이라. 섣불리 먼저 공격했다가는 오히려 적에게 틈을 줄 뿐이라고 판단한 정엽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마구잡이로 덤벼 오는 살수들과 격전을 벌였다.
시퍼런 살기를 내뿜는 검과 한 몸이 된 그는 쉴 새 없이 날렵하게 움직이며 다가오는 그림자를 차례로 제거해 나갔다. 깔끔하게 급소를 공격당한 살수들은 단박에 숨이 끊어져 다신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눈 깜짝할 새 쓰러진 살수가 모두 넷. 시체를 방패 삼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살수까지 처리한 정엽이 잠시 포위망이 흐트러진 틈을 타 슬금슬금 검 끝을 들이대는 자의 어깻죽지를 베어 냈다.
“후우…….”
이제 남은 살수는 셋. 차분히 숨을 고른 정엽이 검을 고쳐 잡았다.
살수 일곱을 혼자 처리하다니. 상상을 초월하는 정엽의 위력에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직감한 살수들이 더 이상 선뜻 덤비지 못하고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사이 영서각 바깥의 상황도 조금씩 정리가 되어 가는지 칼 부딪치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젠장.”
더 지체하면 임무는 꼼짝없이 실패로 돌아간다. 어차피 오늘의 목표는 연친왕. 찰나에 눈빛을 주고받은 살수들이 각자 정엽의 목 좌우와 그의 허리를 향해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그들보다 기골이 장대한 정엽의 특징을 역이용해 어떻게든 그의 목을 날리기 위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태산 같은 몸을 순식간에 낮춘 정엽은 살수들의 공격을 가뿐히 피한 뒤, 꿇어앉은 한쪽 무릎을 축으로 몸을 회전해 그들의 무릎 아래를 노렸다.
“크윽!”
서슬 푸른 검의 궤적을 피하지 못한 살수 하나가 다리가 잘려 주저앉았다. 정엽은 이어 망설임 없이 살수의 몸통을 길게 그었다.
간신히 정엽의 검을 피한 살수 둘은 잠깐 사이에 각기 대들보 위와 문 쪽에 자리를 잡았다.
“……!”
그 순간, 천장에 매달린 살수의 시야에 책장 뒤편에 숨어 있는 연주가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연친왕은 맨 처음 여덟이 한꺼번에 덤빌 때부터 책장을 등지고 서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등 뒤를 내어 주지 않기 위한 전략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의 약점이 책장 뒤에 있어 그랬던 모양이었다.
“이야압!”
회심의 미소를 지은 살수가 정엽이 아닌 책장 쪽으로 뛰어내리며 연주를 향해 검을 겨눴다.
가진 검은 하나뿐. 저 칼을 막으면 내가 죽고, 저 칼을 막지 않으면 연주가 죽는다.
정엽은 살수의 행동이 제 주의를 흐트러뜨리려는 함정인 줄 알면서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책장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제 목을 벨 기회를 노리고 다가오는 살수 대신, 연주를 향해 검을 들이대는 살수의 심장을 꿰뚫었다.
“푸학!”
공중에서 뿜어져 나온 핏물이 사방으로 어지럽게 튀었다. 그와 동시에 탄탄한 근육을 뚫고 정엽의 배 속으로 날카로운 검이 파고들었다.
복부에서 시작한 열감이 순식간에 온몸을 휘감았다. 뒤이어 피비린내와 함께 축축하고 음습한 고통이 전신으로 무섭게 번져 나갔다.
뜻대로 간신히 급소를 피하기는 했지만, 숙련된 살수의 검은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정엽이 고통을 참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는 사이, 거리를 조금 더 좁혀 온 살수가 검을 뽑기 위해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이 검이 뽑히면 다 끝이다!’
이를 악문 정엽이 점점 힘을 잃어 가는 팔을 들어 힘껏 휘둘렀다.